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158호_2007년 12월 18일_ 걸리버의 시선>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 그 멜로드라마적 계보학
● Linda Williams, ꡔPlaying the Race Cardꡕ(2001)
● Ben Singer,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2001)
멜로드라마: 모더니티에 반하는 모더니즘
멜로드라마는 모더니티의 산물인가, 아니면 모더니티의 안티테제인가? 이제는 멜로드라마 연구의 고전이 되어버린 ꡔThe Melodramatic Imaginationꡕ(1976)에서 피터 브룩스(Peter Brooks)는 일찍이 멜로드라마의 출현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컨텍스트에 위치시키면서, 그 장르적 상상력을 근대적 불안과 밀접한 소원충족적 양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 신성시대의 몰락과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를 목도한 근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동요와 혼란을, 다른 한편으로는 재성화(再聖化)의 열망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분열의 충격은 멜로드라마라는 표현주의적 미학에 의해― 비록 사실주의적 원칙에 의해 재현(再現)되지는 못했을망정 ― 극적으로 재연(再演)되었던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근대 세계, 그 냉혹한 생활전선에 내던져진 개인의 무능함과 물질적 취약성을, 멜로드라마는 특유의 과장된 드라마트루기를 통해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궁극적으로 그 회생의 숭고함으로 찬양함으로써 선험적 질서의 (재)발견을 도모한다. 이런 점에서 멜로드라마는, 레이먼드 윌리암스(Raymond Williams)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더니티에 반하는 모더니즘(modernist against modernism)” 양식이다.
린다 윌리엄스: ‘멜로드라마적인 것’이란...
같은 맥락에서 린다 윌리암스(Linda Williams)는 최근 저작 ꡔPlaying the Race Cardꡕ(2001)를 통해, 멜로드라마를 “일개 장르(일탈)”로 보기보다 미국 대중문화의 근저를 이루는 일종의 멘털리티 모드로 명명할 것을 제안한다. 멜로드라마의 핵심적 작용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사방이 가로막힌 희생자들의 미덕을 동정”하게 하고 그들이 겪는 “역경과 고통을 통해 덕을 상연, 회복”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면서, 윌리암스는 멜로드라마를 “문학, 연극, 영화 그리고 TV로 재현되는 대중적 내러티브”로 정의하는 데서 나아가, 애틀랜타 올림픽에 대한 TV 보도에서부터 O.J.심슨Simpson 공판까지 아우르는, 보다 넓은 범위의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 위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인과적 전개에 치중한 나머지 스펙터클이나 과잉 같은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스토리텔링의 부가물 내지는 장애물로 강등시켜 버리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내러티브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제 멜로드라마의 초라한 지적 계보는 더 이상 “타락한 비극”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대중문화 연구의 발흥과 함께 영화학의 주요 논제 중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학대받던 희생자가 예기치 못한 운명의 역전을 맞닥뜨리게 되는, 진부한 멜로드라마 플롯에서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멜로드라마적”이라고 하는 형용사의 막연한 적용보다는, 멜로드라마라고 불리던 장르의 실제 출현과 발달을 역사적으로 상술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발자크나 헨리 제임스,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에 녹아들어 있는 근대적 의식으로서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Peter Brooks)과 오늘날의 할리우드 여성 영화, 가족드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필름 장르들에 내재된 멜로드라마적 코드(Linda Williams) 사이에는 분명 구조적 유사성뿐 아니라 역사적 불연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800년 경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멜로드라마 형식은 이후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으로, 또한 TV 브라운관으로 확장되었다. 그 갈등의 축 역시 신흥 부르주아 대(對) 구 귀족의 대립에서 “무지몽매한” 프롤레타리아와 “교양 있는” 부르주아 간의 충돌, 그리고/혹은 전통적 젠더 이데올로기와 새롭게 등장한 신여성 사이의 마찰로 전환되었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설명은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상호텍스트성의 혼류(混流), 경제적 근대화 같은 보다 넓은 사회적 컨텍스트에 대한 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1913년에서 1918년 사이 미국 대중오락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초창기 필름 시리즈 연구에서 출발했던 벤 싱어(Ben Singer)의 논문이 세기전환기 무렵 모더니티와 멜로드라마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의미망들을 폭넓게 조망하는 한 권의 책, ꡔMelodrama and Modernity: Early Sensational Cinema and Its Contextsꡕ로 탄생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기술historiographical 전환에 힘입은 바 크다.
