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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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 갔을 때, 유난히 길쭉한 쌀알을 처음 봤다. 그 쌀로 지은 밥들은 바스라지는 기분이었다. 수저로 한 술 뜨면 뭉쳐져서 숟가락의 오목한 부분으로 모여 드는게 아니라, 그 중 삼분의 일은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진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내게는 김치보다는 찰 진 밥이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안남미라고도 불렀던 그쌀, 그쌀로 지은 밥 같은 느낌이었다. 이 책. 

 한 없이 산만하고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 목차가 있고, 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창 읽다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거지?"하는 질문에 거듭 맞닥뜨리게 된다.  

 커피와 오디오 기기, 음악에 푹 빠져, 이들을 즐길 수 있는 작업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연연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한 없이 미뤄 두는 나에겐 부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처럼 성실하게 살지 않는 인생을 생각할 때, 불안감에 시달린다는 저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믹스커피를 즐겨 마시고, 음악감상에는 오래전에 구입한 MP3플레이어 밖에 사용해 본 적이 없고, 듣는 음악이래야 가요 아니면 팝송밖에 없는 나에게 있어 '줄라이홀'은 별세상처럼 느껴진다. 그가 주워섬기는 커피의 종류, 커피 머신의 종류들, 오디오 기기의 명칭이며 종류들, 클래식 음반 이야기는 죄다 별세상 얘기라서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그의 관심사 만큼이나 모든 인생사를 꿰 뚫는 듯한 단락을 발견해 내기도 해 기쁘기도 하다. 가령,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 혐오, 관계 혐오, 대인 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 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뚝 떨어진 작업실에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면서 전화를 기다리는 나. 그러다 누군가 찾아오면 그 불편함과 구속감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 사람이란 내 고통의 뿌리가 닿아 있는 영원한 소재다. 당신은 안 그런가? 

-88쪽
 

 읽기 싫은데 책을 읽고 듣기 싫은데 음악을 계속 듣는다.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건만 계속 살아가는 것과 동일한 이유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불가능한 비가역적 영역이 인생에 있다. 가령 이 순간부터 내가 책 읽기와 음악 듣기를 완전히 중단한다면 이전까지의 생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럼 그다음엔 무얼 하지? 땅을 파나, 산을 타나, 주식 부동산 같은 재테크 쪽으로 눈을 돌려보나. 좋으나 싫으나 미우나 고우나 가던 길을 계속 가고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비가역이고 불가역이며 다른 말로 팔자고 숙명이다.  

-212쪽 

 이런 단락들.   

 저자의 관심사와 어느 정도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겐 너무너무 재미난 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 외에 사람들에겐 좀 지루한 책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저 두개짜리 별점은 나란 사람만의 별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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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군요! 저는 이 사람 글 중에서 클래식 음악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더랬어요. 특히 리히터 이야기에서 미친 듯이 웃었던 기억까지! (그 음반이 제게 있었는데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지요)

작업실을 지었는데, 1층이 정육점이며 `항정살이 끝내줍니다' 라는 말에 아, 예, 라고 밖에 말 못하는 심정,(조수미의 바로크 화법은 난센스 아니겠어요? 라고 말했다간 어찌될까, 상상하는 대목에서 또한번 포복절도), 조오시가 어떠요? 라고 묻는 대목. 너무너무 좋았는데 역시, 사람의 느낌은 이토록 다양해요.

비로그인 2010-01-20 10:18   좋아요 0 | URL
음, 맞아요. 저 오디오, 차, 클래식, 커피, 이런 것들을 딱 좋아하거든요. 헤헷

쓰고 나니 돈 드는 것만 좋아하는군요! 꽥!

습관 2010-01-2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르는 일들에 대한 내용이니까 답답하기만 하고,

우스운 얘길 하는것 같긴 한데, 우스운지도 모르겠고,

만약 저 세가지에 관심이 각별한 사람들에겐

너무 즐거운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