언젠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냉장고 이야기가 기억난다. 글을 쓴 이는 아들인데 본가에 갔다가, 어머니의 긴 출타를 틈타서 몇년 동안 하지 못한 본가 냉장고 청소를 해버린다. 그는 냉장고 칸칸마다 가득 채워진 '정체불명의 검은 봉다리'를 모두 버릴 수 있어서 속이 후련하다고 썼다. 그 냉장고 청소를 위해 오랫동안 절호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도 덧붙였다. 그 아들은 무척 깔끔하고 정리정돈을 잘 하는 성격이었는지, 본가 냉장고의 '처참한' 상태를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글에는 이런저런 댓글이 달렸는데, 잘했다는 의견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냉장고의 주인인 어머니의 의견도 묻지 않고 한 것은 심하다는 글도 있었다. 그 '검은 봉다리'는 어쩌면 다들 자신들의 집에서 한 번쯤은 보았던 것이라 그랬는지 많은 공감도 자아냈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려면 일일히 열어봐야 하는 그 검정 비닐 봉투.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시장 비닐 봉투는 내용물과 함께 도대체 언제 샀는지도 모르게 만드는 마법 봉투이다. 그것들이 점령한 냉장고가 못마땅하다 하더라도 내 생각에 그 '깔끔한' 아들은 나중에 집에 와서 그 모든 사태를 확인한 어머니한테 등짝을 한 대 세게 맞았을 것 같다. 


  올 봄에 세탁기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 기사가 방문했는데, 같은 회사의 제품인 냉장고도 점검해 주었다. 냉장고는 잘 정리되어 있었고, 검정 비닐 봉다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사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마치 어디선가 일기장을 잃어버렸는데, 그걸 주운 누군가가 읽어 본다고 생각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냉장고'란 물건이 지닌 그 본성, 그리고 그 공간에 든 내용물들이 냉장고 주인의 일부, 어쩌면 아주 큰 부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기장'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스테파니 드 루즈(Stephanie de rouge)는 바로 그 냉장고가 가진 특별한 의미에 주목하고 자신의 사진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당신의 냉장고 안(In Your Fridge, 2011)'으로 펴냈다. 그 사진들은 냉장고 주인(또는 가족들)과 그 냉장고 안 사진을 이어 붙여서 보여준다. 각각의 냉장고 사진들은 그것을 쓰는 이들의 삶의 방식, 가족 구성원, 계층, 선호하는 음식과 같은 아주 다양한 정보들을 유추하게 한다. 그 유추된 생각들과 사진 속 냉장고 주인의 실제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있다.


  이제는 종영한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도 그런 냉장고 사진들을 보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 프로에서 냉장고는 당당히 중심을 차지하는데, 그 열려진 냉장고 안의 내용물들은 그 주인들의 성격, 일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각종 주류와 안주로 가득찬 냉장고 주인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만남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정보를 준다. 그런가 하면 각종 건강식품과 오만가지 '즙들의 향연'을 냉장고에서 보여준 출연자도 있었다. 운동선수였던 그가 가장 중시하는 삶의 가치는 아마도 '건강'이었을 것이다. 유통 기한이 지난 식품이 나오는 것은 흔한데,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출연자는 문희준이었다. 그의 냉장고 하단 야채 박스에는 유통 기한이 몇년 지난 닭가슴살 팩들이 잔뜩 있었다. 진행자가 왜 이걸 아직도 버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닭가슴살 팩에 인쇄된 선배 연예인 사진을 보면 미안한 마음에 차마 버릴 수 없었다고 해서 웃음을 주었다.

 

  나의 냉장고 안을 누군가 본다면 아주 단번에, 명확하게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아, 이 냉장고 주인은 요리에는 뜻이 없구나."


  요리, 나에게 있어 그렇게 괴롭고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작업은 없었다. 수많은 요리책을 읽었고 도전해 보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실망과 놀라움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 후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는 요리에 너무나 많은 '창의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요리란 정확한 분량의 계량, 정해진 조리 순서,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의지의 총체적 결과물인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의 중요성을 때론 무시하고, '내 방식'대로 해버린다. 요리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창의성'이다. 그건 대가들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그렇게 요리를 포기하게 된 이후로 나의 냉장고는 간촐해졌으며, 대신 이런저런 냉동, 즉석 식품들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 가끔은 그런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것이 냉기가 가득한 황량한 사막의 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냉장고 안 주황색의 백열전구 불빛만이 그 쓸쓸한 풍경에 그나마 온기를 더한다. 이제는 요리에 창의성을 발휘하는 대신에, 매일의 글쓰기를 통해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냉장고 안 풍경은 건조하고, 단조로우며, 고독하다. 그러나 내가 쓰는, 그리고 쓰게 될 글들에는 따뜻함과 다채로움, 세상과 사람들 사이의 연대(solidarity)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언가'가 있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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