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아버지의 세번째 기일이다. 아버지는 계절 가운데 가을을 가장 좋아하셨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그 계절에 떠나셨다. 이맘때 떨어진 은행 열매를 밟게 되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을 때, 나중에 아버지를 어디로 모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종손으로서 아버지는 고향의 선산을 늘 생각하셨지만, 그곳은 집에서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먼 산골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 생각도 해야했다. 그렇게 멀리 아버지를 보내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동생들은 당시에 주말마다 근교의 공원묘지와 추모 공원을 둘러보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추모 공원으로 결정되었다. 문중 어른들은 그 결정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유골함을 실외 매장지에 둘 것인지, 실내 봉안당으로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곳의 수목장은 아직 시범 사업 중이라 선택할 수 없었다. 실내 봉안당은 순서에 따라서 안장되는 것이라 이용자가 마음대로 그 자리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은 자리들은 이미 다 자리가 찼고,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봉안실의 창가 자리, 시선에서 약간 높은 정중앙의 위치로 정해졌다.


  집에서 거리가 가까운 것을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하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곤 했는데, 갈 때마다 그곳에서 만나는 인간의 면면들이 내게는 새로웠다. 한번은 화장실에 갔다가 세면대에 내팽겨진 북어를 보고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의 제례실에서는 이용자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간단히 제를 지낼 수 있는데, 아마 제를 지내고 그렇게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냄새 나는 북어를 도로 싸서 가져가기 싫다고 그런 식으로 버리다니 기가 찼다.


  어버이날이나 연휴 같은 때는 가족 단위의 이용객들이 몰려서 좀 혼잡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사람들의 행태도 눈에 띄었다. 애들이 봉안실에서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도 주의를 주거나 제지하는 법이 없었다. 예의범절이라는 건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럴 때는 한참을 밖에서 좀 걷다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봉안실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사람도 마침 우리 가족과 같은 봉안실로 들어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들어서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슬피 울음을 터뜨렸다. 봉안함이 있는 곳에 얼굴을 묻고서 우는 남자를 보니,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남자가 맘편히 울다가 나오게 밖에서 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동생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한 5분이나 지났을까? 동생이 이제는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좀 있다 가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동생은 일단 추모관 입구로 오라고 했다. 입구 근처 벤치에서 후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추모 방식은 그렇게 간결한 모양이었다.


  사실 봉안실에서는 고인을 추모하며 맘놓고 울거나 말을 편히 하기 어렵다. 평일의 한낮이라면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대개는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언젠가 본 나이든 중년여성은 흰 국화 꽃다발을 들고 봉안함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뒤돌아보고 눈물을 그쳤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자리를 피해서 복도에서 여자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를 모신 봉안함 옆으로는 세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옆자리는 한달쯤 지날 무렵에, 나머지 두 자리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채워졌다. 그 두 자리의 주인들은 한 가족이었다. 봉안함에는 유골함과 함께 위패를 둘 수 있는데, 그 위패들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알게 되었다.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위패에는 남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딸이 한달 좀 지날 무렵에 세상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어머니 옆자리로 왔다. 나이를 헤아려 보니 이십대 초반이었다. 두 달도 안되는 시간에 남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하늘나라의 어머니 옆에서 맘껏 웃고 어리광도 부리면서 행복하게 지내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오빠도 힘을 낼게."


  여동생의 위패에 있는 글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서 써보았다. 그 위패의 글을 쓴 이가 알지못하는 누군가에게 그 글이 그대로 읽히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패를 볼 때마다 깊이 새겨진 슬픔과 쓸쓸함을 가늠해 본다.  

 

  3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 그곳을 찾았어도 우리 가족은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그에게는 아직 살아갈 많은 날이 남아있을 테고, 그는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와 여동생의 부재를 견디어야 한다. 이제는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가을의 길목에 설 때면,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덜 슬프고, 덜 외로웠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여동생을 따뜻하게 추억할 수 있기를, 언젠가 웃는 얼굴로 하늘나라에서 그들을 만날 때까지 힘을 내어 살아주길 기도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