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그들을 낙산영웅이라 부른다. 4년 전 가을, 나는 그들을 처음 만났다. 그해 그들은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하게 되었고, 내가 처음으로 시청한 야구중계가 바로 그들의 가을야구였다. 1, 2차전을 내리 이긴 그들은 쉽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리버스 스윕, 그해 그들의 야구는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도 그들은 연이어 가을야구에 초대받았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그런 야구를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樂山英雄이 아니라 落山英雄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들의 야구를 보며 느낀 바가 있어 이 전을 짓는다.



2.

작년 시즌을 시작하기 전, 그들은 꼴찌 후보였다. 너무나 많은 선수들이 이탈했기에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예측이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그러한 예측을 했던 자들은 반성과 사과를 해야만 했다. 빠져나간 선수들의 자리는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해 완벽하게 채웠다. 그들은 3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세인들의 올해 예측도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세인들의 지적처럼 落山이라는 말은 성공보다는 실패와, 귀환보다는 떠남과, 완성보다는 미완과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부족한 자가 떠나고, 떠난 자가 성공하며, 성공한 자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를 나는 믿는다. 현재 그들의 승률은 정확히 5할이다. 이 숫자가 너무나도 미묘하여 이 전을 짓는다.



3. 

아버지는 병석에 누운 후로 하던 대로만 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밥을 먹을 때도, 옷을 입거나 이불을 덮을 때도,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꿀 때도 하던 대로만 한다. 텔레비전 시청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보던 것만을 본다. 그들의 야구도 아버지의 시청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전에 아버지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아버지는 중환자였으니, 전부터 그들의 야구를 응원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리 된 연유를 나는 다만 속으로 짐작할 뿐이다. 훗날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야구를 지켜볼 것을 생각하며 이 전을 짓는다.



4.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하면 한마디로 그들은 비주류다. 그들이 비주류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설움과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비주류이기에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말썽과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문득, 이야기 속 영웅들은 모두 비주류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 전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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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과 <국가란 무엇인가>는 최근에 읽은 책이다. 김훈의 소설들은 읽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남한산성> 이후로 나는 김훈을 읽지 않았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열심히 정독한 책이 아니어서 여기에 올리는 것이 민망하다. 나는 좋은 글의 조건으로 분명한 주제의식과 쉬운 문장을 꼽는다. 최진석의 책은 주제가 분명했고, 유시민의 책은 읽기가 편했다. 유시민의 국가론을 읽으면서는 최진석의 선진화가 떠올랐고, 최진석의 선진화를 읽으면서는 김훈이 그려놓은 과거의 그때가 떠올랐다.


최진석의 선진화 논의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무릎을 치면서 읽었다. 대형재난 앞에서 매번 이어지는 땜질식 처방, 사회의식 수준에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 하면서 인물 교체와 제도 개편만을 부르짖는 현실, 직접 나서는 사람은 없고 비평가와 평론가는 넘치는 풍토, 창조 보다 모방이 더 쉽고 익숙한 사회 분위기 등 그의 진단은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진석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선진화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중진국이 되는 것보다, 그리고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수천수만 배 더 어렵다. 그것은 철학적, 예술적, 문화적, 지성적, 윤리적 차원의 과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예단하기 어렵지만, 최진석은 선진화를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대목에서는 최진석에 반대한다. 유시민이라면 우리에게 왜 선진화를 제일의 과제로 '하달'하느냐고 반발할 것 같다. 유시민은 자신에게는 자유, 평등, 복지, 평화, 환경 등의 헌법가치가 모두 같은 선상에 있다고 했다. 그 어느 가치라도 절대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지금의 선진국들도 선진화를 절대적 목표로 설정하고 노력한 끝에 선진국이 되었는가? 아니면 주어진 조건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다 보니 어느 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인가? 또 궁금하다. 철학적 사유의 수준을 전제로 한 선진화란 것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차원의 것인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룬 탓에 터져 나오는 지금의 문제들처럼,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 것인가?


