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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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지도 않고 이곳 서재에 들러 내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굳이 여러 편을 읽을 필요 없었다. 참담하였다. 내 문장도 그렇게 이상하였다. 저자가 눈살을 찌푸릴 만한 표현이 여럿 보였다. 내가 이상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문장이 더 있을 것이다. 저자는 중독이라고 했다.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는 중독자가 아닌지 살피라고 했다. 스스로 중독자가 아닌지 살필 수 있는 사람을 중독자라고 할 수 있을까? 변명일 지도 모른다. 나는 편리함이 좋다. 아니 좋은 지 싫은 지도 생각 않고 편리함을 좇는다. 그러니 중독이라 할 만하다. 나는 중독의 편안함과 익숙함이 좋다. 빠져나오기 싫다. 나는 비겁자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김훈체'를 좋아했다. 뭐가 좋은 줄도 모르고 좋아했다. 특히 <자전거 여행>의 문장들은 환상적이었다. 지금은 내가 김훈의 문장을 좋아한 일마저도 중독이었음을 어림짐작으로 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좀처럼 풍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음은 나의 성격과 닮아 친근함을 느꼈다. 문장 자체가 풍경이 되는 경지는 20대 특유의 탐미적 경향에 부합했다. 문장에서 흘러넘치는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김훈의 문장은 때론 불안하였으나, 불안한 문장들이 모여 이루어진 글에서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뛰어들지 않고도 세상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렇다. 내 중독의 키워드는 풍경이었다. 아름답기만 해도 좋은 풍경, 굳이 뛰어들 필요가 없는 풍경.


저자는 문장의 주인이 글을 쓰는 내가 아니라고 했다.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고 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 생각과 달라서가 아니었다. 문장에도 주인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20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어 온 사람다운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가 다듬었던 글의 저자들도 생각이 같은지 궁금했다. 고 남경태 선생의 화법을 흉내내자면, 책의 저자는 오너, 교정 교열 일을 하는 사람은 CEO라고 할 수 있다. 오너는 굳이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결코 문장의 오너일 수 없는 이 책의 저자는 문장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따로 있노라고 말한다. 그마저도 문장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노라고 말한다. 입장의 차이가 이처럼 확연하다.


김훈의 책을 펼쳐 아무 문장이나 하나 골라 읽어본다. 몇 번을 읽어도 문장의 주인을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고 할 수가 없다. 백 번을 양보해 문장의 주인은 주어와 술어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문장들이 모여 이루어진 글은 오롯이 김훈의 글이다. 저자는 교정 교열 일을 하면서 글의 내용에 집중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저자의 입장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글 전체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문장의 주인을 그 어디서도 아닌 문장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아닌) 글을 쓰는 저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을 낸다. 모든 문장이 자신의 문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정 교열 일을 낮추어 보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좋은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암의 문장론을 열심히 읽고, 김훈의 문체를 따라 하기도 했다. 김영하, 성석제, 이윤기, 신영복, 유시민의 문장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문제는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무엇을'이 문제라는 것은 내 사유와 경험의 부족을 뜻한다는 것도 함께 알았다. 글쓰기의 최대 난제는 좋은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글감을 찾는 일이다. 글의 좋은 내용이 이상한 문장 때문에 가려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지탄받을 내용의 글이 좋은 문장을 썼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는 없는 법이고, 뻔한 내용의 글이 완벽한 문장을 썼다고 해서 감동을 주는 글로 돌변하지도 않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좋은 문장에 매달리면 자칫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십상이다.


