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 신문 2006.5.8.월]


관계론의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



모든 철학은 항상 해석들 속에서만, 그 철학에 대한 수용과 저항, 비판과 전유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해석되고 전유되어 왔는가에 대한 검토 없이 어떤 철학을 읽고 평가한면, 무의미한 되풀이나 공허한 자기 주장에 그치기 십상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을 일고 해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배적인 수용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범신론의 애매성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심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윤리학』은「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방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 마트롱 또는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역량론적 해석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윤리학』1부 정리11, 정리16) 내재적인 원인, 자기 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7 및 정리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Deleuze, Spinoza et la probleme de l'expression, 1969, p.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의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관계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이러한 해석들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뜬금없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18, 정리25, 정리28, 2부 정리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인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affici)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afficere)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매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하지만『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 이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3부 정의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스피노자가 "도의심"(pietas)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시빌리테(civilite)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적인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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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서 제공하는 중국 관련 소식란. 꾸준히 업데이트되는 중국 곤련 기사 외에도, 중국 관영 <신화통신>(Xinhua News Agency),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와 같은 중국 언론들이 링크되어 있어 편리하다.

 

http://www.guardian.co.uk/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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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창간 2006년 4월 26일
 
2006년 12월 20일 (수)
제 34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편집인 : 박석진
TEL 02-365-5363 | FAX 02-365-5364 | 천.참 ID rights | humanrights@sarangbang.or.kr | http://sarangb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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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와노동
2006.12.18 |337호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함께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주저앉을 것인가?


[…]점차 심화하는 배제와 불평등,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관리와 통제의 강화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서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는 없다. 또한 이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바로 우리 사회 자체의 민주주의의 조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와 민족국가 간의 체계가 제한적으로 보증했던 민주주의의 전망이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는 보다 급진적인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로 회귀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다.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근본적으로 저항하고 민족국가와 이들의 국제적 체계가 독점하고 있는 국가, 국적, 인종을 가로지르는 경계들, 법적이고 정치적 경계들을 해체해야 한다. 이주노동자 운동의 근본적 목표는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민족적인 자격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방하는 것, 체류, 출국 등 국경을 둘러싼 국가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경찰기구들을 해체하고 이에 대한 민중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국가가 내적으로 포섭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실패한 계급간 불평등과 적대를 근본적으로 전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사회운동의 목표이다.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아 한국의 사회운동은 단지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결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특히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운동 워크샵 “세계전쟁의 역사, 이론과 평화운동”


전쟁의 역사와 기원 및 이론을 고찰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역사적 흐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전망과 과제를 모색하는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일시: 2006년 12월 28일 오후 7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발제: 이태훈, 이현(과천연구실)

[자세히보기]



한반도평화주간 토론회 "미국, 북핵, 그리고 한반도평화" 자료집

[목차]
■ 미중간선거이후의 한미FTA - 이해영(민교협)
■ 이라크 파병에 대한 평가와 한국의 과제 - 이준규(평화네트워크)
■ 호혜평등한 한미관계 수립을 위한 과제 - 유영재(평통사)
■ 북한 핵의 국제정치적 의미 - 장혜경(노동자의힘)
■ 북핵실험 이후 6자회담 전망과 한국 시민사회 대응 - 박정은(참여연대)
■ 한반도 핵위기의 성격과 전망 - 임필수(사회진보연대)
■ 냉전 해체 이후의 동북아 질서와 북한 핵문제 - 김하영(다함께)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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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2006년 한국사회 인권 현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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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준
 
 
 
2006년이 저물고 있다. 출범 이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을 지속한 노무현 정부는 올해 벽두부터 한미동맹 강화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평택전쟁기지 확대를 카드로 꺼냈고 1년 내내 밀어붙였다. 돌아보면, 올해 한국사회 인권의 현주소는 그 어느 해보다 강화된 미국의 규정력을 제쳐두고 이야기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미동맹에 짓밟힌 인권

1월 19일 한미정부는 워싱턴에서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주한미군의 활동범위와 역할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붙박이군’에서 동북아, 서남아시아까지 선제공격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 확대됐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는 평택미군기지의 확장을 목표로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아내기 시작했다. 국방부는 3월 6일과 15일, 4월 7일에 걸쳐 대추분교 인도와 농수로 차단을 명목으로 경찰을 앞세운 행정대집행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의도적으로 주민들이 아닌 사회단체 회원들만 골라 연행하면서 ‘외부 불순세력 개입론’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다. 이어 5월 4일에는 대추분교에 대해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곧바로 국방부는 미군기지 이전예정지 285만평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철조망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농사를 지어오던 주민들은 자신의 농지에 출입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마을 진입로에 검문소를 설치해 이른바 ‘외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다. 정부는 협상은커녕 주민들에 대한 고사작전을 지속하고 있고, 김지태 대추리 이장은 실형 2년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방 안에 있다.

