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맑스주의의 이단적 유산
[학술기획] 일본의 지적 흐름 ② 일본의 맑스주의
후지이 다케시│성균관대 사학과 강사 master@dambee.net
일본 맑스주의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무언가 배우려 할 때, 어쩌면 이 당연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에서 혁명운동이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찰을 비롯한 국가권력의 극심한 탄압과 같은 외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일본공산당의 입장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하지만 러시아나 중국에서 탄압이 덜했기 때문에 혁명이 승리한 것이 아니듯 외적인 요인만으로 이 패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혁명운동을 조직하는 ‘주체’의 문제로서 내재적으로 성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지금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주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여타 혁명운동과 크게 다른 점은 맑스주의라는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레닌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듯이 이론의 중요성이라는 것이 부각되고, 혁명운동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론투쟁이 벌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운동의 패배는 곧 이론의 패배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일본 맑스주의의 이론 수준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특별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당에 대한 물신주의가 맑스주의 이론을 당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리고 대부분의 이론가들이 그것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었으며, 1930년대 일본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게 된 배경에는 소련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전개된 이론의 붕괴현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1960년대에 이르러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론으로 재정립하기 위해 ‘교조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적대적 공범관계’에 있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도 결코 프랑스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 이론의 황무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지금 한국에서도 맑스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론가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30년대 일본에서 ‘이론의 당파성’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당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흐름에 맞서 싸웠던 철학자 가토 다다시(加藤正)를 소개함으로써 이론 생산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가토 다다시의 이단적 사유 - 교조주의와의 투쟁
1906년생인 가토는 교토제대 철학과 재학 중인 1930년에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번역함으로써 유물론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쯤에 가토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고 당원으로서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 당이란 절대적 존재였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50년대를 당원 지식인들이 ‘계급’이라는 칼로 가차 없이 세계를 재단했던 시대라고 회상했는데, 일본에서도 1927년에 ‘일본문제에 관한 테제(소위 ‘27년테제’)’를 통해 당시 최고의 이론가로 간주되었던 후쿠모토 가즈오(福本和夫)가 코민테른 앞에 굴복함으로써 코민테른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나서는, 이론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코민테른과 그 지부로서의 공산당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맑스주의자이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즉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붙어도 최종적인 판단은 당이 내린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토는 그러한 분위기에 반기를 들었다. 1933년에 유물론연구회에서 벌어진 소위 ‘이론의 당파성’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1933년 2월에 유물론연구회에서 가토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문제’라는 발표를 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위 ‘당파성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발표에서 가토는 “맑스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새로운 담지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명과 진로를 밝혔다. 그리고 그러한 까닭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해방의 이론이 되었는데, 우리 철학적 아류들은 이 관계를 전도시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하는’ 세계 이해로서 맑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스로의 지도자로 삼았다”며 “변증법적 유물론 및 맑스주의를 무산자적 존재의 자아의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그것을 공상적 사회주의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지하는 관계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맑스의 학설들을 사회적 존재에 대응하는 의식 혹은 이데올로기의 범주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맑스주의 이론을 프롤레타리아계급(즉 그 대변자인 당)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관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아가 “세계를 파악하는 주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사물을 그 자체적 연관 속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파악하는 이론적 사유라는 것이 전면적인 의의를 가지고 이해되기 위해서 우리는 조직적인 이론투쟁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는 옹호해야 할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이론적 사유가 인식주체’라고 말하는 가토에 대해 유물론연구회에서는 대다수가 그의 입장을 ‘객관주의’라고 규정하면서 이론의 당파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가토는 ‘사물의 올바른 인식이 계급적 입장에 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는 사상이야말로 가공할 객관주의’라고 응전했지만 1933년 11월에 가토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사이에 이 논쟁은 일방적으로 종결이 선언되었다. 가토의 주장은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객관주의’로 단죄되고 만 것이다.
가토 다다시와 알튀세르 - 과학적 유물론의 전개
가토의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기에 과학을 이데올로기로부터 지켜내려는 순진한 ‘과학자’의 주장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토는 이러한 ‘당파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공산당 활동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구속 중에 쓴 ‘이론의 당파성 및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가토는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전개한 다음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론이 차단된 결과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실천을 지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단체에 대해 당이 통제를 가함으로써 그것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가토는 일본의 여러 단체들이 분열된 사례와 더불어 신간회 해체도 그러한 당파성 이데올로기의 결과 생긴 오류라고 비판을 하는데, 이런 부분을 보더라도 당시 일본 지식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국제주의적 시야를 가지고 혁명운동을 주시하면서 당파성 이데올로기 비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이 알튀세르와의 유사성이다. 가토는 엥겔스를, 알튀세르는 <자본론>의 맑스를 주된 참조틀로 삼았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한 대상은 초기 맑스에 의거한 인간중심주의적인 맑스주의였다(그런 점에서 가토 역시 스피노자를 ‘진실한 사상가’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시각이 운동에 앞서는 주체를 설정함으로써 그 휴머니스트적인 겉보기와 달리 결국에는 운동을 통괄하는 존재(당-국가)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가토도, 알튀세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가토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탁월한 것이었으며, 혁명운동과 이론이 가져야 할 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 지금도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가토의 이러한 문제제기도 혁명운동의 패배를 만회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가토는 인식의 주체는 이론적 사유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인식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열린 사유를 실제로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가토는 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당은 대량 전향과 탄압 속에서 괴멸되고 말았다.
가토 다다시가 제기한 이론적 문제는 결코 일본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이론적 사유’를 강조하면서도 가토는 그것을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운동/실천을 특정 주체로 환원시키지 않는 ‘이론적 사유’를 사회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앎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FROM 중대대학원신문 제2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