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158호_2007년 12월 18일_ 걸리버의 시선>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 그 멜로드라마적 계보학

● Linda Williams, ꡔPlaying the Race Cardꡕ(2001)

● Ben Singer,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2001)


멜로드라마: 모더니티에 반하는 모더니즘


멜로드라마는 모더니티의 산물인가, 아니면 모더니티의 안티테제인가? 이제는 멜로드라마 연구의 고전이 되어버린 ꡔThe Melodramatic Imaginationꡕ(1976)에서 피터 브룩스(Peter Brooks)는 일찍이 멜로드라마의 출현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컨텍스트에 위치시키면서, 그 장르적 상상력을 근대적 불안과 밀접한 소원충족적 양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 신성시대의 몰락과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목도한 근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동요와 혼란을, 다른 한편으로는 재성화(再聖化)의 열망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분열의 충격은 멜로드라마라는 표현주의적 미학에 의해― 비록 사실주의적 원칙에 의해 재현(再現)되지는 못했을망정 ― 극적으로 재연(再演)되었던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근대 세계, 그 냉혹한 생활전선에 내던져진 개인의 무능함과 물질적 취약성을, 멜로드라마는 특유의 과장된 드라마트루기를 통해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궁극적으로 그 회생의 숭고함으로 찬양함으로써 선험적 질서의 (재)발견을 도모한다. 이런 점에서 멜로드라마는, 레이먼드 윌리암스(Raymond Williams)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더니티에 반하는 모더니즘(modernist against modernism)” 양식이다.



린다 윌리엄스: ‘멜로드라마적인 것’이란...

Playing the Race Card: Melodramas of Black and White from Uncle Tom to O. J. Simpson

 

같은 맥락에서 린다 윌리암스(Linda Williams)는 최근 저작 ꡔPlaying the Race Cardꡕ(2001)를 통해, 멜로드라마를 “일개 장르(일탈)”로 보기보다 미국 대중문화의 근저를 이루는 일종의 멘털리티 모드로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멜로드라마의 핵심적 작용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사방이 가로막힌 희생자들의 미덕을 동정”하게 하고 그들이 겪는 “역경과 고통을 통해 덕을 상연, 회복”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면서, 윌리암스는 멜로드라마를 “문학, 연극, 영화 그리고 TV로 재현되는 대중적 내러티브”로 정의하는 데서 나아가, 애틀랜타 올림픽에 대한 TV 보도에서부터 O.J.심슨Simpson 공판까지 아우르는, 보다 넓은 범위의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인과적 전개에 치중한 나머지 스펙터클이나 과잉 같은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스토리텔링의 부가물 내지는 장애물로 강등시켜 버리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내러티브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제 멜로드라마의 초라한 지적 계보는 더 이상 “타락한 비극”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대중문화 연구의 발흥과 함께 영화학의 주요 논제 중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학대받던 희생자가 예기치 못한 운명의 역전을 맞닥뜨리게 되는, 진부한 멜로드라마 플롯에서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멜로드라마적”이라고 하는 형용사의 막연한 적용보다는, 멜로드라마라고 불리던 장르의 실제 출현과 발달을 역사적으로 상술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발자크나 헨리 제임스,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에 녹아들어 있는 근대적 의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Peter Brooks)과 오늘날의 할리우드 여성 영화, 가족드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필름 장르들에 내재된 멜로드라마적 코드(Linda Williams) 사이에는 분명 구조적 유사성뿐 아니라 역사적 불연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800년 경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멜로드라마 형식은 이후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또한 TV 브라운관으로 확장되었다. 그 갈등의 축 역시 신흥 부르주아 대(對) 구 귀족의 대립에서 “무지몽매한” 프롤레타리아와 “교양 있는” 부르주아 간의 충돌, 그리고/혹은 전통적 젠더 이데올로기와 새롭게 등장한 신여성 사이의 마찰로 전환되었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설명은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상호텍스트성의 혼류(混流), 경제적 근대화 같은 보다 넓은 사회적 컨텍스트에 대한 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1913년에서 1918년 사이 미국 대중오락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초창기 필름 시리즈 연구에서 출발했던 벤 싱어(Ben Singer)의 논문이 세기전환기 무렵 모더니티와 멜로드라마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의미망들을 폭넓게 조망하는 한 권의 책, ꡔMelodrama and Modernity: Early Sensational Cinema and Its Contextsꡕ로 탄생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기술historiographical 전환에 힘입은 바 크다.



