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배반 - 뒤집어보고, 의심하고, 결별하라
던컨 와츠 지음, 정지인 옮김, 황상민 해제 / 생각연구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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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어보고 의심하고 결별하라.

Everything is obvious.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상식이 얼마나 허술하고 엉터리인지 학문적으로 규명한 책. 물리학을 전공했다 사회학으로 돌아선 저자의 치밀한 논증이 흥미진진하다. 이 책을 읽으면 상식에 의존한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책 내용도 재미있지만 요즘 화제 인물들의 서평이 더 재미있다. 김연아에 대해 근거 없는 "쇼"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세대 황상민 교수의 해제가 마지막에 붙어있는데, 정작 이 양반은 왜 자신의 '상식'에 기초해 근거도 없는 감정적인 발언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더 재미있는 것은 유력한 대권주자 안철수의 짧은 서평이 뒷표지에 나와 있는데 "상식의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사람의 서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과연 안철수는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보긴 한 것일까? 책에서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그의 '상식'이 걱정스럽다.

"돌이켜보면,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상식'을 배반하며 살아온 것 같다.의사에서 프로그래머로,프로그래머에서 경영자로,그리고 다시 교수로...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삶이지만,의미 있고,재미있고,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왔다는 점에서 만족한다.이 책은 우리사회의 보편적 진리인 '상식'을 왜 비판적 시각으로 음미해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파헤친다.경제,문화,정치,심리,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사례를 읽다 보면 '의외로 해답은 상식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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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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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소설, 그 중에서도 엄정한 과학적 논리와 지식에 기초한 하드SF는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당대에 알려진 과학기술을 전제로 소설을 써야하는 만큼 상상력의 제약을 피할 수 없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조만간 소설 속 모든 지식이 현실의 발전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앞서가면 하드SF 본연의 과학적 엄밀성이 떨어지고 조금 앞서려 하다간 순식간에 현실도 파악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작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쓰는 사람은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쥘 베른은 당대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최고의 SF작가로 추앙받아 마땅한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어느 작품이나 당대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언제 읽어도 모던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해저2만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1869)>는 쥘 베른의 대표작으로, 왜 그가 위대한 작가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대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없는 빼어난 상상력과 사실성을 보여준다. 더불어 신비의 인물 네모선장의 독특한 캐릭터는 소설적 재미까지 더해준다.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스토리를 등장인물들의 개성있는 캐릭터로 흥미진진하게 만들어가는 솜씨 또한 과학적 상상력 못지 않게 빼어나다. 바다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좋을 상세한 묘사와 과학적 엄밀함 또한 놀랍다. 당시까지 알려진 지식에 기반해 오류가 없잖아 있지만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묘사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는 듯 사실적이다. 쥘 베른이 얼마나 해박한 과학지식의 소유자였으며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실제로 이 소설을 모티브로 "노틸러스(Nautilus)"호라는 잠수함이 여러 척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는지 알 수 있다.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 만들어졌을 때도 사람들은 주저 없이 같은 이름을 붙인 것만 보아도 이 소설이 얼마나 가치있는 작품인지 잘 알 수 있다. 우리 인류에겐 이런 소설이 필요하다. 최근엔 이런 소설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과학발전 속도를 작가들이 따라잡기 어려워 그렇지 싶다. 물론 이런 소설이 지니는 예술적 한계도 기피의 한 요인이다. SF작가라면 당대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것 못지 않게 미래를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소설 한 권 쓰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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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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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지금의 삶이 꿈꾸던 인생입니까?


뉴욕 월가의 변호사 벤 브레드포드는 누가 봐도 행복한, 아니 행복해야만 하는 남자입니다. 우월한 유전자에 부자 부모를 만나 명문대를 나오고 변호사가 되어 멋진 아내와 예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은 타협의 산물이지 스스로 치열하게 쟁취한 결과가 아닙니다. 벤은 사진가를 꿈꾸었지만 부모의 기대와 현실의 압박에 굴복해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고 계획에 없던 아이를 갖고 결혼을 하고 그저 하루하루, ‘바랐던 삶’이 아닌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늘 소설가를 꿈꾸지만 화려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도 못하는 아내 베스의 허영심 또한 벤 못지않습니다. 자신의 실패 원인을 모두 남편에게 떠넘긴 베스는 아이를 둘 낳고나선 더욱 벤을 경원합니다. 벤에겐 고가의 사진 장비를 사들이고 암실을 만들어 놓고 노는 게 그나마 아쉬움에 대한 유일한 보상입니다.


