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성환자는 ‘사람책’ 자궁수난사 읽혀요”

 

자궁은 편견과 냉담으로 질병 쌓인 오래된 폴더
월경은 생명의 경전, 다이제스트 현대사
첫 방문에 병력·몸상태 진단 진료카드 2/3 채워져
어혈로 맺힌 환부 고치려면 ‘애무’가 약입니다
 
 
한겨레 임종업 기자
 
 
» “소개팅 들어오도록 기사 잘 써 줘요.” ‘여성엔지오 지정 한의원 원장’답게 시억시억지만 이유명호씨는 마포 복사골 태양이 먼저 닿는 곳에 병원을 차리고, 한때 아버지가 횡성에 꾸렸던 약초밭을 기려 치료실 이름으로 삼을 만큼 무척 섬세한 마음결의 소유자다. 하여, 월경과 자궁에서 여성의 수난사를 읽어내고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는데 제격일 터이다.
 
한국의 책쟁이들/(16) 자궁에 햇볕정책 펴는 한의사 이유명호씨
 

자기의 이름을 건 한의원 원장 이유명호(53)씨는 넉자 이름이다. 대놓고 나 페미니스트요, 또는 남녀평등주의자요 나팔부는 격이다. 얼마 전까지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 전화를 걸면 이유명호 한의원으로 연결되었다.

“여자는 신한테서 생명 창조를 위임받은 존재예요. 자신의 반쪽 씨에 남자의 반쪽 씨를 보태어 열달간 자신의 피로써 완전한 생명으로 길러내지요. 그렇게 자궁은 소중하기 때문에 보물처럼 깊숙히 들어 있어요. ‘똥 마려워’는 되는데 ‘자궁 아파’는 왜 안되냐구요. 자궁에는 햇볕정책이 필요해요.”

마포의 한 오피스텔 2층. 복사골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직격으로 받는 곳. 환자들은 ‘약초밭’ ‘풀밭’ 치료실에 누워 치료를 받는다. 손님들은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다. 전공이라고는 없는 한의계에서 88년 문을 연 이래 여성질환, 그 가운데서도 자궁질환을 전문으로 해온 것을 오래된 관심과 연구의 결과다. 새우젖 동네 마포 토박이인 그는 열살 때 엄마를 따라 전차를 타고 시내의 일본집 같은 의원을 따라간 적이 있다. 돌아와서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엄마를 귀찮게 하지 말라던 외할머니가 선하다. 그 자신 연애·결혼생활 10년동안 자연유산 한번, 인공유산 두번, 출산을 두번 했다.

그는 한가지 경험담을 털어놨다. “환자들의 질염이 자꾸 재발돼서 남자인 친구 의사한테 묘수가 없는지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뒷물이나 잘 하라고 그래, 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뒷물 안하는 여자가 어딨는가. 너무 깨끗하게 씻으려고 해서 탈이지. 오줌과 정액이 한 통로로 쓰는 음경과 달리 질은 요도와 엄연히 분리되어 있고 자연살균 처리돼 균형이 깨지지 않으면 감염될 우려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모욕적인 처방(?)을 내리는 것은 그 의사가 한번도 월경이나 임신을 해보지 않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아니, 의학 자체가 남성들이 권력을 틀어쥔 남성과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약품의 표준모델은 남성이다. 개발할 때부터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하고 임상실험 대상도 남성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은 아예 고려대상에 들어있지 않다.

 

호주제 폐지, 자궁질환 치료와 같아

“월경은 불결하다. 질은 더럽다 등 여성의 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물론 겨드랑이·다리털을 깎아라, 살 빼라, 무릎을 오므려라 등 여성한테 이상한 요구를 하는 것은 이 사회가 남성권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가슴이 크면 머리가 비었다거나 미련해 보인다고 하고 유방이 작으면 낑깡이니 달걀프라이니 하고 놀리죠. 남자 물건이 번데기건 줄줄이 소세지건 그것을 두고 놀림거리로 삼지는 않잖아요.”