벤 싱어: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계보학


1880년대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더니티와 멜로드라마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싱어의 저서는 특히 10, 20, 30센트의 대중적 가격이 매겨졌던 극장용 멜로드라마가 십 년대 센셔이셔널한 필름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산업적 근대화라는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초기 영화의 장르적 계보학과 상호텍스트성을 탐구한다. 10-20-30 센트짜리 무대용 멜로드라마와 초기 필름 멜로드라마는 둘 다 그 문화적 지위로 보나 관객의 계급으로 보나 최하 등급에 속했던 오락형식이었다. 이들은 여주인공을 희생시키는 동시에 여웅ㅇ화 하는 식의 내러티브 모티프들을 공유했으며, 모두 폭력적인 액션과 스펙터클한 리얼리즘을 강조했다. 5센트 영화관 붐이 일어나면서, 필름 멜로드라마는 놀라운 속도로 무대용 멜로드라마를 절멸시켰다. 싱어는 이러한 “모친살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미학적, 산업적, 경제적 요소들을 포함한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제공하면서, 멜로드라마 연극의 파산을 단순히 시네마의 사진적 리얼리즘의 승리로 일반화해왔던 이전의 논의들에 대해 엄정한 재평가를 촉구한다. 가령, 싱어는 자신의 책 마지막 세 장에 걸쳐, <The Perils of Pauline>(1914), <The Exploits of Elaine>(1915), <The House of Hate>(1918)와 같은 필름 시리즈들을 분석하면서, 초창기 멜로 시리즈의 서사적, 양식적 특질들과 더불어 그것이 20세기 초 자본주의적 유흥 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사회구조 및 대중심리를 간파한다.




그러나 싱어의 관심은 비단 초기 영화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의 괄목할만한 장점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최근 영화 연구의 많은 분야에서 종종 부주의하게 혹은 모호하게 쓰여오던 용어와 개념들을 정의(定議)적으로 또한 이론적으로 훨씬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싱어는 책의 첫 장을 “모더니티”라는 용어가 담지해왔던 상반된 의미와 경험양식들을 풀어내는 데 할애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티는 다음과 같은 여섯 국면으로 차별화된다. 1) (일반적으로 소위 “근대화”라는 라벨이 붙여지는) 사회경제적ㆍ기술적 성장의 폭발, 2) 도구적 이성의 군림, 3) 이데올로기적 “성찰성(reflexibility)”과 문화적 불연속이 영구화되는 조건, 4) 유동성의 증가와 모든 “사회체(social things)”들의 순환, 5) 사회적 원자화와 경쟁적 개인주의 풍조, 6) 감각적 측면에서 전례없이 복잡하고 격렬한 지각(知覺) 환경. 나아가 싱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멜로드라마”의 역사적, 이론적 개념군을 주의 깊게 정리하여 전통적으로 멜로드라마란 장르를 특징지어왔던 다섯 가지 요소인 “파토스와 주정주의,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 서사 양식, 그리고 시각적 선정주의”로 요약한다. 센세이셔널 멜로드라마의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상호텍스트적, 상업적 측면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싱어의 탁월한 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그 다음에서부터이다. 도시 모더니티와 센세이셔널리즘의 점증을 논하는 3장, 모더니티에 대한 발터 벤야민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단평과 게오르그 짐멜의 통찰을 검증ㆍ명료화하는 4장, 멜로드라마의 탄생과 근대 자본주의 출현 사이의 의미심장한 동시 발생을 탐구하는 5장을 거치면서, 멜로드라마는 자본주의 이익사회와 근대사회의 “선험적 실향”에 대한 보상적 반응의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멜로에 담긴 근대 자본주의의 풍경들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는 비판이론에서 인지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다뤄지는 ‘모더니티 테제’를 19세기 초 미국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멜로드라마의 역사를 통해 해체/재구성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멜로드라마는 근대의 모순적 체험을 개인적 욕망의 언어로 풀어내는 기계-장치,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텍스트로 중층 독해된다. 이를테면,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는 낯선 도시 속에서 온갖 재난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시리얼 퀸의 여주인공과 그녀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한(대개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의 대립구도는 자기주도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등장시키는 한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재편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그 이면에는 변화에 대한 욕망과 그에 대한 불안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싱어는 멜로드라마의 등장과 융성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반동적 움직임이라기보다 근대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새로운 지각양식으로서, 기술 개발과 대중사회의 출현, 유흥문화의 발달과 같은 근대적 현상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재삼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는 브루스 맥코너키(Bruce McConachie)의 ꡔMelodramatic Formationsꡕ(1992), 일레인 해들리(Elaine Hadley)의 ꡔMelodramatic Tacticsꡕ(1995), 셸리 스탬프(Shelley Stamp)의 ꡔMovie Struck Girls: Women and Motion Picture Culture After the Nickelodeonꡕ(2000)과 같은 일련의 저작들과 함께, 최근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멜로의 정체성과 관객 연구나 드라마의 젠더 정치학에 관한 영화사회학적 담론들이 한국 대중문화 및 모더니티 연구의 영역으로 탈/재영토화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위정/ 코넬대 동아시아문학 박사과정 eutopo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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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 157호_2007년 11월 6일>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회적 체계들』에 관하여