(사족) 서로를 향해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다행히 이 책은 좋은 글에 이상하지 않은 문장이 갖춰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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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구와 여러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하늘이 이쁘다'라는 문구로 마지막 메시지를 대신하는 친구다. 그럼으로써 오전에 비가 왔다가 지금은 그쳤다는 사실과 그 예쁘다 못해 이쁜 하늘을 나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우쳐주는 친구다. 그 친구는 그런 친구다. 사실 한국 남자가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죄다. 마흔이 코앞인데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더욱 죄다. 남편이자 가장이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더더욱 죄다.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 보다 더 큰 죄는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어려서부터 지은 죄가 많았다. 그러고도 잘 살고 있으니 대견하고도 부러운 일이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한다. 어려서는 지은 죄가 많은 것이 나와 닮은 것 같아 좋았다면, 지금은 그 많은 죄를 짓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에 좋다. 그 친구 덕분에 때맞춰 이쁜 하늘을 볼 수 있으니 내겐 큰 복이다. 친구여 오래 곁에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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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날에는 독서인구가 점점 줄고 있다는 뉴스가 빠지면 섭섭하듯, 오늘 같은 날에는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뉴스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이 시대에 농경시대의 유물이라 할 명절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듯, 이제 한글날 외래어 오남용 뉴스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 용 '콘텐츠'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 년에 하루 쯤 이런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하다는 경각심과 한글 사랑의 마음을 동시에 키울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일 수도 있다.


뉴스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작부터 삐딱했다. 뉴스에서 문제 삼는 대상은 거리의 간판과 행정기관이다. 거리에 간판을 내건 자영업자든 행정기관의 공무원이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일기나 편지가 아니다. 누가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문구다. 그들은 외래어를 오남용하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게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신념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렇게 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서울 강남까지 신분당선 타GO, 33분이면 OK'는 외래어 오남용이 아니라, 일종의 전술전략이다.


마치 그들만 정신 차리면 외래어 오남용 문제가 말끔히 해소될 것처럼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명만 말해주고 치료와 처방을 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소비자에게 외래어가 더 잘 '어필'할 것이라는 그들의 신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신념은 한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신념일 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묻고 싶다. 밥집에서 먹는 음식과 레스토랑에서 먹는 음식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나는 후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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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투덜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투덜이로 불리고 있다. 대학 입학 후 투덜이임을 숨기고 살 생각이었으나, 몇 달 만에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일종의 아웃팅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로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철없던 시절에는 세상사에 딴지를 걸며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비판을 내놓는 것을 자랑 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악취미였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나의 투덜거림에 상처 받았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INTP다. 특히 I와 T 수치가 아주 높은 편이다. 언제나 행동 보다 생각이 앞선다. 아니, 절대적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 많은 생각들을 언제 다 행동으로 옮길 지 나 자신조차도 짜증스럽고 지겨울 때가 있다. 물론 이것도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간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잡음을 만들지 않는다.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예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부끄럼쟁이 샌님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생각이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또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예단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렇다. 나는 비겁하고도 오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누가 내 허벅지를 두고 두껍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 신체 부위 중 두꺼운 곳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거울을 보니, 과연 상체에 비한다면 하체는 그럭저럭 봐 줄 만 했다. 상체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초등학교 3학년생의 몸매였다. 몇 년 전부터 더위보다 추위를 더 타고 있다. 전에는 반대였다. 여름이면 줄줄 흐르던 땀도 이제 별로 나지 않는다. 재작년 겨울에는 난생 처음으로 자다가 추워서 깨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고생을 했다. 자연스럽게 먹는 양이 줄었고, 살도 좀 빠졌다. 전에도 내가 소음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요즘 그것을 몸으로 직접 실감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덤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대견한 다짐도 하게 되었다.


나는 소음인이다. 나는 INTP다. 나는 투덜이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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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경기 일정이 발표될 때부터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마지막 경기가 그 팀과의 경기란 말인가. 그 경기는 이미 전설인 선수의 은퇴 경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그대들이 남의 잔치의 들러리가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대들과 라이온즈의 가을야구는 좌절된 상태, 그날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러한 경기를 보고 싶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경기 결과와 함께 그날 주인공과의 정면승부를 택한 그대들의 선발투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올해 그대들의 야구는 실패라고 할 것이나,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그대들을 응원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에게 한 수 배웠다. 회피와 유예로 점철된 나의 지난날을 후회하며 이 전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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