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 마이애미 시리즈의 어느 회차였던가, 호라시오 케인 반장이 아이를 내팽겨쳐두고 범죄에 가담한 여자에게 건조한 어투로 내뱉는 대사가 있었다.


  "You make me sick."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란 여자는 참 역겹군' 내지는, '당신 같은 여자를 보는 건 괴롭군' 정도쯤 될까. 영화 '황야는 통곡한다(1967)'에도 이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돈 호세는 집시 여인 카르멘을 만나면서 인생이 '꼬였다'. 그 정도가 보통이 아니다. 직업군인인 그는 계급이 강등되었고, 상관을 살해한 일로 쫓기고 있는 중이다. 이 여자는 그에게 같이 도망치자며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들은 돈 호세가 카르멘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자막은 이렇게 뜬다.


  "당신은 날 아프게 해."


  돈 호세는 카르멘을 미치도록,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도덕이나 윤리 관념은 아예 갖고 있지 않는 여자다. 끊임없이 그를 인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선택을 하도록 충동질하며, 오로지 고통과 불안만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여자에게 호세는 '당신은 견딜 수 없이 역겨워', 라고 했을까, 아니면 '당신은 날 아프게 해.'라고 했을까. 이건 오역일까? 나는 외화 번역가가 실수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 장면에서는 'You make me sick'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맞았을 것 같다.


  '돈 호세'와 '카르멘'이라니,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장고(1966)'의 대성공으로 뜬 프랑코 네로를 주연으로 앞세운 이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금괴 탈취'라는 사건을 넣어서 서부극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프랑코 네로를 알뜰히(!) 써먹는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황야는 통곡한다'이다.


  돈 호세로 나온 프랑코 네로는 이탈리아, 카르멘 역의 티나 오몽은 프랑스, 카르멘의 남편 역으로 나온 클라우스 킨스키는 독일 출신이다. 이 다국적 배우들을 묶는 것은 영어 대사이다. 원어민들이 아니니까 억양이나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대본 작가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생각을 영화 내내 하게 된다. 직업 군인인 돈 호세를 제외하고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집시, 포주, 산적, 화전민 같은 하층민들인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고급스러울 필요는 없다. 단순하고 명료한 단어 선택으로 이루어진 대사들은 배우들 입장에서도 부담을 줄여주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제작사들은 이런 다국적 배우들을 데려다가 주로 스페인 남부의 풍광을 배경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을 찍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이다. 꽤 잘 팔렸다. 프랑코 네로는 '장고'의 대성공으로 이어진 일련의 영화 경력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그랬던 그도 좀 지쳤던 모양이다. 그가 가발까지 쓰고 나온 독특한 서부극 '케오마(서부의 불청객, 1976)'에서는 무성의한, 정형화된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황야는 통곡한다'에서 보여주는 빛나는, 열정적인 모습과는 딴판이다.


  카르멘 역으로 나온 티나 오몽의 연기는 압권이다. 이 프랑스 여배우는 마치 카르멘의 현신같다. 제멋대로이며,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미모를 지녔으며, 결코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난다. '팜므 파탈'이니 하는 말로 이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카르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이며, 여자는 그 누구의 삶에 간섭하거나 불행으로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 돈 호세의 선택들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탈취한 금괴를 가지고 신세계로 떠나는 배를 탈 수도 있었지만, 돈 호세는 투우사에게 정신이 팔린 카르멘을 다시 찾아간다. 같이 떠나자며 붙잡는 동료 산적에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겠다고 한다. 카르멘에게 미쳐버린 그에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카르멘 밖에 없었다.


  "아, 이 불쌍한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한탄이 쏟아진다. 결국 사랑에 미친 이 남자는 자신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도 파멸로 이끈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에 황야도 '통곡'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독특한 로맨스/웨스턴 영화를 보고나서, 오페라 '카르멘'이 궁금해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오페라는 초연 때의 대실패로 작곡가 조르주 비제를 커다란 상심에 빠지게 만들었다. 비제는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골의 한적한 별장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리고 3개월 후, 서른 일곱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별세한다. 위대한 천재 작곡가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의 사후에 이 오페라는 전설이 되었다.


  아직 오페라 '카르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라면 아그네스 발차와 호세 카레라스가 열연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아그네스 발차의 카르멘을 뛰어넘는 카르멘은 어쩌면 내 생애에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스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는 카르멘 그 자체를 보여준다.


  사랑에 미쳐버린 이의 그 슬픈 끝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결코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 자유로운 새를 가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돈 호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프랑코 네로는 그 가여운 숙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남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 '황야는 통곡한다'의 원제목은 'Man, Pride and Vengean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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