 

<니클라스 루만과 체계이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 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

 




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aguj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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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펀드, 1970년 탄생


경제 성장을 위한 자본 조달의 수단으로 도입… 뮤추얼 펀드와 적립식 펀드의 탄생으로 발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흔히 ‘펀드’라고 불리는 증권투자신탁의 뿌리는 19세기 중엽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대한투자신탁(현 하나대투증권) 20년사>(1997년 4월)는 전하고 있다.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을 계기로 막대한 규모의 화폐 자본을 축적했다. 영국 정부는 그 기회를 틈타 저리의 공채를 발행하는 저금리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축적된 화폐 자본을 굴릴 투자처를 국외에서 찾게 됐다. 때마침 유럽 대륙에서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 뒤 전후 복구와 배상금 지불을 위해 높은 이율의 공채를 발행하고 있었다. 또 미국에서도 철도, 운하, 통신 등 산업시설에 대한 자금 수요가 왕성해 금리 수준이 높던 시기였다.



 



△ 2000년 2월 이헌재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왼쪽)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대우채 환매 관련 간담회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한겨레 곽윤섭 기자)




영국에서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영국의 투자자들은 높은 금리를 좇아 외국의 정부, 기업이 발행한 유가증권에 투자하게 됐으며, 이런 해외투자 풍조는 대자본가뿐 아니라 일반 중소 투자자들 사이에도 빠르게 침투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대자본가들은 국외 투자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외 유가증권에 투자해 큰 이윤을 남긴 반면, 일반 투자자들은 단순한 광고나 선전문구에 현혹돼 맹목적인 투자를 함으로써 막대한 손실을 입는 수가 많았다. 이에 따라 일반 투자자들은 자본을 한데 끌어모아 대자본을 형성해 투자 대상을 다양화함으로써 위험을 분산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시장조사에 근거한 안전 투자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자금을 전문적인 투자 대행기관이 나서 유가증권에 분산 투자하고 여기서 생긴 수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펀드가 출현한 토양은 여기서 형성됐다.


투자신탁의 기원으로 불리는 세계 첫 펀드는 1868년 영국에서 생겨난 ‘해외 식민지·정부 신탁’(The Foreign Colonial & Government Trust)이었다고 한다. 이 펀드는 설립 취지서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외국 및 식민지 정부 증권에 분산 투자해 투자 위험을 감소시킴으로써 대자본가와 마찬가지의 이익을 일반 투자자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목적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펀드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특성을 읽을 수 있다.


‘해외 식민지·정부 신탁’ 설립 뒤 중소 투자자들의 참여가 성행하게 됨에 따라 영국에서는 이런 투자신탁 업무를 수행하는 투자조합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또 국채, 지방채, 정부보증 철도채 등 확정이자부 증권에 한정돼 있던 투자 대상이 일반 산업의 주식으로까지 넓어졌다.


영국에서 생겨난 펀드는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 뒤 산업의 부흥과 이에 힘입은 자본의 축적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미국은 1776년 건국 이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에 투입할 전비 조달 외에도 대규모 국토 개발로 항상 자본의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지역은 대량의 물자를 필요로 하게 됐고, 미국은 자연스레 공업 생산물과 농산물의 대량 수출국으로 떠올랐다. 이런 여건 변화에 따른 자본의 축적은 펀드를 발전시킨 중요한 바탕이었다.


미국 최초의 펀드는 1921년에 설립된 ‘미국 국제 증권 신탁’(The International Securities Trust of America)으로 기록돼 있다. 그 뒤 1929년 대공황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940년 투자회사법 제정을 비롯한 제도적 장치 마련으로 미국의 펀드는 비약적인 성장세를 거듭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투자신탁 제도는 미국을 거쳐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지역과 일본으로 퍼져나간 데 이어 지금은 개발도상국에까지 널리 확산돼 있다.

