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방탄소년단) 멤버가 어떤 영상에서 먹고 있었던 빨간색 음식에 대한 서양 팬들의 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그 음식의 간편식 해외 수출이 꽤 많이 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 빨간색 음식은 '떡볶이'였다. 아, 떡볶이... 마음으로는 먹고 싶으나, 현실적으로는 먹지 못한지가 여러해가 다 되어간다. 예전부터 매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수록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속이 불편해졌고, 그렇게 나는 빨간색 음식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사실 매운 맛이 식탁을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김치도 내게는 기피음식일 뿐이다. 고추장이 양념의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즉석 조리식품에서도 매운 맛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라면도 고춧가루 때문에 먹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우동 라면이 있었다. 그것도 어쩌다 먹는데, 어느날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약간의 매운 맛이 느껴졌다. 궁금해서 제품 포장지의 뒷면을 보니 스프 내용물에 '고춧가루'가 적혀 있었다. 더이상 그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맑은 국물의 탕류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분명히 맑은 색의 국물인데,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난다.


  프라이드 치킨에서도 매운 맛은 빠지지 않는다. 그냥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는데, 튀김옷에 매운 맛을 가미했는지 입안에서부터 얼얼한 느낌이 전해진다. 역시 먹고나서 속이 쓰려온다. 고로케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김치 고로케를 먹었을 때이다. 동생이 사 온 고로케 가운데 하나를 무심히 먹었다가 그날 내내 그 매운 맛 때문에 고생을 했다.


  전에는 특수한 양념의 식재료로 취급되었던 청양 고추를 요새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기본으로 넣는다. 그런 매운 맛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있다면, 아마도 어린이를 위한 음식 조리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이를 위한 요리에는 매운 맛 대신에 단 맛이 들어간다. 어른들 음식이라고 해서 단 맛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은 갈수록 달달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잡채밥 간편식이 나왔길래 사서 먹어보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단 맛이였다. 잡채가 아니라 물엿으로 범벅을 해놓은 당면 볶음 같았다. 그 잡채밥의 양념 간장에는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더 맵고 칼칼한 맛을 찾으러 다니면서, 그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강의 단 맛에도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김장을 할 때,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덜 매운 고춧가루를 구할 수 있는가, 였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맵지 않은 순한 맛의 고춧가루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춧가루는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고춧가루가 아주 매운 맛의 고춧가루여서, 맵지 않은 고추를 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아줌마의 전화 통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춧가루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샀는데, 하나도 맵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소리였다. 아, 그 고춧가루를 우리 어머니가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언제 고추가 들어왔는지 대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래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2010년, 한국 식품연구원과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공동 연구에서 새롭게 공개된 고문헌을 살펴본 결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15세기 이전에 고추장을 이용한 음식이 있었고, 그러한 발효 음식은 고추 전래 시기가 훨씬 이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고춧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이전까지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가 소금이 귀한 시기에 방부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 일반 대중의 식탁에 김치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은 이제는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소울 푸드(Soul Food)' 의 위치까지 차지했다.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뭔가 매운 것을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그 매운 맛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매운 맛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것이다. 언젠가 내가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매운 음식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여러 댓글이 달려서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회식 자리도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좋아하는 시뻘건 국물을 회식 자리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라는 글을 읽고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 기능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매운 음식 보다는 담백한 것을 찾게 되는 듯하다. 식품 회사들이나 요리 연구가들이 매운 맛 위주의 음식 보다는 좀 더 다양한 한국적인 맛을 찾아서 새로운 조리법과 간편식을 개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매운 맛의 나라에는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맛'의 정의가 어떻게 하면 더 매울 수 있는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온 장류와 발효식품을 사용해서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잦은 비 때문에 고추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고춧가루 값이 예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한다. 배추 농사도 좋은 작황을 기대할 수 없어서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하는 이들도 많다. 깍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 농사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매운 맛을 감수하고서라도 겨울 깍두기의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맛은 놓칠 수가 없다. 맵지 않은 고춧가루만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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