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고(1966)'의 프랑코 네로가 1976년에 찍은 '케오마(Keoma, 서부의 불청객)'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케오마'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데, 그 이름은 원주민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독특한 주술적 장치, 원주민 혼혈의 북군 출신의 주인공, 악당으로 설정된 남부군 등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찾다가 DVD를 구매한 이의 평을 읽었는데, 이런 글이 있었다.


  "진짜로 돈과 시간만 낭비한 작품입니다."


  그 글을 쓴 이는 어느 블로그에서 좋다는 평을 읽고 구매했다가, 지뢰작을 고른 셈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영화 '장고'를 이 글을 읽고나서 보려는 이들도 그런 비슷한 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은 영화의 화면 자체가 전반적으로 많이 '후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촬영 당시의 절대적인 광량()의 부족 때문이다. 영화는 대부분 춥고 흐린 날씨의 환경에서 촬영이 되었는데, 이 부분이 후반 현상 작업에서 문제가 되었다. 음영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촬영분을 다시 찍거나 할만한 제작비도, 여건도 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영화에서 멕시코 국경 수비대의 금을 탈취한 다음에 창고에 쏟아서 보관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금이 아스팔트 포장재로 보일 정도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화면의 어두움과 주요 배경이 되는 마을 세트장의 진창길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내는 측면도 있다. 대부분의 서부극이 모래가 날리는, 햇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장고'는 웅덩이가 흥건한 진창길, 음울한 잿빛 하늘이 이 화면을 채운다. 프랑코 네로가 분한 장고는 밧줄에 묶은 관을 그 진창길을 질질 끌고가며 등장한다.  


  북군 출신의 장고는 자신의 아내를 죽인 남부군 잭슨 소령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잭슨 소령의 잔당과 KKK(Ku Klux Klan)단원들을 기관총으로 그야말로 '쓸어버린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이러한 설정은 미국 서부극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면이다. 마치 뭐랄까, 어떤 강고한 결의마저 느껴진다.


  "당신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대신 보여주마."


  수정주의 웨스턴의 걸작이라고 하는 존 포드의 '수색자(1956)' 이후로, 미국 할리우드의 서부극에는 원주민들을 악마화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서 자기 성찰의 기운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부군을 '악의 축'으로 내세우지는 못했다. 존 포드의 1959년 작 '기병대'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남군이 북군에 격파당하는 결말인데 당시의 처참한 흥행실패가 그 점을 보여준다. 미국의 관객들, 특히 남부 주민들에게 그런 영화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온 것은 아니었다. 여전한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의 유령이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은 1960년대의 흑인 인권운동, 최근의 BLM(Black Lives Matter)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장고는 자신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장고'라는 사내가 누워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 내내 관 속에 자신을 넣어야한다고도 말한다. 그 말은 아내의 복수와 함께 이전의 자신의 삶도 의미한다. 더불어 그 관 속에 들어가야할 것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모든 악습과 치부일지도 모른다. 원주민 학살과 노예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오래된 역사, 그 모든 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더러운 진창길' 위에 깔려있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선 후보 토론에서도 언급된 '프라우드 보이스(Proud Boys)'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극우단체로 트럼프의 호위무사를 자처한다. 그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공권력에 맞서는 나라, 그것이 오늘날의 미국이다. 프라우드 보이스의 단원들에게 백인 우월주의는 수치가 아니라 신념이며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이다.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할 구시대적 악습이 미국을 분열시키며 흔들고 있다. 멕시코 양민들을 사격 연습대상으로 삼는 인종 차별주의자 잭슨 대령과 그 잔당들, KKK단원들을 장고는 결국 궤멸시키며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지만, 그가 자신이 끌고 다녔던 관 같은 어둡고 슬픈 과거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관에 넣어서 영원히 매장했어야할 악인들의 신념은 악령처럼 오늘날의 미국을 떠돈다.


  아마도 타란티노의 흥미를 끌었던 지점도 그 부분일 것이다. 그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로 1966년에 만들어진 영화 '장고'를 다시 소환한다. 어쩌면 그 영화는 영화적 시효가 다했어야할 주인공에게 숨을 다시 불어넣을 만큼 미국의 오랜 악습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감독 세르지오 코르부치가 창조한 '장고'라는 인물은 오래전에 자신의 복수를 끝냈다. 그가 끌고 다니던 관은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유사(砂)'속에 가라앉았으며, 신기에 가까운 사격솜씨를 보여주던 두 손은 짓이겨져서 못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할 바를 끝내고 더러운 진창길과 묘지가 있는 마을을 떠나갔다. 장고에게 또 다시 관을 끌게 만들어 우리 시대로 소환하는 일은 비극이 될 것이다.


  장고 역의 프랑코 네로는 23살의 나이에 이 영화를 찍고 세계적인 스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영어로 더빙된 이 영화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제대로 찍지 못해 어두운 화면, 제작사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택한 진흙으로 범벅된 질척거리는 세트장, 더빙 때문에 몰입이 안되는 인물들의 대사, 그 모든 것이 '옥의 티'일 수 있다. 그러나 헐리우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서부극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진정성'과 '신념'이 영화 '장고'에 있다.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며, 영화를 통해 54년 전에 장고가 걸어갔던 그 고통스럽고 더러운 진창길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주인공 '장고'의 이름은 대본을 쓴 감독 세르지오 코르부치와 그의 동생 브루노가 집시 출신의 세계적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에서 따온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