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의 학업도 유흥도 연애도 F학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학시절에 들인 돈과 시간이 가끔 아깝게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여행과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곤 한다. 그 외에 덤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술자리가 아닌) 술이다. 그리고 유머가 있다. 나는 화려한 언변이나 넘치는 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므로 유머가 아니라 유머에 얽힌 어쭙잖은 생각들이라고 해야 옳겠다. 물론 당시에는 몰랐던 것들이다. 이제 와 보니 그것은 나에게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봄날 오후 집중하기 어려운 수업이었다. 수업 내내 졸다가 쉬는 시간에 강의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휘청거리며 걷는데 동기가 뒤에서 한마디 한다. "운전 똑바로 안 하나?" 나는 바로 대답한다. "졸음운전이야." 동기는 나의 순발력을 칭찬했지만, 그 동기가 운전이란 말로 장난을 걸었으니, 실제로 졸렸던 나에게는 졸음운전이란 답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의 유머는 그 동기가 나를 불러주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유머의 본질이 숨어있다. 상대가 나를 불러주기 전에 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불러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상대가 나를 부르고 부르지 않고는 순전히 우연의 영역에 속한다. 유머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유머는 필연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의 매력이고, 우연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의 능력이다. 한 전직 대통령이 떠오른다. 원고를 보고 읽다가 예정된 지점에서 잠깐 멈추고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청중들의 웃음과 박수를 기다리던 모습, 그것은 유머보다는 차라리 그로테스크에 가까웠다.
첫 방학, 우연히 과방에 몇몇 동기와 선배가 모였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나와 동기들의 첫 성적표로 모아졌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한 친구의 성적이 화제가 되었다. 그 친구 성적표에 A가 하나 찍혀있다는 말이 나왔다. "나도 A가 하난데." 그렇게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선배 하나가 웃겨 죽겠단다. 그렇다. 유머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의 것이다. 어쩌면 가지지 못한 자가 유일하게 가진 것, 그것이 바로 유머일 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어느 방송 진행자가 진보 정치인들 중에는 유머러스한 사람이 눈에 띄는데, 보수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다며 보수 진영의 분발을 촉구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속으로 어려운 요구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보수 정치인들은 상대적으로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무슨 과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험을 대강 마치고 일찍 강의실을 나왔다. 곧 뒤따라 나온 박 군이 묻는다. "시험 잘 봤어?" 박 군이 그 다섯 글자를 말하는 동안 나는 박 군의 복잡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잘 봤을 리가 없다. 나 망한 것 같은데,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다. 내 표정은 이렇지만 막상 성적이 나오면 꽤 괜찮은 학점일 테니 무시하지 마라. 제발 나보다 못 봤다고 말해다오. 나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박 군을 놀려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대답했다. "너만큼 봤어." 박 군은 악담을 하라며 몹시 분해 했다. 아마도 자신의 성적과 내 성적을 비교하고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게다. 그러나 나는 분명 네가 나만큼 봤어가 아니라, 내가 너만큼 봤다고 말했다. 유머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유머를 무기로 쓸 때는 하나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자신보다 약자에게는 그 무기를 쓰지 말라는 규칙이다. 다들 알고 있는 규칙인 줄 알았는데, 가끔 그 무기가 유머라는 점을 방패삼아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유머가 아니다. 폭력일 뿐이다.
이 군과 함께 소요산을 오른 적이 있다. 꽤 높은 곳이었고, 가파른 곳이었다. 거기에 등산객을 위한 안전시설이 갖춰진 것을 보고 어떻게 이곳에 이런 것을 설치했을까 하고 이 군이 물었다. 나는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돈 주면 다 해." 이 군은 어이없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이 군의 질문과 나의 대답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렇지만 아주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유머는 서로 다르지만 통하는 것들을 연결할 때 발생한다. 이것이 유머의 또 다른 본질이다. 훗날 내가 이 군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을 때, 이 군은 내게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고, 우리는 소요산에서의 일이 떠올라 함께 웃었다. 이때의 유머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이어주었다고 하겠다. '연결' 하면 떠오르는 신이 있다. 바로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교역, 통신, 전령, 여행 등을 상징한다. 그런 그가 신화 속에서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궁금하다. 헤르메스에게 미술관에 입성한 소변기는 유머일까, 예술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식탁 위에 놓인 신발은 또 어떨까?
앞서 등장했던 박 군과 이 군, 그리고 나와 김 군, 이렇게 넷이서 강원도로 여행을 갔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오르던 중이었다. 절을 향해 올라가는 차 한 대를 보고서 이 군이 '중 차'라며 경박한 말을 내뱉기에 나는 '법거'라는 말을 쓰라며 타일렀다. 유머는 평범한 대학생을 교양인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다음날 바다를 보기 위해 우리는 강릉으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밤을 맞았는데, 숙소를 어디에 어떻게 잡아야 할 지 몰라 당황한 우리를 근처에서 군복무를 했던 김 군이 인도했다. 김 군을 쫄래쫄래 따라가며 우리는 한 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랑 모텔에 들락거렸느냐며 놀리기 시작했다. 김 군은 당황하거나 얼굴이 빨개질 녀석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약이 올라 한마디 던지려 했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유머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나는 그 한마디를 아직까지 던지지 못 하고 있다. 누구와 함께 왔었는지 다음 중에서 골라서 대답하라. 1번 아는 여자, 2번 모르는 여자, 3번 아는 남자, 4번 모르는 남자.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졌다.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지만, 내 잘못이 크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타이밍을 완전히 놓친 것만 같다. 삶은 대학시절의 술자리처럼 유머만으로 계속되지는 않았다. 정호승의 시에서 위로를 받는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늘이 없는 유머는, 눈물을 모르는 유머는, 가짜다. 이제 와 보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