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 503번을 달고 있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신이 재판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당신이 받고 있는 혐의가 무엇 무엇인지, 당신과 당신 일당이 받았다는 뇌물이 모두 얼마인지, 당신이 지금도 모른다고 우기는 그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모두 몇 명인지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여럿 있다. 이 편지는 내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굳이 알려주려고 쓰는 것이다.
오바마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당신이 'poor'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국제적 망신이었다. 물론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도 그리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순발력 부족이나 세련되지 않은 말솜씨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유시민 작가가 말하길 능력 밖의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집단린치와 다름없다고 했다. 답변을 준비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고 솔직하게 말하거나, 오바마의 말이 너무도 훌륭해서 넋을 놓고 듣고 있었노라고 썰렁한 농담이라도 하지 그랬는가? 무의식중에 당신이 읊조리듯 내뱉은 말에서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를 발견했다. 당신은 "말씀을 오래 하셔갖고" 라며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겼다. 당신은 늘 그런 식이었다. 묻는다. 살면서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사고 중에서 당신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 하나라도 있는가? 아마 생각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당신에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이것은 떠오르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당신은 책임질 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대통령은 플레이어다. 한 국가를 놓고 생각할 때는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다. 그러나 당신은 임기 내내 플레이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은 언제나 평론가였고, 심판자였으며, 제3자였다. 나라꼴이 엉망이라는 한탄, 문제 일으킨 자를 색출하라는 명령, 현안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강 건너 불구경. 이것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 당신의 주된 일이었다. 당신의 무책임함은 아마 여기서 연유할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 일이 아닌 일에 책임감을 느낄 만큼의 도덕성이 없을 테니까. 혹시 당신이 성형시술과 각종 주사제와 기치료에 집착한 것도 스스로 당신 일이라고 여긴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당신은 아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대통령이 된 후로 당신이 특별 기자회견도 아닌 연두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자회견을 비롯한 당신의 대국민 메시지는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 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거기서 당신이 말하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팬클럽 회원과 다름없었다. 당신은 국민 앞에 꼭 '지지해 주신'이나 '믿고 성원해주신'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믿고 지지하는 사람만 보고 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런 자리인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자리인가? 그렇다고 '국민행복시대' 운운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최면을 걸라는 뜻은 아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의 언어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당신 진영의 사람들의 주된 공격 포인트는 '편 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연예인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대통령님 힘내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잘도 찾아다녔다. 당신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들으면서 정녕 부끄럽지 않았는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과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을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당신의 현실감각과 판단력 부족은 여기서 비롯할 것이다. 언론에서는 태블릿 pc 보도 이후 지금까지 당신이 최악의 선택만을 해왔다고 분석한다. 웃기는 소리다. 당신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당신은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거다. 당신이 가진 선택지와 일반인들이 가진 선택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공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주권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답변을 잘 한다는 것은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며, 무엇보다 질문하는 주권자를 존중한다는 뜻이 된다. 높은 인격과 능력의 소유자인 당신이 듣기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공직자는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바로 그 내용에 관해 답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의 의무이고 숙명이다. 일선 관공서에 전화를 해보라. 당장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답은 당신의 전화번호를 메모했다가 나중에라도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답변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질문 자체를 받지 않으려 든다. 특히 세월호 참사 당일의 행적에 대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말할 뿐,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도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한 여성의 사생활에 대한 저급한 호기심이 아니다. 주권자가 공직자에게 업무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의 부하 중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소리를 굳이 선언까지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자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자가 국회에서 주권자를 대신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어떻게 답변했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반성해 보기 바란다. 탄핵심판에서 당신의 대리인단이 헌법재판관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그리고 잘 헤아리기 바란다. 앞으로 있을 형사재판에서 당신과 당신의 변호인이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를. 제발 동문서답하지 말고 상대가 묻는 질문,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라. 그것이 조금이라도 속죄하는 길이고, 조금이라도 양형에 유리한 길일 것이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당신의 표정 두 개가 있다. 먼저 세월호 참사 당일 뒤늦게 중대본에 나타난 당신의 표정이다. 백번을 양보해 늦을 수도 있다고 치자. 천번을 양보해 '구명조끼' 발언을 할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자국민의 참사를 앞에 둔 대통령의 표정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 당신의 표정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깼는데, 갑자기 선생에게 어려운 질문을 받은 학생의 표정이었다. 단순한 표정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감과 능력의 문제다. 그날 당신의 표정은 전혀 마음 아프지 않다는 것과,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 표정에도 의미가 부여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대선에 출마했던 것인지 묻고 싶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표정은 올해 초 뜬금없었던 기자간담회에서 보였던 표정이다. 블랙리스트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는 당신의 표정, 그 표정은 흡사 나쁜 짓을 하다가 현장에서 걸린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당신의 대답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대통령으로서 어찌 기본적인 표정관리도 안 되는지, 그러면서도 뭐 하러 탄핵 중에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내가 어리석은 지도 모르겠다. 그 기자간담회 마저도 당신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 혹시 외교무대에서도 그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너무 무례한 것인가?
당신의 표정은 아니지만 내가 잊지 못 하는 표정이 하나 더 있다. 당신 집권 초 당신의 (외교성과가 아닌) 한복에 관한 뉴스를 전하던 모 종편채널 앵커의 표정이다. 아, 그것은 마치 걸그룹을 응원하는 삼촌팬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앵커를 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어느 조직이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 앵커의 표정을 만든 분위기의 근원이 당신이라고 생각한다. 비약이라고 해도 좋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컨디션이 자주 좋지 않다는 전언, 서문시장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당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전언 등 그 이상야릇한 전언들이 공식채널에서 가능했던 분위기도 당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없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마지막 이유가 이것이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 죄, 공적 시스템을 웃음거리로 만든 죄.
이제 고백할 때가 된 것 같다. 사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다. 나는 예전부터 당신을 보면서 묘한 불편함을 느껴왔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닮았다는 불편함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어딘가 어색하고 수동적인 자세, 자기 의견을 확실히 밝히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리는 버릇, 위기 때마다 드러나는 판단력과 결단력의 부족,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유아적 태도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닮은 점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세상사를 대하는 제3자적 태도다. 고백하건대 나의 평론가적 비평가적 태도는 당신보다 훨씬 중증 수준이다. 나는 요즘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조직의 구성원 가운데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지는 것은 그 조직이 곧 붕괴할 조짐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신과 나는 적대적 공생관계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을 끊임없이 비국민으로 몰아붙이는 힘으로 권력을 유지했고, 나는 그런 당신을 비평하고 평론하는 재미로 지난 4년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을 비평하고 평론하고 있다. 지난날의 나라면 대통령과 범부는 다르다고, 나는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다고 변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은 아니지만, 주권자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통령이었던 당신이 이 지경이 되는 동안 주권자인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비극은 당신과 나의 선택지의 다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비극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당신의 개과천선을 바랐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혹시 당신이 남은 임기 동안 계속 그러하기를, 그래서 내가 당신을 마음껏 욕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도 없이 이 편지를 맺는다. 당신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변하지 않을 모양이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