그는 1997년 부모성 함께쓰기운동에 동참해 넉자이름을 쓰게 됐다. 이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서 주방장을 맡아 서명 다닐 때 김밥과 차를 조달했다. 국회 앞 일인시위도 하고 남들이 일인시위할 때는 “커피배달을 했다.” 안티호주제, 안티미스코리아, 안티포르노, 안티성폭력 등 행사의 연극공연에 거의 최고령자로 자꾸 나가 “그만 나오라는 뜻의” 대상을 받았다. 2003 대한민국 여성축제 기획에 참여해서 매년 개천절 즈음에 양성평등한 후천개벽을 꿈꾼다. 감투 사양하고 한국여성장애인 연합, 이주여성인권쎈터,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을 뒤에서 돕고 있으며 해외의료봉사단, 성폭력상담소, 막달레나의 집, 월드비전 등에 조금씩 후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몸을 살리는 다이어트 자습서 <살에게 말을 걸어봐>(2000), 여성이 행복해지는 건강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2003)을 썼고 내년에는 <우리 아이들 뇌힘을 키우는 돈안드는 총명한 건강법>을 낼 계획이다.

그가 이처럼 호주제 폐지 운동에 팔걷어부치고 나섰던 것과 자궁질환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소중한 후세를 재창조하지만 ‘아이 낳는 기계’로, 위대한 밥상을 차려내지만 ‘부엌데기’로 대우 받아온 오천년 여성수탈사가 자궁에 집적된 까닭이다. 자궁에는 각종 사회적 편견과 냉담한 시선으로 외면 받아온 질병이 쌓인 일종의 오래된 폴더다. 햇볕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이렇듯 깊은 사연이 들어있다.

“자궁질환을 진단받으면 자신부터 용서하세요. 주위 사람들이 다 밉고 수술하라는 의사한테도 왜 못 고치냐고 화를 냅니다. 화풀이 대상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남탓만 하지 마세요. 내탓도 심히는 하지 마세요.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어떠했는가부터 시작하세요. 자신부터 용서해주세요. 그래야 돌보기와 보살펴주기라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안내문의 한 구절이다.

여성환자들은 이곳에서 꽁꽁 여몄던 아픔과 부끄러움의 주머니를 연다. 그렇게 공감대를 이루고 나면 모두들 너남없이 친정식구처럼 변한다. 약해 뵈는 의사를 걱정하고 식혜나 김치를 담가 서로 나눠먹는다. 이 한의원은 여성해방구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리를 일컫는 월경(月經)은 성경, 불경, 역경처럼 최고의 가치를 지닌 생명의 경전이란 뜻입니다. 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피로 영원히 어어지는 몸으로 쓰는 경전이지요.” 우리 할머니들은 월경통이 적었다. 다리를 벌리고 아궁이 불을 때며 자궁을 데웠고 엄마 세대들은 뜨끈한 온돌에서 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아래 옷은 구중궁궐처럼 단속곳, 속곳, 속치마 겹겹이 아래를 덮어서 따뜻한 공기층에 둘러싸여 냉병에 걸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지금처럼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바람이 숭숭 통하게 된 지는 불과 40년밖에 안 되었다. 저고리는 짧고 젖가슴은 보여도 괜찮은 상체개방형에서 손바닥만한 팬티에 짧은 치마의 하체개방형 패션으로 뒤집힌 것이다.

 

종이책 반 사람책 반…왕성한 독서

허걱, 월경이 책이라니. 거기에 다이제스트판 현대사가 들어있다니!

“옛날 농경시대에는 아기를 여럿 낳아 키우니 자궁과 난소가 호르몬의 영향을 덜 받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유제품과 지방식 등으로 여성호르몬이 과잉분비되고 호르몬 함유식품의 섭취가 늘었고요, 아기는 조금 낳는 추세죠. 그탓에 난소와 자궁는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하니 무리가 오고 병이 생기는 거죠.”

35년 동안 월경을 하는 사이에 나이 든 몸은 매달 빠져나간 혈액손실을 보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완경(생명창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의미. 폐경을 대체한 용어)은 더 이상 피 흘리지 말고 고생한 몸을 돌보며 쉬라는 조물주의 섭리다. 진화학자들은 완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이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배란과 월경을 함으로써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낳아 버려두기보다 자손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종족보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데 진화한 것이라고.