10년 전 김훈의 소설은, 아니 김훈의 문장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한없이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끝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했다. 나는 김훈의 소설들을 끙끙대며 읽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건너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번민과 좌절의 시간, 조선이라는 국가가 감당해야 했던 치욕과 절망의 시간,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절대 건너뛸 수 없는 것이었다. 평화와 희망은 쉽지 않았다. 새 시대의 문이 열리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의 맺는말에서도 '후불제 민주주의'를 말한다.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우리가 혁명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남들은 피를 흘려가며 오랜 세월에 걸쳐 수립한 민주공화국을 우리는 얼떨결에 갖게 되었다. 그러니 남들이 먼저 치렀던 대가를 후불로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나는 유시민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은 선진화의 과제가 아니라 후불로 넘겨진 과제가 더 시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선진화에 대응해서 그 과제를 뭐라고 이름지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공화국을 수립해 본 적이 없는 우리가 선진화를 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제도가 아닌 의식의 차원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적이 없었던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의 시선을 갖추라는 것은 너무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내가 무릎을 치면서 읽었던 최진석의 진단, 그것은 옳다. 그런데 과연 지금 당장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인정하기 싫지만, 아직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인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수준은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는,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막상 생각을 적고 보니 우울해진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우울하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세상은 조금씩 진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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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번호 503번을 달고 있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신이 재판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당신이 받고 있는 혐의가 무엇 무엇인지, 당신과 당신 일당이 받았다는 뇌물이 모두 얼마인지, 당신이 지금도 모른다고 우기는 그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모두 몇 명인지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여럿 있다. 이 편지는 내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굳이 알려주려고 쓰는 것이다.


오바마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당신이 'poor'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국제적 망신이었다. 물론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도 그리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순발력 부족이나 세련되지 않은 말솜씨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유시민 작가가 말하길 능력 밖의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집단린치와 다름없다고 했다. 답변을 준비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고 솔직하게 말하거나, 오바마의 말이 너무도 훌륭해서 넋을 놓고 듣고 있었노라고 썰렁한 농담이라도 하지 그랬는가? 무의식중에 당신이 읊조리듯 내뱉은 말에서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를 발견했다. 당신은 "말씀을 오래 하셔갖고" 라며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겼다. 당신은 늘 그런 식이었다. 묻는다. 살면서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사고 중에서 당신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 하나라도 있는가? 아마 생각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당신에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이것은 떠오르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당신은 책임질 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대통령은 플레이어다. 한 국가를 놓고 생각할 때는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다. 그러나 당신은 임기 내내 플레이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은 언제나 평론가였고, 심판자였으며, 제3자였다. 나라꼴이 엉망이라는 한탄, 문제 일으킨 자를 색출하라는 명령, 현안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강 건너 불구경. 이것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 당신의 주된 일이었다. 당신의 무책임함은 아마 여기서 연유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 일이 아닌 일에 책임감을 느낄 만큼의 도덕성이 없을 테니까. 혹시 당신이 성형시술과 각종 주사제와 기치료에 집착한 것도 스스로 당신 일이라고 여긴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당신은 아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대통령이 된 후로 당신이 특별 기자회견도 아닌 연두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자회견을 비롯한 당신의 대국민 메시지는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거기서 당신이 말하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팬클럽 회원과 다름없었다. 당신은 국민 앞에 꼭 '지지해 주신'이나 '믿고 성원해주신'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믿고 지지하는 사람만 보고 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런 자리인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자리인가? 그렇다고 '국민행복시대' 운운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최면을 걸라는 뜻은 아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의 언어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당신 진영의 사람들의 주된 공격 포인트는 '편 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연예인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대통령님 힘내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잘도 찾아다녔다. 당신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들으면서 정녕 부끄럽지 않았는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과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을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당신의 현실감각과 판단력 부족은 여기서 비롯할 것이다. 언론에서는 태블릿 pc 보도 이후 지금까지 당신이 최악의 선택만을 해왔다고 분석한다. 웃기는 소리다. 당신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당신은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거다. 당신이 가진 선택지와 일반인들이 가진 선택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공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주권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답변을 잘 한다는 것은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며, 무엇보다 질문하는 주권자를 존중한다는 뜻이 된다. 높은 인격과 능력의 소유자인 당신이 듣기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공직자는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바로 그 내용에 관해 답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의 의무이고 숙명이다. 일선 관공서에 전화를 해보라. 당장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답은 당신의 전화번호를 메모했다가 나중에라도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답변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질문 자체를 받지 않으려 든다. 특히 세월호 참사 당일의 행적에 대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말할 뿐,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한 여성의 사생활에 대한 저급한 호기심이 아니다. 주권자가 공직자에게 업무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의 부하 중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소리를 굳이 선언까지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자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자가 국회에서 주권자를 대신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답변했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반성해 보기 바란다. 탄핵심판에서 당신의 대리인단이 헌법재판관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그리고 잘 헤아리기 바란다. 앞으로 있을 형사재판에서 당신과 당신의 변호인이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를. 제발 동문서답하지 말고 상대가 묻는 질문,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라. 그것이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이고, 조금이라도 양형에 유리한 길일 것이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당신의 표정 두 개가 있다. 먼저 세월호 참사 당일 뒤늦게 중대본에 나타난 당신의 표정이다. 백번을 양보해 늦을 수도 있다고 치자. 천번을 양보해 '구명조끼' 발언을 할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자국민의 참사를 앞에 둔 대통령의 표정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 당신의 표정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깼는데, 갑자기 선생에게 어려운 질문을 받은 학생의 표정이었다. 단순한 표정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감과 능력의 문제다. 그날 당신의 표정은 전혀 마음 아프지 않다는 것과,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 표정에도 의미가 부여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대선에 출마했던 것인지 묻고 싶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표정은 올해 초 뜬금없었던 기자간담회에서 보였던 표정이다. 블랙리스트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는 당신의 표정, 그 표정은 흡사 나쁜 짓을 하다가 현장에서 걸린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당신의 대답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어찌 기본적인 표정관리도 안 되는지, 그러면서도 뭐 하러 탄핵 중에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내가 어리석은 지도 모르겠다. 그 기자간담회 마저도 당신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 혹시 외교무대에서도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너무 무례한 것인가?