사진설명지난 5월 5일 평택에 투입된 군병력<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평택전쟁기지 확장이 한미군사동맹의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은 한미경제동맹의 강화를 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1월 19일 신년연설을 통해 뜬금없이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언급했고 2월 3일 한미 양국은 협상 개시를 전격 선언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협상 과정을 볼 때 한미 FTA는 미국이 지금까지 맺은 FTA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체결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의 파괴, 교육·의료 등 공공서비스 개방을 통한 시장화 등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도 제외되지 않는’ 것이다. 한미 FTA는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경제자유구역, 기업도시, 제주특별자치도 등의 연장선 상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을 향해 치닫고 있다.
 
 


비정규직 확산, 노동조합 무력화의 제도화

비정규직은 정권 출범 초기인 2003년 784만 명에서 올해 845만 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55퍼센트에 달하고 있다. 2004년 정부가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내놓은 기간제법 제정안, 파견법 개정안 등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안이 2년여만인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통과된 법안은 기간제 사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기간제 사용을 일반화해 상시고용을 원칙으로 하는 노동법의 기본정신을 훼손했다. 또 법안은 2년을 초과하는 기간제 사용을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으로 간주하지만 역으로 이는 2년 주기의 대량해고 사태를 만들 것이다. 중간착취를 합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현행 파견법은 폐지되기는커녕 파견대상 업무에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하여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가 추가되어 노동부가 자의적으로 파견대상업무를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파견노동 2년 초과 시 ‘고용의제’하는 현행법이 위반 시 과태료 부담만 주는 ‘고용의무’로 개악되었다.


비정규직 노동법이 비정규직 확산을 통해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노사관계로드맵’이다. 출범초기 ‘노사관계제도선진화연구위원회’에서 이른바 ‘노사관계로드맵’을 구상한 정부는 올해 9월 민주노총은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과의 ‘합의’를 통해 전격적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 8일 국회 환경노동위 문턱을 넘어 본회의 통과가 임박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은 △부당해고 시 사용자 형사처벌 조항을 삭제해 사용자의 ‘해고의 자유’가 대폭 확장됐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는 폐지되지만 파업 시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어 파업권의 무력화는 여전하며 △복수노조 허용 문제는 또다시 3년 유예됐다.
 
 


노무현과 민중 사이에는 경찰만 있다

정권이 명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와 평택전쟁기지 확대는 필연적으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대화와 타협’,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올해는 대화도 타협도 상식도 없었다. 오직 경찰의 물리력으로 민중들의 저항을 봉쇄하는 것만이 정부의 유일한 대응이었다.

사진설명하중근 씨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지난해 11월 여의도 농민대회에서 전용철·홍덕표 농민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물러났지만 올해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경찰폭력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7월 13일 포항건설노조가 불법대체인력 투입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경찰은 2만5천명의 병력을 투입해 음식물 반입을 통제하고 단전·단수조치를 취한 데 이어 16일 열린 평화집회를 사전 경고 없이 침탈해 하중근 조합원을 사망하게 했다. 또 경찰은 2003년 개악된 집시법을 활용하여 집회신고를 자의적으로 금지했으며 8월 16일에는 서울에서 평화적으로 행진하던 상경투쟁단 1천여 명을 전원연행했다. 9월 22일 한미 FTA 4차협상이 제주도에서 시작되자 경찰은 현지 반FTA 집회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통고를 단행했다.


이처럼 한미 FTA, 평택전쟁기지건설,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 등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이 경찰을 앞세운 정권의 탄압에 의해 각개격파될 위기에 처하자 운동진영은 11월 22일과 29일, 12월 6일 민중총궐기 집회를 공동으로 열어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진행했다. 이어 몇몇 지역의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같은 달 24일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담은 담화를 발표했고 경찰은 같은 날 9개 사회단체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170여 명을 소환했다. 이어 경찰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예정된 2차 집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경찰차벽으로 광장을 에워싸고 전국 1252곳에 경찰 1만3555명을 배치해 상경차량을 차단해 원천봉쇄했다. 또 농민회 간부들을 경찰버스나 농민회 사무실에 감금해 집회 참여를 막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부는 올해 1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평화적 집회시위문화정착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평화시위 정착 캠페인 △평화시위를 위한 사회적 협약체결 △시위주동자 형벌 상향조정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민사상 배상청구 실시 등 회유와 협박을 통해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책을 쏟아냈다. 이 위원회는 사회적 합의기구의 외양을 띠었지만 그 운영은 경찰청이 주도했으며 발표 내용 또한 경찰의 오랜 숙원사업을 성취해 주는 것이었다. 경찰은 1차 민중총궐기 집회를 앞둔 11월 7일 ‘도심집회금지’를 공식선언하면서 “시민들의 불편과 교통체증 때문에 집회시위의 자유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쟁점화시키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했다. 이처럼 정부는 집회의 결과적 외양을 ‘평화시위’와 ‘폭력시위’로 나눔으로써 자신의 입맛에 맞거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집회는 용인·장려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강력한 처벌을 통해 배제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사진설명경찰의 원천봉쇄에 항의하며 11월 30일 한미FTA저지범국본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차별과 편견을 넘어 한걸음 내딛은 소수자들