이 원장의 왕성한 책읽기는 호가 났다. 재밌는 책을 위주로 근처 책방에서 주문해 읽는다. “결혼 때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읽었고, 독립한 뒤에는 연애질이 안 돼서” 책을 읽는다. 누워서 읽을 수 있도록 천장에 불고기집 연통처럼 책 잡아주는 게 달렸으면 원이 없겠다는 그한테 한 안과의사는 그러다간 눈알 빠진다고 말했다.

여느 책쟁이와 다른 점은 그가 읽는 책이 종이책 반, 사람책 반이라는 점이다.

사람책은 곧 여성환자. 환부는 물론 몸의 전반적인 상태와 그 동안의 병력 등을 읽어내 첫 방문에 진료카드 2/3가 채워진다. 양방병원에 가면 적어도 다섯 군데를 돌아다녀야 할 만큼 악순환의 고리에 꿰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고리를 끊으려면 단순히 환부를 치료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때로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고 아이와 함께면 더 좋은 때도 있다. 심지어 모녀관계에서조차 못 풀어 어혈로 맺힌 사연이 들어있다. 사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사람책을 넘기다 보면 여성수난사가 짚이고 현대사가 읽히고 진화사가 눈에 들어온다. 여성엔지오 관련자들은 그를 주치의로 여길 정도다.

 

애무로 세포 공명하면 스스로 고쳐

그래서일 터다. “어루만져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애무전도사로 나선 까닭은.

“애무는 우리 몸에 내장된 치료 프로그램입니다. 사랑을 주고받아 태어났으니 당연하지요. 애무는 손으로 먹여주는 밥이고 손으로 입혀주는 옷입니다. 아픈 곳에 손을 대주고 싹싹 비벼주기만 해도 고통은 사그라져요. 자기를 애무하고 서로를 애무하십시오. 그러면 머리끝에서 말끝까지 온몸이 세포 하나하나에 속속들이 공명의 파동이 퍼져나가 몸은 스스로 치유를 시작합니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7-01-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궁이 "사람책"이자 현대여성의 수난사를 보여준다는 이유명호 씨의 해석/설명은 참신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그의 얘기를 좀더 들어보고 싶다.
 

‘아리랑’ 애초에 민족영화는 아니었다

일제시기 발굴필름 12편 중 8편 몽땅 ‘친일영화’였지만
조선 관객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를 투영해 수용
‘아리랑’도 상영 거듭되면서 관객 열망 통해 민족영화로

한겨레 한승동 기자
»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김려실 지음. 삼인 펴냄. 1만8000원
1919년 10월27일 국산 연쇄극(활동사진을 신파극 상연 도중에 영사하는 혼성적인 극 양식) <의리적 구투>가 단성사에서 상영돼 대성공을 거둔 이래 일제가 패전한 1945년까지 ‘조선영화’는 모두 약 180편이 제작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식민지, 해방기 혼란, 한국전쟁과 개발독재 등을 거치면서 대다수 필름들이 사라져 한국영화사 복원은 추측과 주변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본이 없기에 어떤 추측과 주장도 입증 불가능한 명제가 된다.
 

1998년에 러시아 필름보존기관인 고스필모폰드에서 1937년에 제작된 조선영화 <심청>의 일부, 1938년에 제작된 <어화>의 일부가 발견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와 함께 일제 말기의 전쟁선전영화 <망루의 결사대>, <젊은 모습>, <사랑과 맹세>의 프린트도 확보했다. 2004년에는 중국전영자료관에서 <어화>의 완전판과 <군용열차>, <지원병>, <집없는 천사>와 기록연화 <조선>의 필름들을 수집했으며, 2006년에는 현존하는 필름중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 <미몽>과 <반도의 봄>, <조선해협>도 추가로 발굴했다. 이들 12편 가운데 <미몽>, <심청>, <어화>, <조선> 4편을 빼고나면 몽땅 ‘친일영화’다.