 


1998년 증권투자회사법 제정

<펀드투자 함부로 하지 마라>(2007년 10월)의 저자인 양규형 하나대투증권 전주지점 팀장은 “자본 축적이 양호하게 이뤄진 선진국들에선 펀드 수요가 자연스럽게 생긴 다음 제도와 법 체계가 이를 사후적으로 뒷받침한 반면, 개발도상국들의 경우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의 효율적인 조달을 위해 펀드에 대한 공모주 우선 배정 및 세금 우대 정책 등을 통해 정책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풀이했다. 한국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 조달의 수단으로 펀드를 도입한 경우였다.
한국 최초의 펀드는 1970년 5월20일 1억원 규모의 수익증권 형태로 발행된 한국투자개발공사(→ 한국투자공사 → 대한투자신탁 → 하나대투증권)의 ‘증권투자신탁’이다. ‘증권투자신탁’은 1976년 1월 ‘안전성장 1월호’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선 1970년대만 해도 주식 및 펀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부족해 투자신탁 펀드의 발전은 부진했다. 그러는 중에도 1974년 8월 채권에만 투자하는 공사채형 펀드가 새롭게 도입되고 이듬해엔 ‘단위형 투자신탁’이, 1976년 4월엔 ‘재형주식 펀드’가 잇따라 도입되는 등 차츰 펀드 시장의 면모가 갖춰졌다. 단위형 투자신탁은 기존의 ‘추가형’과 달리 추가 납입을 할 수 없고 중도 환매 또한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펀드였다. 투자신탁의 대중화를 꾀한 재형주식 펀드는 정부 지원에 따라 원금을 일정 부분 보전해주고, 금리를 추가로 더 얹어주는 파격적인 상품이었다.


국내 펀드 시장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큰 변곡점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2월 ‘증권투자회사법’ 제정이었다. 이는 기존의 ‘계약형 투자신탁’(수익증권)의 단점(자산운용의 투명성 부족)을 보완한 ‘회사형 투자신탁’(뮤추얼펀드)의 도입 근거였다. 이를 바탕으로 증권투자회사(페이퍼컴퍼니 형태)와 자산운용 위탁계약을 맺어 자산을 운용하는 별도의 ‘자산운용회사’가 설립됐다. 박현주 회장의 미래에셋이 탄생한 게 이때였다. 뮤추얼펀드는 수익증권과 달리 펀드 자체가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투자자가 주주의 처지에 서지만, 둘은 실질적으론 거의 차이가 없다. 상품 약관에서 ‘증권투자회사’로 돼 있는 게 뮤추얼펀드다.


뮤추얼펀드 도입 뒤 투신사의 운용·판매 분리 정책에 따라 선발 3개 투신사(한국·대한·국민)와 지방 투신사들이 2000년 6월까지 단계적으로 투신운용사와 전환증권사로 분리됐다. 지금은 모든 투신운용회사와 자산운용회사가 펀드 자산의 운용을 전담하고 펀드의 판매는 증권사 또는 은행에서 맡고 있다.

 


대우 채권 사태로 펀드 시장 마비

외환위기 과정에서 국내 펀드 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우그룹을 부도 처리하면서 발생한 대우 채권이 공사채형 펀드 시장을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사채형 펀드는 ‘투자’가 아니라 원금을 보장해주는 ‘저축’으로만 여겨져 투자자들은 대규모 원금 손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투자금의 일정 부분을 보전해주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위기를 넘겼다. 투자 상품이라는 속성에 따른다면 온전히 투자자들의 책임이었음에도 금융시장의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펀드 대중화의 길을 닦은 건 2004년에 도입된 ‘적립식 펀드’였다. 소액으로 조금씩 펀드에 저축하듯이 투자하는 적립식 펀드는 펀드 시장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장기간의 저금리로 유동자금이 풍부한 상태였다는 터전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주가가 2천 포인트 고개를 넘고, 펀드 열풍이 불어닥친 배경에는 적립식 펀드가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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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2008 겨울 신규 대중강좌




  ■ 맑스주의와 환경




         1강 : 지구온난화                     2강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환경 

         3강 : 다양한 환경이론들              4강 : 환경문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




      - 강사: 김민정(세미나네트워크 새움 회원, 성공회대 강사) 외

      - 일정: 1월 14일 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총 4회


 


   ■ 자본주의, 미래는 있는가?

