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애초에 민족영화는 아니었다

일제시기 발굴필름 12편 중 8편 몽땅 ‘친일영화’였지만
조선 관객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를 투영해 수용
‘아리랑’도 상영 거듭되면서 관객 열망 통해 민족영화로

한겨레 한승동 기자
»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김려실 지음. 삼인 펴냄. 1만8000원
1919년 10월27일 국산 연쇄극(활동사진을 신파극 상연 도중에 영사하는 혼성적인 극 양식) <의리적 구투>가 단성사에서 상영돼 대성공을 거둔 이래 일제가 패전한 1945년까지 ‘조선영화’는 모두 약 180편이 제작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식민지, 해방기 혼란, 한국전쟁과 개발독재 등을 거치면서 대다수 필름들이 사라져 한국영화사 복원은 추측과 주변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원본이 없기에 어떤 추측과 주장도 입증 불가능한 명제가 된다.
 

1998년에 러시아 필름보존기관인 고스필모폰드에서 1937년에 제작된 조선영화 <심청>의 일부, 1938년에 제작된 <어화>의 일부가 발견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와 함께 일제 말기의 전쟁선전영화 <망루의 결사대>, <젊은 모습>, <사랑과 맹세>의 프린트도 확보했다. 2004년에는 중국전영자료관에서 <어화>의 완전판과 <군용열차>, <지원병>, <집없는 천사>와 기록연화 <조선>의 필름들을 수집했으며, 2006년에는 현존하는 필름중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 <미몽>과 <반도의 봄>, <조선해협>도 추가로 발굴했다. 이들 12편 가운데 <미몽>, <심청>, <어화>, <조선> 4편을 빼고나면 몽땅 ‘친일영화’다.

 

항일-친일 이항대립적 분석 무의미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삼인 펴냄)의 저자 김려실은 이들 발굴자료를 실제로 보고 낙담했다. 발굴 전까지 일제 치하 조선인들의 고통을 영상으로 고발했다고 평가받았던 영화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리얼리즘영화니 계몽영화로 평가해온 기존 한국영화사의 수탈-저항, 항일영화-친일영화, 민족적 전통-종속적 모방, 리얼리즘영화-신파 멜로드라마 식의 이항대립적 민족주의적 분석 패러다임 자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항일영화=민족영화=리얼리즘영화 도식은 허구였고 친일 리얼리즘 또는 친일 유사리얼리즘 영화들이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책은 발굴필름 12편중 <심청>과 <조선>을 뺀 10편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덧붙여 <수업료>, <그대와 나>, <복지만리> 등의 원작과 시나리오, 시놉시스, 개요 등을 수집해 내용을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한국에 영화가 도래한 시기를 1897년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의미를 따진다. 하지만 저자의 노력이 집중되는 쪽은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은막에 무엇을 ‘투사’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조선의 관객들이 스크린에 투사된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식민통치 내내 조선영화를 검열하고 통제했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영화의 생산, 배급, 관람까지도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지만 결코 관객들의 감수성과 상상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조선인 관객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비애를 스크린에 ‘투영’하여 영화를 수용했고, 따라서 국책영화의 의도는 늘 조금씩 빗나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가 책 제목이 된 연유다.

 

» <무정> 촬영 현장. 일제시기 1939년에 나온 이 영화는 이광수의 원작을 아예 기생 월향(영채)을 중심에 놓고 뜯어 고쳐 당시 조선의 팔리는 민속상품격이었던 기생의 생활과 예능을 볼거리로 삼았다. 민간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무정>의 필름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나 시나리오를 참고해 원작이 어떻게 재구성됐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삼인 제공
일제시대 당시에도 조선영화시장을 장악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리며 한국 무성영화 전성기를 열었고, 한국영화사 전체를 통털어서도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나운규 감독·각본·주연의 <아리랑>(1926)이 그 전형이다. 1997년에 낸 나운규 전기 <나운규>에서 조희문은 신문기사와 광고, 상영프로그램 등 새로운 문헌들을 제시하며 일본자본으로 만든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니라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즈일 가능성, <아리랑>이 ‘항일영화’가 아니며 ‘애국지사 나운규’는 만들어진 신화일 가능성을 제기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제기의 타당성 여부는 <아리랑>을 보기만 하면 확연히 드러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과 시나리오는 망실되고 없다.

김려실은 <아리랑>이 항일영화냐 친일영화냐가 아니라 어떤 영화인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중층적 해석이 가능한 ‘양가적 영화’로 결론짓는다. 영화 <아리랑> 흥행 뒤에 유행한 영화소설 <아리랑>(영화대본을 약간 고친 것일 가능성이 높다)이나 영화관계자들 증언 등을 토대로 <아리랑>이 애초부터 항일영화·민족영화였던 것이 아니라 순회상영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조선관객들의 열망이 투영된 강력한 항일·민족영화로 ‘상상’되고 만들어졌다고 논증한다. 일본인이나 친일파 지주 대 조선인 소작 간의 대결구조가 아닌 지주와 마름, 소작간의 갈등이 주조를 이루는 <아리랑>은 분명히 항일이라는 명시적 기표를 갖고 있진 않지만 그것은 당시 총독부의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 제정 등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의도된 모호’, 얼버무림일 가능성이 크다. 변사가 분위기를 좌우하는 무성영화 특성상 그 모호성이야말로 가끔 임석경관의 눈을 피해 “쫓아가는 사나이는 서울 모전문학교 재학중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쳐났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을 “서울 모전문학교에서 철학공부하다가 3.1운동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된 영진”으로 살짝 바꿔치기함으로써 관객의 ‘민족과 저항’열망에 부응하면서 그것을 더욱 강하게 상상하도록 증폭할 여지를 주었다.

 

영화 속 기생은 ‘식민지 알레고리’




한때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나운규가 나중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다”고 했고 카프의 임화도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그 시대를 휩싸고 있던 시대적 기분이 영롱하게 표현돼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조선의 인상, 풍경, 습속 이상의 것을 맛보는 만족을 얻었다”며 <아리랑>을 최초의 영화다운 영화, 조선영화사상 무성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했다.

‘홍도야 울지 마라’로 통칭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조선의 다수 대중영화가 팔려가는 기생, 연약한 애인이나 오빠·언니, 돈많거나 권력있는 강자 간의 갈등이라는 천편일률에 가까운 구도를 설정한 것이 식민지 지배-피지배, 수탈-저항 관계를 드러내는 알레고리였다는 것, 1930년대 토키영화 도입과 일본자본과의 합작이 친일영화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는 분석 등도 흥미롭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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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반 2007-01-0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7월에 열렸던 국제학술대회 <일제 식민지 시기 새로읽기>에서 "검열과 문학 생산, 문학 연구"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시카고 대학의 최경희 선생은, 식민지 시기 문학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역사학을 비롯한 학제간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열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드러낸 발언이었다.

김려실의 이 저작은 식민지 시기, 그것도 영화사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저간의 관심을 모은다. 특히 그가 이미 시나리오와 필름이 망실된 <아리랑>에 주목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겸열로 인해 원천적으로 텍스트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하는 검열문학처럼, <아리랑>에 대한 해석 역시 글쓴이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기입되는 동시에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전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당대의 사회사와 지성사를 아우르는 역사적/지식사회학적 통찰력도 필요하다. 이 이중의 과제를 풀지 못한 식민지 시기 문학연구는 그 토대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라서, 곧 읽어봐야겠다. 물론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엄밀한 독해가 병행되어야 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