 

항일-친일 이항대립적 분석 무의미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삼인 펴냄)의 저자 김려실은 이들 발굴자료를 실제로 보고 낙담했다. 발굴 전까지 일제 치하 조선인들의 고통을 영상으로 고발했다고 평가받았던 영화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리얼리즘영화니 계몽영화로 평가해온 기존 한국영화사의 수탈-저항, 항일영화-친일영화, 민족적 전통-종속적 모방, 리얼리즘영화-신파 멜로드라마 식의 이항대립적 민족주의적 분석 패러다임 자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항일영화=민족영화=리얼리즘영화 도식은 허구였고 친일 리얼리즘 또는 친일 유사리얼리즘 영화들이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책은 발굴필름 12편중 <심청>과 <조선>을 뺀 10편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덧붙여 <수업료>, <그대와 나>, <복지만리> 등의 원작과 시나리오, 시놉시스, 개요 등을 수집해 내용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한국에 영화가 도래한 시기를 1897년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의미를 따진다. 하지만 저자의 노력이 집중되는 쪽은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은막에 무엇을 ‘투사’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조선의 관객들이 스크린에 투사된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식민통치 내내 조선영화를 검열하고 통제했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영화의 생산, 배급, 관람까지도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지만 결코 관객들의 감수성과 상상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조선인 관객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비애를 스크린에 ‘투영’하여 영화를 수용했고, 따라서 국책영화의 의도는 늘 조금씩 빗나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가 책 제목이 된 연유다.

 

» <무정> 촬영 현장. 일제시기 1939년에 나온 이 영화는 이광수의 원작을 아예 기생 월향(영채)을 중심에 놓고 뜯어 고쳐 당시 조선의 팔리는 민속상품격이었던 기생의 생활과 예능을 볼거리로 삼았다. 민간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무정>의 필름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나 시나리오를 참고해 원작이 어떻게 재구성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삼인 제공
일제시대 당시에도 조선영화시장을 장악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리며 한국 무성영화 전성기를 열었고, 한국영화사 전체를 통털어서도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나운규 감독·각본·주연의 <아리랑>(1926)이 그 전형이다. 1997년에 낸 나운규 전기 <나운규>에서 조희문은 신문기사와 광고, 상영프로그램 등 새로운 문헌들을 제시하며 일본자본으로 만든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즈일 가능성,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니며 ‘애국지사 나운규’는 만들어진 신화일 가능성을 제기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제기의 타당성 여부는 <아리랑>을 보기만 하면 확연히 드러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과 시나리오는 망실되고 없다.

김려실은 <아리랑>이 항일영화냐 친일영화냐가 아니라 어떤 영화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중층적 해석이 가능한 ‘양가적 영화’로 결론짓는다. 영화 <아리랑> 흥행 뒤에 유행한 영화소설 <아리랑>(영화대본을 약간 고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이나 영화관계자들 증언 등을 토대로 <아리랑>이 애초부터 항일영화·민족영화였던 것이 아니라 순회상영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조선관객들의 열망이 투영된 강력한 항일·민족영화로 ‘상상’되고 만들어졌다고 논증한다. 일본인이나 친일파 지주 대 조선인 소작 간의 대결구조가 아닌 지주와 마름, 소작간의 갈등이 주조를 이루는 <아리랑>은 분명히 항일이라는 명시적 기표를 갖고 있진 않지만 그것은 당시 총독부의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 제정 등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의도된 모호’, 얼버무림일 가능성이 크다. 변사가 분위기를 좌우하는 무성영화 특성상 그 모호성이야말로 가끔 임석경관의 눈을 피해 “쫓아가는 사나이는 서울 모전문학교 재학중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쳐났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을 “서울 모전문학교에서 철학공부하다가 3.1운동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된 영진”으로 살짝 바꿔치기함으로써 관객의 ‘민족과 저항’열망에 부응하면서 그것을 더욱 강하게 상상하도록 증폭할 여지를 주었다.