어느 날, 벤의 지루한 일상의 수면에 돌이 던져지고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아내의 외도를 눈치 챈 벤이 상대인 이웃의 삼류 사진가 게리를 찾아가는데 말다툼 끝에 흥분해 그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일순간에 행복의 모든 조건을 잃게 된 벤은 마침 게리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톨이 사진가인 걸 이용해 자신이 게리가 되기로 합니다. 치밀한 준비 끝에 시체를 자신으로 속여 사고사를 위장하고 벤은 게리가 되어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떠납니다. 광활한 자연의 한적한 몬태나주 소도시로 숨어든 벤, 아니 게리는 뜻밖에 사진가로 성공하게 되고 일약 전국적인 예술가로 부상합니다. 이제 그의 비밀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빅 픽처>는 스릴러를 빙자한 풍자소설입니다. 미국 백인 상류층의 허영과 허위를 적나라하게 까발린 소설입니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이란 게 얼마나 위태로운 모래 위의 집인지 예리하게 파헤칩니다. 이 소설은 눈에 보일 듯 생생한 묘사와 정교한 구성으로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 여피의 삶을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어 읽는 맛이 쏠쏠한데다 숨 쉴 틈 없이 사건들이 이어지는 바람에 도무지 책을 덮을 수가 없습니다. 문체도 훌륭하고 주제도 가볍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 보지 못한 길을 동경하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설령 실천에 옮긴다한들 정말 행복해질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실패와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잘못된 전제에 기반한 것이라면 삶의 조건이 어떻게 바뀌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주인공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비록 자기가 죽인 자의 삶이지만 그가 늘 꿈꿔 오던 삶이기도 합니다.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삶에 진솔하게 임했을 때 그토록 꿈꾸던 성공과 행복이 거짓말처럼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또한 ‘포기한 것들의 아픔’에 대한 보상일 뿐입니다. 그 역시 허영과 허위 위에 세워졌기에 순식간에 무너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삶을 산다고 그가 행복해질까요? 인생이란 어쩌면 영원한 고통의 바다, 고해를 헤엄치는 몸부림에 다름 아닌 걸까요? 책을 읽으며 무엇을 위해, 왜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재미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준 소설 <빅 픽처>,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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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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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힙니다. 전 이 소설이 비극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결말은 의외로 해피엔딩입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과 린튼의 엇갈린 사랑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소설 전체로 보면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소설이 반도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서 죽어 퇴장하는 캐서린이 여주인공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소설은 히스클리프란 인물을 둘러 싼 유장한 인간사를 그린 대하소설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이 최고의 로맨스 소설이라는데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애절하지 않냐고요? 애절합니다. 그렇다고 최고라곤 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많습니다. 사실 캐서린의 태도도 애매합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감정이 과연 진정한 사랑인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에밀리 브론테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분량상으로도 그렇고 대충 넘어가는 묘사도 그렇습니다.

 이 소설이 비극도 최고의 로맨스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최고의 인간드라마라는덴 이견이 없습니다. 이 소설은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사람이 선의로 한 일이 반드시 선의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듯, 악의로 한 일도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인생의 아이러니. 이 책은 아이러니로 가득 찬 인간세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언쇼가 선의로 히스클리프란 고아소년을 데려 와 자식처럼 키우지만 비극적인 결과를 만듭니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의 일념으로 언쇼가를 몰락시키고 린튼가 마저 집어삼키려 하지만 결말은 언쇼가와 린튼가의 결합과 부활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 에밀리 브론테가 이 막장드라마 같은 소설을 쓴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장한 강줄기를 닮은 인생 말입니다.

 이 소설을 자세히 읽어 보면 히스클리프를 제외한 언쇼, 린튼,캐서린에 대한 묘사는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습니다. 허탈하다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죽는 점도 그렇고 운명에 맞서지 못하는 나약한 캐릭터들도 그렇습니다. 하나 같이 밋밋한 사람들이죠.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쩌면 이 소설의 화자, 딘 아줌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에밀리 브론테가 로맨스 소설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도 나타나듯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혼인을 통한 재산권 행사에 목을 매답니다. 당연합니다.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고 조상이 남겨준 재산을 쓰며 사는 귀족들에겐 유산이 유일한 생존수단이었으니까요. 동시대 조선의 양반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가능한 이유도 바로 유산상속법 때문입니다. 장남을 위주로 한 유산상속과 여성들은 남편을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풍습이 어찌나 조선후기와 닮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지성을 가진 여성이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지키며 살기 힘들었던 시대에 나온 두 여성작가의 걸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그래서 꼭 닮았습니다. 두 작가 모두 결국 결혼하지 않았고 당시의 시대상을 고발하는 소설을 남겼습니다. 우린 그 소설들을 로맨스 소설로 잘못 읽고 있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최고의 인간드라마이자 사회고발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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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o 2019-11-1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과 다른 독특한 시각의 리뷰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이웨이 - My W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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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웨이, 2011>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동안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대작이고 상당히 공들여 만든 작품인데 흥행에 실패해 안타깝습니다. 볼거리 풍부하고 특별히 흠 잡을 구석 없는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만 관객을 설득하기엔 부족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자세히 말씀드리긴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주인공의 감정변화가 느닷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작영화들은 흔히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해 정작 스토리의 개연성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마이웨이, 2011>가 딱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13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부담이 됐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Avatar, 2009>는 러닝타임이 162분입니다. 같은 감독의 <타이타닉 Titanic,1997>은 무려 195분이나 됩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도 긴 러닝타임을 줄이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으리라 봅니다. 그런 고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길어진 이유는 볼거리를 자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드라마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Titanic,1997>의 앞부분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해저탐사 과정과 여주인공 사연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사실 직접적인 스토리에 대한 부연설명에 불과합니다. 다 잘라버리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어도 무리가 없었으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앞뒤로 할머니가 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붙여놓았던 이유는 스토리에 개연성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의 숨은 사연이 밝혀지며 감동이 배가되었습니다. 주인공들의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에 대한 감정처리도 약간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아낌없이 충분히 묘사했음은 물론입니다.


 반면, <마이웨이, 2011>는 주인공 김준식(장동건)이 라이벌이자 철천지원수 사이인 타츠오(오다기리 조)를 왜 살려주는지, 둘이 어떻게 원한을 숭고한 우정으로 승화시키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스토리가 억지스럽다곤 할 수 없지만 주인공들의 감정교환을 충분히 묘사해주지 못해 공감하기 힘들고 감동을 느끼기엔 부족합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처럼 강제규 감독도 시나리오 작가 출신입니다만 두 사람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길고 긴 러닝타임을 감수하면서까지 스토리의 개연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반면 강제규 감독은 볼거리에 치중해 허둥지둥 스토리를 건너뛰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러닝타임을 지금보다 훨씬 늘여서 준식과 타츠오의 어린시절부터 우정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에피소드를 더 첨가하여 나중에 타츠오를 살려주는 이유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우정을 나누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해 관객의 감정을 끌어냈더라면 이런 참담한 실패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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