         - 정치경제학 원론에서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1강 : 상품과 그 가치/ 화폐/ 가격      2강:  자본과 잉여가치, 이윤, 임금    3강 : 공황 

         4강 : 독점 자본주의                  5강:  국가 독점 자본주의             6강: 신자유주의




      - 강사: 강성윤 (노사과연 교육위원)

      - 일정: 1월 16일 부터 매주 수요일 7시 총 6회(설연휴 휴강)

      - 교재: 노동자 교양 경제학, 채만수 지음, 노사과연 (교재 구입 가능합니다. 20% 할인)

 




   ■ 현대 라틴 아메리카의 현황과 역사




         1강 : 19세기 말 20세기 초 과두지배 체제의 구축과 멕시코혁명의 파노라마

         2강 : 대공황의 여파와 포퓰리즘 체제  // 3강 : 쿠바혁명과 체 게바라, 쿠바를 떠난 자와 남은 자

         4강 : 군부독재 체제와 인권유린 문제, 과거사청산 논의

         5강 : '잃어버린 10년'과 세계화, 사파티스타 운동과 반세계화

         6강 : 우고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바람: 새로운 대안인가?




      - 강사: 박구병 (UCLA박사, 서울대, 연세대 강사)

      - 일정: 1월 22일 부터 매주 화요일 7시 총 5회(설연휴 휴강)

 




   ■ 신규 세미나





◆ 한국 현대사


◆ 맑스주의의 역사


◆ 이데올로기론과 반폭력의 정치


담당자 : 김경수 (새움 회원)

첫모임 : 1월 16일 수요일 2시


담당자 : 한형식 (새움 회원)

첫모임 : 1월 16일 수요일 7시


담당자 : 진태원 (서울대 철학박사)

첫모임 : 1월 15일 화요일 오후 2시









모든 강좌와 세미나는 신촌 [새움] 세미나실에서 열립니다. (문의 : 011-9975-1392)

 

 

 

 




♣ 새움 세번째 영화 상영회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 상영시간표






 


4:00


7:00


1월 9일 (수)


 잊혀진 사람들

(The Young and the Damned, 1950)

 

감독 : 루이스 부뉴엘 / 85 min


엘 토포 (El Topo, 1971)

 

감독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 124min


1월 10일 (목)


마추카 (Machuca, 2004)

 

감독 : 안드레스 우드 / 120min


오피셜 스토리

 (The Official Story, 1985)

 

감독 : 루이스 푸엔조 / 112min


1월 11일 (금)


 검은 신 하얀 악마

 ( Black God, White Devil, 1964)

 

감독 : 글라우버 로샤 / 120min


 마꾸나이마 (Macunaima, 1969)

 

감독 : 조아낑 뻬드로 데 안드라데 /105min


1월 12일 (토)


저개발의 기억

(Memories Of Underdevelopment, 1968)

감독 :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 / 97min


 루시아 (Lucia, 1969)

 

감독 : 움베르토 솔라스 / 160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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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맑스주의의 이단적 유산

[학술기획] 일본의 지적 흐름 ② 일본의 맑스주의

후지이 다케시│성균관대 사학과 강사 master@dambee.net

 
일본 맑스주의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무언가 배우려 할 때, 어쩌면 이 당연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에서 혁명운동이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찰을 비롯한 국가권력의 극심한 탄압과 같은 외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일본공산당의 입장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하지만 러시아나 중국에서 탄압이 덜했기 때문에 혁명이 승리한 것이 아니듯 외적인 요인만으로 이 패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혁명운동을 조직하는 ‘주체’의 문제로서 내재적으로 성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지금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주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여타 혁명운동과 크게 다른 점은 맑스주의라는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레닌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듯이 이론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부각되고, 혁명운동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론투쟁이 벌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운동의 패배는 곧 이론의 패배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일본 맑스주의의 이론 수준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특별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당에 대한 물신주의가 맑스주의 이론을 당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리고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그것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었으며, 1930년대 일본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전개된 이론의 붕괴현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1960년대에 이르러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론으로 재정립하기 위해 ‘교조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적대적 공범관계’에 있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도 결코 프랑스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 이론의 황무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지금 한국에서도 맑스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론가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30년대 일본에서 ‘이론의 당파성’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당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흐름에 맞서 싸웠던 철학자 가토 다다시(加藤正)를 소개함으로써 이론 생산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가토 다다시의 이단적 사유 - 교조주의와의 투쟁