 

영화 속 기생은 ‘식민지 알레고리’




한때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나운규가 나중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다”고 했고 카프의 임화도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그 시대를 휩싸고 있던 시대적 기분이 영롱하게 표현돼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조선의 인상, 풍경, 습속 이상의 것을 맛보는 만족을 얻었다”며 <아리랑>을 최초의 영화다운 영화, 조선영화사상 무성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했다.

‘홍도야 울지 마라’로 통칭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조선의 다수 대중영화가 팔려가는 기생, 연약한 애인이나 오빠·언니, 돈많거나 권력있는 강자 간의 갈등이라는 천편일률에 가까운 구도를 설정한 것이 식민지 지배-피지배, 수탈-저항 관계를 드러내는 알레고리였다는 것, 1930년대 토키영화 도입과 일본자본과의 합작이 친일영화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는 분석 등도 흥미롭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7-01-0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7월에 열렸던 국제학술대회 <일제 식민지 시기 새로읽기>에서 "검열과 문학 생산, 문학 연구"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시카고 대학의 최경희 선생은, 식민지 시기 문학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역사학을 비롯한 학제간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열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드러낸 발언이었다.

김려실의 이 저작은 식민지 시기, 그것도 영화사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저간의 관심을 모은다. 특히 그가 이미 시나리오와 필름이 망실된 <아리랑>에 주목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겸열로 인해 원천적으로 텍스트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검열문학처럼, <아리랑>에 대한 해석 역시 글쓴이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기입되는 동시에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전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대의 사회사와 지성사를 아우르는 역사적/지식사회학적 통찰력도 필요하다. 이 이중의 과제를 풀지 못한 식민지 시기 문학연구는 그 토대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라서, 곧 읽어봐야겠다. 물론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엄밀한 독해가 병행되어야 할 터.
 

싸움에서 이긴 부처가 되시길
한겨레
» <서유기>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진 인도 하누만 석조상. 지금 베이징 수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도의 여러 신- 고대인도 진귀 보물전’에 나왔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이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18)
 

옥황상제와 석가여래에도 굴복 않은 반항아
고난 ‘81난’을 이겨내고 ‘투전승불’이 됐다
황금돼지해 저팔계를 떠올리다 ‘오공’과 인도여행

 

삼장법사가 어디서 주문을 걸었는지 며칠 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난 ‘원숭이’가 아니라 ‘돼지’인데…. 사실은 2007년이 ‘황금돼지해’라고 해서 저팔계를 떠올렸고 그래서 이번엔 <서유기>를 다뤄볼까 고민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저팔계’처럼 무리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탈이 났던 것이다. 아마도 <서유기>를 제대로 읽고 손오공처럼 ‘공’을 깨닫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서유기>를 떠올린 또 다른 이유는 현재 베이징의 수도박물관에서 ‘인도의 여러 신(西天諸神)-고대인도 진귀 보물전’(2006.12.27~2007.2.27)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 봄에 이곳에서 열린 대영박물관 소장품 전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던 터라 더욱 관심이 갔다.

이 박물관은 원래 공묘(孔廟) 안에 있었던 것인데 베이징시가 2001년 공사에 착공해 4년에 걸쳐 완공, 2006년 초 초현대식 건물로 개관한 것이다. 후진타오가 인도를 10년 만에 방문했던 작년은 중국과 인도의 우호의 한 해였다. “2006년 중인(中印) 우호의 해”를 맞아 다채로운 문화교류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그 중 하나로 기획된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열린 인도 문물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인도의 13곳의 박물관에서 B급 이상의 문물 100건(그 중 A급 문물이 65건)이 건너와 전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누만(Hanuman) 석조상이 단연 화제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 속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으로,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져 왔다. 손오공의 형상이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두고 그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이 전시회를 계기로 이 논란이 재연되는 조짐이다.

