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기사님의 자문.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지난 정부에서는 왜 못 했을까. 기사님의 자답. 지난 정부 놈들이 무식해서 그래. 내 대꾸가 없자 기사님은 그렇지 않으냐며 대답을 요구한다. 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없었겠지요. 다들 좋은 대학 나온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학교만 좋은 데 나오면 뭐 하나. 대가리에 똥만 차서 제 잇속 챙기기만 바쁜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내 생각과 기사님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이 끝난 지도 열흘이 넘게 지났다. 언론에서는 변화를 실감한다며 연일 호들갑인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실 비관론자에 가깝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대한민국이 순식간에 다른 나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일상이 그대로이지 않은가. 오늘 만난 택시 기사님의 일상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언론의 행태도 그대로 인 듯하다. 박근혜의 우아함과 고상함이 문재인의 소탈함과 탈 권위로, 박근혜의 한복이 문재인의 등산복으로, 박근혜의 부모가 문재인의 부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들이 퍼스트레이디 역할 운운하며 박근혜의 능력을 치켜세우던 입으로 탄핵국면에서 박근혜의 무능을 말할 때 나는 역겨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입으로 이제 새 정부를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내게 이번 대선은 두 가지 면에서 좀 특별했다. 먼저 탄핵 이후에 선거에 대한 흥미가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뉴스도 잘 보지 않았고, 대선 후보 토론회는 한 차례도 시청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찌감치 표를 줄 사람을 정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특별했던 것은 처음으로 대선에서 특정 정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한마디로 나는 이번에는 문재인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시 정권교체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내 표를 받은 이는 5위를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만족할 만한 성적표라고 생각한다.
낮에 잠시 광화문에 다녀왔다. 지금까지 내 표를 받은 유일한 대통령의 8주기 후모행사가 있었다. 국민성공시대를 견디고, 국민행복시대를 버틴 끝에 문재인 정부를 보게 되었는데, 그가 없어 아쉽다. 막판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 좀 미안하기도 하다. 뜬금없이 김어준 총수의 말이 생각났다. 이명박은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았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살풀이를 위해 권력을 잡았다는 취지의 말. 김어준다운 독설이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명박의 키워드는 '돈', 박근혜의 키워드는 '박정희'라는 말이다. 전문가들이 말하길 대선은 총선이나 지방선거와 달리 미래를 보고 하는 투표라던데, 돈과 박정희에는 미래가 없었다. 그들과 그들을 당선시킨 우리의 욕망과 집착이 있었을 뿐.
생각해 본다. 노무현의 키워드는 '시도', 문재인의 키워드는 '준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특별한 근거는 없다. 일종의 인상비평이다. 노무현의 당시 행보는 여러모로 새롭고 낯설었고, 문재인의 행보는 뭐랄까 치밀하게 계획된 프로세스를 밟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개헌을 다시 한 번 약속한 것에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다시 나의 상념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신임 대통령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일상이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리들의 일상이 어떻게 되는 지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학습을 시켜준 바 있다. 다소 욕을 먹더라도 소위 측근이라는 사람들을 불러 밥도 먹고, 술도 마셨으면 좋겠다. 부인과 더불어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었으면 좋겠다. 이 판국에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비선실세 한 사람만 만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대통령이 장차관들만 만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통령이 약물에 중독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일에 중독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상이 편안하고, 즐거운 대통령. 내가 바라는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