1906년생인 가토는 교토제대 철학과 재학 중인 1930년에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번역함으로써 유물론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쯤에 가토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고 당원으로서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 당이란 절대적 존재였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50년대를 당원 지식인들이 ‘계급’이라는 칼로 가차 없이 세계를 재단했던 시대라고 회상했는데, 일본에서도 1927년에 ‘일본문제에 관한 테제(소위 ‘27년테제’)’를 통해 당시 최고의 이론가로 간주되었던 후쿠모토 가즈오(福本和夫)가 코민테른 앞에 굴복함으로써 코민테른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나서는, 이론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코민테른과 그 지부로서의 공산당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맑스주의자이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즉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붙어도 최종적인 판단은 당이 내린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토는 그러한 분위기에 반기를 들었다. 1933년에 유물론연구회에서 벌어진 소위 ‘이론의 당파성’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1933년 2월에 유물론연구회에서 가토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문제’라는 발표를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위 ‘당파성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발표에서 가토는 “맑스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새로운 담지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명과 진로를 밝혔다. 그리고 그러한 까닭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해방의 이론이 되었는데, 우리 철학적 아류들은 이 관계를 전도시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하는’ 세계 이해로서 맑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스로의 지도자로 삼았다”며 “변증법적 유물론 및 맑스주의를 무산자적 존재의 자아의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그것을 공상적 사회주의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지하는 관계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맑스의 학설들을 사회적 존재에 대응하는 의식 혹은 이데올로기의 범주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맑스주의 이론을 프롤레타리아계급(즉 그 대변자인 당)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관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아가 “세계를 파악하는 주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사물을 그 자체적 연관 속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하는 이론적 사유라는 것이 전면적인 의의를 가지고 이해되기 위해서 우리는 조직적인 이론투쟁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는 옹호해야 할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이론적 사유가 인식주체’라고 말하는 가토에 대해 유물론연구회에서는 대다수가 그의 입장을 ‘객관주의’라고 규정하면서 이론의 당파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가토는 ‘사물의 올바른 인식이 계급적 입장에 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는 사상이야말로 가공할 객관주의’라고 응전했지만 1933년 11월에 가토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사이에 이 논쟁은 일방적으로 종결이 선언되었다. 가토의 주장은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객관주의’로 단죄되고 만 것이다.


가토 다다시와 알튀세르 - 과학적 유물론의 전개

가토의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기에 과학을 이데올로기로부터 지켜내려는 순진한 ‘과학자’의 주장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토는 이러한 ‘당파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공산당 활동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구속 중에 쓴 ‘이론의 당파성 및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가토는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한 다음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론이 차단된 결과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실천을 지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단체에 대해 당이 통제를 가함으로써 그것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가토는 일본의 여러 단체들이 분열된 사례와 더불어 신간회 해체도 그러한 당파성 이데올로기의 결과 생긴 오류라고 비판을 하는데, 이런 부분을 보더라도 당시 일본 지식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국제주의적 시야를 가지고 혁명운동을 주시하면서 당파성 이데올로기 비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이 알튀세르와의 유사성이다. 가토는 엥겔스를, 알튀세르는 <자본론>의 맑스를 주된 참조틀로 삼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한 대상은 초기 맑스에 의거한 인간중심주의적인 맑스주의였다(그런 점에서 가토 역시 스피노자를 ‘진실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시각이 운동에 앞서는 주체를 설정함으로써 그 휴머니스트적인 겉보기와 달리 결국에는 운동을 통괄하는 존재(당-국가)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가토도, 알튀세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가토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탁월한 것이었으며, 혁명운동과 이론이 가져야 할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지금도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가토의 이러한 문제제기도 혁명운동의 패배를 만회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가토는 인식의 주체는 이론적 사유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인식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열린 사유를 실제로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가토는 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당은 대량 전향과 탄압 속에서 괴멸되고 말았다.

가토 다다시가 제기한 이론적 문제는 결코 일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이론적 사유’를 강조하면서도 가토는 그것을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운동/실천을 특정 주체로 환원시키지 않는 ‘이론적 사유’를 사회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앎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FROM 중대대학원신문 제2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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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 2007-12-24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여러 선후배님들이 좋을 글들을 모아놓으시니 전 줏어먹기만 해도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