 

» 공묘에 있다가 2006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연 수도박물관.
손오공은 과연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가 아니면 인도에서 건너온 것인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본토설의 대표자는 루쉰인데 그는 당나라 때 이공좌(李公佐)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수 무지기(無支祁)가 변화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쉰의 주장처럼 손오공이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손오공의 고향이 어디냐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장쑤성 롄윈강(連雲港)시, 푸젠성 순창현, 간쑤성 안시현 등의 주장이 있다. 최근에는 손오공이 태어난 화과산이 바로 산동성 태산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인도에서 기원했다는 외래설의 대표자는 후스인데 그는 일찍이 “이 신통광대한 원숭이는 국산이 아니라 인도의 수입품”이라고 주장했다. <라마야나>의 하누만이 손오공의 가장 오래된 원형이라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가인 천인커도 이 주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베이징대학의 인도학 전문가 지셴린(季羨林)은 “손오공의 인물 형상은 기본적으로 인도의 <라마야나>에서 빌려온 것이고, 또 무지기 전설과 혼합되었다”고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고 있다. 손오공은 차이나도 인디아도 아닌 ‘친디아’산이라는 것이다. 나도 이 분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아마도 손오공은 불교와 함께 하누만의 형상이 중국에 전래되고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중국화되면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한다.

 

손오공 고향은 ‘친디아’

당나라 때의 현장법사(600~664)는 26살 나이에 수도 장안을 떠나 서역과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7년 동안 50개가 넘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657부의 경전을 구해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인도라는 말도 이 현장스님이 번역한 말이다. 작년 10월에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의 저명한 문인, 학자를 비롯한 각계의 인사 40명 정도가 시안을 출발해서 인도를 다녀오는 ‘현장지로(玄奬之路)’라는 이벤트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불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대당서역기>를 가지고 가서 인도 나란타사에 선물로 증정하였다고 한다.




글자 없는 자연의 책 ‘무자진경’
불완전 진리 설파하는 ‘유자진경’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
세 불경의 진리를 담은 ‘서유기’
언제 펼쳐봐도 깨달음의 시집

 

<서유기>는 바로 현장법사가 이 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경험을 변형한 이야기가 기본적 뼈대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서쪽(정확히 말하면 중원의 서남쪽에 있는 서천, 즉 인도)으로 ‘놀러간(遊)’ 이야기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삼장법사(玄奬)와 세 제자인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이 서양이 아니라 인도로 ‘놀러간’ 까닭은? 당연히 불경(佛經)을 구하기 위해서다. 오묘한 진리를 담은 불경을 구하러 인도에 간 것을, 그것도 배낭여행하듯 가볍게 다녀온 것이 아니라 ‘여든 한 가지 난(難)’에 달하는 갖가지 고초를 겪으면서 갔다 온 것을 ‘놀았다’고 한 것은 특히 손오공의 입장에서 그러할 것이다. 천궁에서 난장판을 칠 정도로 겁없이 용감하며 낙관적인 손오공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노는 것일 수 있겠는가. 실제와 달리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등장하는 삼장법사나 탐욕스럽고 편협한 저팔계, 근면 성실하고 순종적인 사오정에게 적어도 그것은 노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손오공이 빠진다면 서유기는 서‘유’기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놀기 좋아하는 ‘유원인’의 이름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그 ‘공(空)’을 깨닫는다는 뜻의 오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혹시 공을 깨닫게 되면 손오공처럼 기민하고 용감하며 낙관적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욕심처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결국에는 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에 불과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기 때문에 손오공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서유기>를 서가에 꽂아놓고 가끔 시집을 펼쳐보듯이 아무 회나 읽어 보다가 그 새삼스런 재미와 깨달음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삼장법사 일행이 인도에 도착하여 아난과 가섭에게 처음 받은 불경이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무자진경(無字眞經)이었으며 그것이 도중에 바람에 날려 산산히 흩어졌다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연 자체가 하나의 불경이라! 천기는 아무리 누설해도 누설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적혀있는 비급을 천신만고 끝에 구했더니 거기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더라는 어느 무협지의 이야기나, ‘글자가 적혀있는 인간의 책(有字人書)’만 읽지 말고 ‘글자가 없는 자연의 책(無字天書)’을 읽으라고 했던 마오쩌둥의 말과 함께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이야기다. 남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아는 이야기를 책을 읽고도 잘 모른다고 아주 가까운 분으로부터 자주 비판을 받고 있기에 더더욱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집착없는 자유를 ‘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이야기다. 무자진경을 잃어버린 일행이 석가여래를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글자가 있는 진경을 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안간 광풍과 뇌성벽력을 만나 경문이 물에 흠뻑 젖는다. 요괴들이 경을 빼앗기 위해 부린 장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을 돌에 널어 말렸는데 그 중에 몇 장이 붙어 떨어지지 않자 삼장은 낙담한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렇게 스승을 달랜다. “무릇 하늘과 땅에는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이 경만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에 붙어서 찢어진 것은 불완전이라고 하는 진리에 호응하는 것으로 인력으로는 어쩌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는 애초부터 자연을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중국인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는 이야기로 손오공의 입을 통해 설파되는 또 하나의 진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유기』에는 모두 세 가지 불경이 나오는데 첫째는 무자진경이고, 둘째는 유자진경(有字眞經)이며, 세번째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모두 고통스런 일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을 가졌기에 손오공은 대범하고 자유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서유기>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사대기서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것들은 뛰어난 한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리링 교수는 “사대기서를 모르면 중국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사대기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신마(神魔)소설의 대표작 <서유기>는 중국의 신의 계보가 드러난 ‘중국의 신통기’라고 할 수 있다. 신의 계보는 크게 도교의 옥황상제 계열과 불교의 석가여래 계열로 나뉜다. 손오공은 그 중간에서 자칭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고 하면서 양쪽에 굴복하지 않는 반항아. 얼마나 그 반항이 대단했으면 옥황상제와 석가여래가 합심해서 그를 잡아 갖가지 고난(81난)을 겪게 하였겠는가. 결국 불교에 귀의했고 불경을 구해오는 과정에 큰 공의 세워 부처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부처의 이름이 재미있다. 투전승불. 싸움에서 이긴 부처라는 말이다. 각자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7-01-05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오공의 고향이 '친디아'라니...ㅎㅎ 역시 황희경 선생님의 재치란.