당신의 표정은 아니지만 내가 잊지 못 하는 표정이 하나 더 있다. 당신 집권 초 당신의 (외교성과가 아닌) 한복에 관한 뉴스를 전하던 모 종편채널 앵커의 표정이다. 아, 그것은 마치 걸그룹을 응원하는 삼촌팬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앵커를 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느 조직이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앵커의 표정을 만든 분위기의 근원이 당신이라고 생각한다. 비약이라고 해도 좋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컨디션이 자주 좋지 않다는 전언, 서문시장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당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전언 등 그 이상야릇한 전언들이 공식채널에서 가능했던 분위기도 당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없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마지막 이유가 이것이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 죄, 공적 시스템을 웃음거리로 만든 죄.


이제 고백할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다. 나는 예전부터 당신을 보면서 묘한 불편함을 느껴왔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닮았다는 불편함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어딘가 어색하고 수동적인 자세, 자기 의견을 확실히 밝히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리는 버릇, 위기 때마다 드러나는 판단력과 결단력의 부족,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유아적 태도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닮은 점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세상사를 대하는 제3자적 태도다. 고백하건대 나의 평론가적 비평가적 태도는 당신보다 훨씬 중증 수준이다. 나는 요즘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조직의 구성원 가운데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지는 것은 그 조직이 곧 붕괴할 조짐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적대적 공생관계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을 끊임없이 비국민으로 몰아붙이는 힘으로 권력을 유지했고, 나는 그런 당신을 비평하고 평론하는 재미로 지난 4년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을 비평하고 평론하고 있다. 지난날의 나라면 대통령과 범부는 다르다고, 나는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다고 변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은 아니지만, 주권자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통령이었던 당신이 이 지경이 되는 동안 주권자인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비극은 당신과 나의 선택지의 다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비극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당신의 개과천선을 바랐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혹시 당신이 남은 임기 동안 계속 그러하기를, 그래서 내가 당신을 마음껏 욕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도 없이 이 편지를 맺는다. 당신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변하지 않을 모양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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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고, 나의 아버지는 장애인이다. 아버지가 장애를 얻은 지 하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종종 잊을 때가 있다. 병원이나 시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장애를 뇌병변 장애라고 부른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의 장애는 인지 능력의 쇠퇴, 언어 기능의 대부분 상실, 편마비로 인한 거동 불가능이다. 몸의 움직임은 전혀 좋아지지 않지만, 인지나 언어의 측면에서는 좋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의사의 대답은 단호하다. 같다는 것이다. 짧고도 분명한 대답을 두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었는데, 내 나름의 결론은 이렇다. 아버지의 의사표현 능력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나, 그런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하는 나의 눈치는 계발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상태가 조금 좋아진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서글픈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대부분 그것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일이기에 알아듣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다. '이거 이거'로 시작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그 신호다. 대개는 아버지가 뭔가를 먹고 싶다는 뜻일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너무 쉽게 먹는 얘기를 꺼냈다가는 아버지에게 날벼락을 맞는 수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다. 먹는 거라면 이제부터 질문을 하나씩 던져 아버지로부터 '그려' 또는 '아녀'라는 대답을 들어야 한다. 집에 있는지 밖에서 사와야 하는지, 밥 먹을 때 같이 먹는지 따로 먹는지, 조리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전에 먹어본 것인지 등등.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스무고개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버지의 '그려'가 늘 'yes'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아녀' 역시 늘 'no'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에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이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버지는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기를 원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다. 아버지에게 독심술을 가르쳐달라거나, 도깨비 방망이를 사달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면서도 집요한 데가 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이 걸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입에 넣고야 만다. 짜증스럽다가도 이런 실랑이 말고 아버지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짠하기도 하다. 드라마라면 주인공이 짠한 마음을 느끼며 한 회가 끝나겠지만, 현실에서는 드라마보다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한참이 지난 후, 그런 소동이 있었지 않았냐고 내가 물으면 아버지는 고개를 젓고, 손을 내저으며 '아녀'라고 말한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환장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한 것이 아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몰라서 답답한 것이다. 내가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한 것이 아니다. 나의 이해가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답답한 것이다. 이 답답함 앞에서 나는 소통이라는 말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기로 했다. 소통은 단순히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상대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상대의 언어는 고사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이제 어려워졌다. 그런 아버지와 나 사이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순간적인 욕구의 표출과 그에 대한 대처가 있을 뿐이다. 장애인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불가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임을 전에는 몰랐었다.