한편, 올해 주목할 만한 또다른 인권상황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경남 함안의 한 중증장애인이 방 안에서 보일러가 터졌는데도 움직일 수 없어 얼어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촉발된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요구는 서울·대구·인천·충북·울산·경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장애인들은 노숙농성·단식농성·집단삭발과 함께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는 투쟁까지 벌인 끝에 결국 지자체로부터 활동보조인을 장애인의 권리로 인정받았고 조례를 통한 제도화와 예산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어 대정부 투쟁을 통해 장애유형이나 연령,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당사자의 필요에 따른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고, 현재 자부담폐지와 생활시간 보장을 위한 예산확충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제정된 지 30년이 지난 특수교육진흥법을 대체할 장애인교육지원법이 지난 5월 국회의원 229명 공동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장애인시설 등 사회복지법인의 이사회에 공익이사제를 도입하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도 발의되었지만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회복지시설장들의 강력한 반대와 맞설 참이다.


학교는 체벌, 두발규제 등 각종 용의복장규정에 따른 일상적 검열과 단속, 소지품검사와 야간강제학습 등 교육이라는 이름의 강압과 폭력이 여전하다. 올해 초 최순영 의원(민주노동당)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안’(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안)은 정기 인권실태조사, 인권교육 실시 등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교육당국의 책임을 명시했지만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올해 학생들은 두발자유, 학생인권법 통과를 요구하며 5월 청소년인권행동의날, 6월 거리행진, 8월 전국행진을 진행하며 청소년 당사자의 힘을 결집했다.


한편, 올해는 그동안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던 HIV/AIDS 감염인들이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한해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감염인들과 인권단체들이 연대한 ‘HIV/AIDS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 예방법 대응 공동행동’은 에이즈예방법 개정안을 통해 △피검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검사 금지 △익명검사가 가능함을 사전고지 △역학조사를 통한 실명파악 △신고보고 체계를 요구했다. 이들은 증언대회·거리캠페인을 통해 감염인을 죽이는 것은 에이즈가 아니라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차별임을 강조했다.


성소수자들, 특히 성전환자들의 성별변경 문제도 중요하게 제기됐다. 대법원은 6월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린 데 이어 9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마련했지만 △성전환수술을 받은 경우 △만20세 이상인 경우 △혼인한 사실이 없는 경우 △자녀가 없는 경우 등으로 제한해 성전환자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4월 발족한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 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는 특별법을 통해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성전환자의 생애에서 차별과 빈곤, 사회적 배제의 실태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보고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제논리에 가로막힌 차별금지법

일부 소수자운동의 약진과 제도개선안 마련에도 불구하고 차별 현실을 총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은 재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7월 △시정명령 △이행강제금 △악의적 차별에 대한 특별배상금 △증명책임 전환제도 등을 골자로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하지만 재계가 특수고용·파견·사내하청 등 직접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는 노동자도 ‘근로자’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 기업부담을 가중시키고 경영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며 반대한 이래 법제정 흐름 자체가 없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운동진영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장애인차별금지법도 재계와 보수언론의 반발에 직면했다. 최근 당정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나 열린우리당의 분열과 정계개편 움직임, 내년 대선까지의 정치일정으로 볼 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악법과 함께 정쟁으로 잠자는 국회

여야의 정쟁으로 국회가 연이어 파행을 맞는 가운데 반인권·반민주악법은 건재한 반면 인권옹호 입법 실적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2005년 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국가보안법은 개폐 논의조차 중단되었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면서 최근 이른바 ‘일심회 사건’ 등과 같은 공안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사형은 1997년 이후 집행되지 않았지만 사형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살인, 고문과 이를 은폐·방해하는 행위 등 반인권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입법도 국회 안에서 잠자고 있다. 시민의 재판참여를 보장하는 국민참여 배심제와 조서재판을 지양하는 공판중심제 등 사법의 민주적 통제에 한손을 보탤 이른바 ‘사법개혁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1월 유엔자유권위원회가 한국정부 보고서를 심의한 후 채택한 최종견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규약위반이라고 밝혔음에도 병역거부자는 여전히 형사처벌 되고 있고 병역법 개정안도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라면 개혁국회를 자임한 17대 국회는 사회보호법 폐지 이후 별다른 악법 개폐나 인권옹호 입법 없이 마무리될 전망이다.


올해 우리 사회 인권의 시계 바늘은 거꾸로 가고 있다. 2003년 대통령이 된 ‘인권변호사’에게 집권 말기인 2006년은 ‘반인권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자본의 이권을 보장하기 위해 인권 대신 자유무역협정을 선택한 대통령은 저항하는 민중들을 위협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온 자유권 부문의 일부 진전까지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돌아보면 그 동안의 일부 진전도 군사독재와 자신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였을 뿐이었다. 남루해진 인권현실을 안고 2007년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을 다시 준비한다. 민중들은 싸움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권을 쟁취해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인권오름 제 33 호 [입력] 2006년 12월 13일 17: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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