벤 싱어: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계보학
1880년대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더니티와 멜로드라마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싱어의 저서는 특히 10, 20, 30센트의 대중적 가격이 매겨졌던 극장용 멜로드라마가 십 년대 센셔이셔널한 필름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산업적 근대화라는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초기 영화의 장르적 계보학과 상호텍스트성을 탐구한다. 10-20-30 센트짜리 무대용 멜로드라마와 초기 필름 멜로드라마는 둘 다 그 문화적 지위로 보나 관객의 계급으로 보나 최하 등급에 속했던 오락형식이었다. 이들은 여주인공을 희생시키는 동시에 여웅ㅇ화 하는 식의 내러티브 모티프들을 공유했으며, 모두 폭력적인 액션과 스펙터클한 리얼리즘을 강조했다. 5센트 영화관 붐이 일어나면서, 필름 멜로드라마는 놀라운 속도로 무대용 멜로드라마를 절멸시켰다. 싱어는 이러한 “모친살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미학적, 산업적, 경제적 요소들을 포함한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제공하면서, 멜로드라마 연극의 파산을 단순히 시네마의 사진적 리얼리즘의 승리로 일반화해왔던 이전의 논의들에 대해 엄정한 재평가를 촉구한다. 가령, 싱어는 자신의 책 마지막 세 장에 걸쳐, <The Perils of Pauline>(1914), <The Exploits of Elaine>(1915), <The House of Hate>(1918)와 같은 필름 시리즈들을 분석하면서, 초창기 멜로 시리즈의 서사적, 양식적 특질들과 더불어 그것이 20세기 초 자본주의적 유흥 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사회구조 및 대중심리를 간파한다.
그러나 싱어의 관심은 비단 초기 영화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의 괄목할만한 장점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최근 영화 연구의 많은 분야에서 종종 부주의하게 혹은 모호하게 쓰여오던 용어와 개념들을 정의(定議)적으로 또한 이론적으로 훨씬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싱어는 책의 첫 장을 “모더니티”라는 용어가 담지해왔던 상반된 의미와 경험양식들을 풀어내는 데 할애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티는 다음과 같은 여섯 국면으로 차별화된다. 1) (일반적으로 소위 “근대화”라는 라벨이 붙여지는) 사회경제적ㆍ기술적 성장의 폭발, 2) 도구적 이성의 군림, 3) 이데올로기적 “성찰성(reflexibility)”과 문화적 불연속이 영구화되는 조건, 4) 유동성의 증가와 모든 “사회체(social things)”들의 순환, 5) 사회적 원자화와 경쟁적 개인주의 풍조, 6) 감각적 측면에서 전례없이 복잡하고 격렬한 지각(知覺) 환경. 나아가 싱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멜로드라마”의 역사적, 이론적 개념군을 주의 깊게 정리하여 전통적으로 멜로드라마란 장르를 특징지어왔던 다섯 가지 요소인 “파토스와 주정주의,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 서사 양식, 그리고 시각적 선정주의”로 요약한다. 센세이셔널 멜로드라마의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상호텍스트적, 상업적 측면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싱어의 탁월한 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그 다음에서부터이다. 도시 모더니티와 센세이셔널리즘의 점증을 논하는 3장, 모더니티에 대한 발터 벤야민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단평과 게오르그 짐멜의 통찰을 검증ㆍ명료화하는 4장, 멜로드라마의 탄생과 근대 자본주의 출현 사이의 의미심장한 동시 발생을 탐구하는 5장을 거치면서, 멜로드라마는 자본주의 이익사회와 근대사회의 “선험적 실향”에 대한 보상적 반응의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멜로에 담긴 근대 자본주의의 풍경들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는 비판이론에서 인지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다뤄지는 ‘모더니티 테제’를 19세기 초 미국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멜로드라마의 역사를 통해 해체/재구성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멜로드라마는 근대의 모순적 체험을 개인적 욕망의 언어로 풀어내는 기계-장치,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사회적 텍스트로 중층 독해된다. 이를테면,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는 낯선 도시 속에서 온갖 재난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시리얼 퀸의 여주인공과 그녀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한(대개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의 대립구도는 자기주도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등장시키는 한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재편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그 이면에는 변화에 대한 욕망과 그에 대한 불안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싱어는 멜로드라마의 등장과 융성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반동적 움직임이라기보다 근대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새로운 지각양식으로서, 기술 개발과 대중사회의 출현, 유흥문화의 발달과 같은 근대적 현상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재삼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ꡔMelodrama and Modernityꡕ는 브루스 맥코너키(Bruce McConachie)의 ꡔMelodramatic Formationsꡕ(1992), 일레인 해들리(Elaine Hadley)의 ꡔMelodramatic Tacticsꡕ(1995), 셸리 스탬프(Shelley Stamp)의 ꡔMovie Struck Girls: Women and Motion Picture Culture After the Nickelodeonꡕ(2000)과 같은 일련의 저작들과 함께, 최근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멜로의 정체성과 관객 연구나 드라마의 젠더 정치학에 관한 영화사회학적 담론들이 한국 대중문화 및 모더니티 연구의 영역으로 탈/재영토화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위정/ 코넬대 동아시아문학 박사과정 eutopos@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