불효자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소통이 불가능해졌지만, 나는 아버지가 장애를 얻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장애는 질병으로 인한 것이니, 보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팠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에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떤 접촉이 있어야 소통의 가능 여부를 확인할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아프기 전 30년 가까운 시절보다 아프고 난 후 10년 안 되는 기간 동안 함께 보낸 시간이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이 전혀 없이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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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리에서 대통령 후보들의 현수막을 보았다. 내가 본 네 개의 문구 중 가장 높은 점수는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에 주겠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지만, 지금은 변화 자체가 희망이 되는 암울한 시기이므로 최고점으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정치를 냉소의 대상에서 변화의 도구로 격상하려는 시도가 엿보여 좋았다.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은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문구였다. 앞부분은 개혁의 냄새를, 뒷부분은 안정의 냄새를 풍겼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고민은 이해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메시지도 분명하지 않고, 대구도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임팩트가 없다. '정부다운 정부, 리더다운 리더'라고 고치면 좋을 것 같다. 내가 별 걱정을 다 한다. 임팩트가 강하기로는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과 '국민이 이깁니다'가 막상막하다. 눈에 잘 들어오기는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자유대한민국은 내 조국 대한민국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부터 알쏭달쏭하다.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것일까? 국정농단 세력으로부터? 4대강의 재앙으로부터?


그리고 문제의 '국민이 이깁니다'. 오늘 잠시 동안 나를 사색에 빠지게 한 문구다. 이 문구를 내세운 후보의 소속 정당 이름에도 '국민'이 포함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국민이 어떤 경쟁에서 누구를 상대로 이긴다는 것일까?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저들이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전부가 이기는 싸움이나 경쟁은 없으니, 아마도 전국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지자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속 정당의 당원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나는 이명박의 '국민성공시대'와 박근혜의 '100% 대한민국, 국민행복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을 살고 나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거짓말이다. 전국의 모든 고3 수험생은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모든 수험생이 동시에 서울대에 합격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참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기호 3번의 말을 믿는다. 어떤 국민은 이길 것이다, 반드시. 문제는 내가 그 국민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이다. 어떤 국민이 승리할 때, 어떤 국민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 이 구조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어김없이 나와 내 이웃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왔다. 


소위 전문가들은 모든 선거는 51대 49의 싸움이라고, 중도 표심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모든 선거는 자신의 당선으로 인해 크고 작은 이익을 침해당할 수 있는 유권자를 누가 더 많이 설득하거나, 속이는 지를 겨루는 게임이라고. 나는 설득당하는 것과 속아넘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믿는다. 내가 대통령 후보라면 이런 구호로 설득하고 속일 것이다. '자살하지 않는 나라'. 참모들은 반대가 심하겠지만, 작은 글씨로 적을 문구도 몇 개 구상했다. '뇌물 공여자가 자살하지 않는 나라', '국정원 요원이 자살하지 않는 나라'도 그 중 하나다. 오늘 스산한 거리를 걸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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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 2017-04-2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민이 이긴다는 말은 안철수도 했고 문재인도 했습니다.
두사람 도우 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지 참 알 수 없네요.

책의속밖 2017-04-20 18:32   좋아요 0 | URL
당연히 그랬겠지요. 현수막을 보고 쓴 글이라 특정인을 겨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지지하는 후보 포함해서 모든 정치인은 ‘국민‘이란 말을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때 우리 유권자는 속을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