어릴 때 재미로만 읽다가, 머리가 좀 굵어져서야 다시 읽은 서유기는 과연 다른 맛이었다. <삼국지(연의)>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이른바 "중국 5대기서" 중에서 내가 여전히 가장 재밌다고 여기는 작품은 단연 <서유기>다.

글쎄, 나이가 좀더 들어서 생각이 더 많아지면(?), <홍루몽>이 더 좋아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심야통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혁명가의 생애
19세기 대지주이자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게르첸
자신의 특권 폐지하려다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뒤
세계를 전전하며 고국의 혁명을 위해 뛰었다
시장경제라는 괴물이 휩쓰는 지금 누가 그를 기억할까
한겨레 한승동 기자
»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우리는 건설하지 않는다. 우리는 파괴한다.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허위를 폐지한다. 현대인은 그저 다리를 놓을 뿐이다. 다른,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미래의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갈 것이다. 너는 그것을 볼지 모르겠다. 이쪽 강변에 언제까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오점없는 반동으로 구원받기보다는 혁명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이 낫다. 혁명의, 위대한 사회변혁의 종교만이 내가 너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종교다. …너의 세대가 되면 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것을 얘기하라. 거기에서는 일찌기 사람들이 내 얘기를 사랑했으니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자유, 우애와 맹세하고 너의 여행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노라!”
 

1855년 런던 교외의 자택에서 열린 신년 축하모임에서 게르첸(Gertsen)은 인삿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것은 그의 논설집 <대안에서>에 첨부된 ‘내 아들 알렉산드르에게’라는 글의 결어다. 인삿말이 끝났을 때 아들 알렉산드르는 울음을 터뜨리며 게르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초청객들 대다수가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자신들의 고국 생각에 잠겼다. 게르첸 자신도 초청객들도 고국에서 쫓겨난 망명자였던 것이다.

약 160년 전의 이 장면을 현대의 우리들에게 선명하게 전해준 것은 영국의 역사가 E·H 카의 저서 <낭만적 망명자>(The Romantic Exiles)다. 원서는 1933년에 출판됐고 일본에서는 1953년에 처음 번역됐다. 내가 읽은 것은 1970년 개정판이다.

