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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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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건설하지 않는다. 우리는 파괴한다.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허위를 폐지한다. 현대인은 그저 다리를 놓을 뿐이다. 다른,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미래의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갈 것이다. 너는 그것을 볼지 모르겠다. 이쪽 강변에 언제까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오점없는 반동으로 구원받기보다는 혁명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이 낫다. 혁명의, 위대한 사회변혁의 종교만이 내가 너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종교다. …너의 세대가 되면 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것을 얘기하라. 거기에서는 일찌기 사람들이 내 얘기를 사랑했으니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자유, 우애와 맹세하고 너의 여행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노라!”
1855년 런던 교외의 자택에서 열린 신년 축하모임에서 게르첸(Gertsen)은 인삿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것은 그의 논설집 <대안에서>에 첨부된 ‘내 아들 알렉산드르에게’라는 글의 결어다. 인삿말이 끝났을 때 아들 알렉산드르는 울음을 터뜨리며 게르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초청객들 대다수가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자신들의 고국 생각에 잠겼다. 게르첸 자신도 초청객들도 고국에서 쫓겨난 망명자였던 것이다.
약 160년 전의 이 장면을 현대의 우리들에게 선명하게 전해준 것은 영국의 역사가 E·H 카의 저서 <낭만적 망명자>(The Romantic Exiles)다. 원서는 1933년에 출판됐고 일본에서는 1953년에 처음 번역됐다. 내가 읽은 것은 1970년 개정판이다.
게르첸은 1812년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825년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12월당) 반란은 나폴레옹전쟁을 거쳐 자유주의사상으로 각성한 일부 청년귀족이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봉기한, 러시아사상 최초의 혁명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봉기는 간단하게 진압당했다. 주도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많은 참가자들이 시베리아 종신유형 처벌을 받았다. 게르첸은 14살 때 일어난 이 사건에 큰 감명을 받고 친구인 니콜라이 오가료프와 함께 모스크바 교외의 언덕 위에서 12월당의 선구자들이 목숨을 건 신성한 ‘주의’를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맹세했다. 모스크바대학 학생이었던 22살 때 반제정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9개월간의 투옥과 3년간의 추방형을 당한 것이 그의 투쟁경력의 출발점이었다.
1847년 게르첸은 처자와 함께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했다. 그 뒤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의 도시를 전전하며 '자유러시아 인쇄소' 설립과 신문 <종> 발행 등 젊은 날의 맹세대로 인생의 최후순간까지 고국의 혁명을 위해 계속 뛰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 <누구의 죄> <과거와 사색> 등이 남아 있다. 내가 항상 경탄하는 것은 게르첸 등 19세기 러시아 귀족혁명가들이 농노 소유자인 대지주였고, 오늘날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들이면서도 자신들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다수가 유형이나 사형에 처해졌다는 특이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성'이나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서두에 인용한 게르첸의 말은 조선민족의 선행(앞선)세대가 우리들에게 남긴 말과 상통한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만주에서, 러시아에서,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차세대에 기탁하고 세상을 떠났던가. 1970년 20살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을 아들의 입장에서 읽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말을 읽고 있다. 물론 나 자신이 게르첸처럼 살아왔다는 오만한 감정은 없다. 오히려 내가 받은 감명에는 쓴 맛이 섞여 있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의 잔혹성"이라는 맛일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역사가만이 지닌 얼음같은 냉철함으로 E.H 카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들 알렉산드르에게 끼친 그 (신년 축하모임의 감동적인) 영향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세상의 여느 자식들처럼 그도 부친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부친처럼 앞뒤 재지 않는 낭만적인 1830년대의 공기속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영국 빅토리아조의 견실한, 들뜬 1850년대에 성장했다. 혁명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도 지도 위에서 보는 하나의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러시아어는 점차 그의 집에서 들을 수 없게 됐다.”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재일조선인 1세와 2세, 2세와 3세 간에 새겨진 단절의 얘기로 읽을 수도 있다. 아니 재일조선인만이 아니다. 게르첸 부자의 예는 이미 19세기 중반이라는 시점에서 그 이후의 근대 디아스포라 모두에게 공통되는 세대단절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게르첸은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여성관계, 친구관계, 부모자식관계라는 사적인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보통사람이라면 하나도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파괴적인 난관에 몇번이나 봉착했다. 그런 재난들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며, ‘혁명’을 추구하는, ‘낭만적’인, ‘망명자’라는 3중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불가피하고 무서운 비극이다.
1870년 1월21일 게르첸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E·H 카에 따르면 “게르첸은 오래 연명했기 때문에 정치적 중요성을 상실했다. 파리에서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고 그의 죽음은 세상사람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했다.” 게르첸이 죽은 지 50년 뒤 러시아혁명은 해방운동사상 선구자로 그를 칭송했다. 그와 오가료프가 다닌 모스크바대학 구내에는 그들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소련이 붕괴한 지 15년. 시장경제라는 괴물이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현재, 게르첸을, 누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글이 세상에 나올 때는 이미 세계는 2007년을 맞이하게 된다. 새해를 맞아 앞선 세대의 고뇌를 생각하고 ‘세월의 흐름’이라는 무자비한 적에 대한 승산 희박한 싸움에 도전해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성공회대 연구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서경식 선생이 말한 세대 간 단절의 고통과 비극적 결과라는 내러티브는 오늘날 21세기 한국에서도 끊임없이 변주된다.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기획기사로 내보내고 있는 <1987년, 그 뒤 20년>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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