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게 되니, 옷장의 가을옷들에 생각이 미친다. 그래, 바람막이를 꺼내야지.
여러벌의 바람막이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옷은 노스페이스의 바람막이인데, 소위 '13바막'이라고 하는 옷이다. 노스페이스의 13번째 바람막이 디자인이라는 말도 있던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 옷이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2000년대 초중반에 강남 중고등학생의 교복으로 상당한 유행을 탔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 유형의 옷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나는 왜 애들이 등산복 외투를 저렇게나 입고 다니나 궁금하기는 했었다.
그러다 몇년 전쯤에 노스페이스의 13바막의 재고정리 행사에서 이 옷을 사게 되었다. 정말로 마지막 판매였던 것 같다. 이 옷은 그 이후로 온/오프 매장에서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다. 입어보니 정말 편하고 좋았다. 왜 그렇게들 13바막을 찾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좋은 원단, 도무지 흠을 찾을 수 없는 옷이었다. 원단은 Supplex라는 나일론 원단에 듀폰사의 Teflon가공이 들어간 것인데, 내구성이 정말 좋고 약간의 발수기능도 있다. 노스페이스는 이제는 이 원단 대신에 Ventrix라고 자체 개발 원단을 쓰는데, 그 원단으로 만든 바람막이가 내게는 13바막에 못미치는 느낌이다.
이 13바막은 바람막이 수집에 대한 뭔가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바람막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대개는 등산용 전문 브랜드의 옷들이었다. 나는 등산은 하지도 않고, 매일 나가는 산책을 운동의 전부로 여기는데도 그랬다. 등산 전문 카페에 가입해서 온갖 등산복 브랜드에 대한 품평이며, 원단에 대한 각종 글들을 읽었다. 나중에는 계절에 따른 등산복 레이어링에 대해 줄줄 말하게 될 정도였다.
2000년대는 등산복 브랜드의 전성기였다. 오죽하면 해외여행에서 등산복 입은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러던 것이 여가를 보내는 사람들의 추세가 캠핑이나 다른 분야로 바뀌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등산복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시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해당 브랜드의 최종적인 재고정리 행사가 시작되면 등산 관련 카페에서는 브랜드 명이 앞에 붙은 '***대란'이 일어나고, 엄청난 할인율에 이끌린 사람들은 등산복들을 꽤 많이 사들였다. 적게는 몇 벌, 많게는 수십 벌을 사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대란이 끝나고 나면 중고 장터에는 상표도 떼지 않은 새옷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쪽 사람들은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누구나 옷장 안에 한번도 안입은 새 등산복 한두벌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나는 오로지 바람막이만에만 관심이 있어서 사두었는데, 몇년 동안 그렇게 산 것들이 8벌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우중 산행을 위한 방수 재킷도 4벌이나 있었다. 사실 그 재킷들은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비 오는 날에는 산책을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들인 바람막이들을 늘어놓고 진지하게 반성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더이상의 바람막이는 필요하지 않고, 앞으로 그것을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을 스쳤던 질문은 그런 것이었다. 왜 나는 바람막이를 그토록 좋아했던 것일까?
완벽한 방풍, 방수가 가능한 바람막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하더라도 혹한의 칼바람은 옷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게 되어있으며, 폭우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방수성능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아주 좋은 옷 한벌로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바람막이를 찾아 헤매었던 몇년간의 내 여정은 결국 끝이 났다. 어쩌면 나는 '진짜 자연' 속에서 입을 수 있는 바람막이가 아니라, 뜻대로 풀리지 않고 힘들고 괴로웠던 시기를 견딜 수 있는 '인생' 바람막이 같은 그 무언가를 찾아다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옷장에서 바람막이를 찾아 꺼내두었다.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람막이는 노스페이스 13바막이다. 적당히 바람을 막아주고, 가벼운 빗물도 튕겨내는 발수기능이 있는 이 옷으로 족하다. 이제 더이상 바람막이는 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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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노스페이스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내 돈 주고 내가 사입은 바람막이에 대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