게르첸은 1812년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825년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12월당) 반란은 나폴레옹전쟁을 거쳐 자유주의사상으로 각성한 일부 청년귀족이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봉기한, 러시아사상 최초의 혁명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봉기는 간단하게 진압당했다. 주도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많은 참가자들이 시베리아 종신유형 처벌을 받았다. 게르첸은 14살 때 일어난 이 사건에 큰 감명을 받고 친구인 니콜라이 오가료프와 함께 모스크바 교외의 언덕 위에서 12월당의 선구자들이 목숨을 건 신성한 ‘주의’를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맹세했다. 모스크바대학 학생이었던 22살 때 반제정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9개월간의 투옥과 3년간의 추방형을 당한 것이 그의 투쟁경력의 출발점이었다.

1847년 게르첸은 처자와 함께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 뒤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의 도시를 전전하며 '자유러시아 인쇄소' 설립과 신문 <종> 발행 등 젊은 날의 맹세대로 인생의 최후순간까지 고국의 혁명을 위해 계속 뛰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 <누구의 죄> <과거와 사색> 등이 남아 있다. 내가 항상 경탄하는 것은 게르첸 등 19세기 러시아 귀족혁명가들이 농노 소유자인 대지주였고, 오늘날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들이면서도 자신들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다수가 유형이나 사형에 처해졌다는 특이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성'이나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서두에 인용한 게르첸의 말은 조선민족의 선행(앞선)세대가 우리들에게 남긴 말과 상통한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만주에서, 러시아에서,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차세대에 기탁하고 세상을 떠났던가. 1970년 20살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을 아들의 입장에서 읽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말을 읽고 있다. 물론 나 자신이 게르첸처럼 살아왔다는 오만한 감정은 없다. 오히려 내가 받은 감명에는 쓴 맛이 섞여 있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의 잔혹성"이라는 맛일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역사가만이 지닌 얼음같은 냉철함으로 E.H 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들 알렉산드르에게 끼친 그 (신년 축하모임의 감동적인) 영향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세상의 여느 자식들처럼 그도 부친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부친처럼 앞뒤 재지 않는 낭만적인 1830년대의 공기속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영국 빅토리아조의 견실한, 들뜬 1850년대에 성장했다. 혁명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도 지도 위에서 보는 하나의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러시아어는 점차 그의 집에서 들을 수 없게 됐다.”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재일조선인 1세와 2세, 2세와 3세 간에 새겨진 단절의 얘기로 읽을 수도 있다. 아니 재일조선인만이 아니다. 게르첸 부자의 예는 이미 19세기 중반이라는 시점에서 그 이후의 근대 디아스포라 모두에게 공통되는 세대단절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게르첸은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여성관계, 친구관계, 부모자식관계라는 사적인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보통사람이라면 하나도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파괴적인 난관에 몇번이나 봉착했다. 그런 재난들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며, ‘혁명’을 추구하는, ‘낭만적’인, ‘망명자’라는 3중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불가피하고 무서운 비극이다.




1870년 1월21일 게르첸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E·H 카에 따르면 “게르첸은 오래 연명했기 때문에 정치적 중요성을 상실했다. 파리에서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고 그의 죽음은 세상사람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했다.” 게르첸이 죽은 지 50년 뒤 러시아혁명은 해방운동사상 선구자로 그를 칭송했다. 그와 오가료프가 다닌 모스크바대학 구내에는 그들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소련이 붕괴한 지 15년. 시장경제라는 괴물이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현재, 게르첸을, 누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글이 세상에 나올 때는 이미 세계는 2007년을 맞이하게 된다. 새해를 맞아 앞선 세대의 고뇌를 생각하고 ‘세월의 흐름’이라는 무자비한 적에 대한 승산 희박한 싸움에 도전해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서경식 선생이 말한 세대 간 단절의 고통과 비극적 결과라는 내러티브는 오늘날 21세기 한국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된다.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기획기사로 내보내고 있는 <1987년, 그 뒤 20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U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