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장에 도착했을 때 현지 고참병들이 대나무 통을 끈으로 늘어뜨려 목에 걸고 있는 우리를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중 한 사람은 이제 ‘일본에는 이 정도로 물자가 없나‘ 하고 말했다. 실제 그 말대로였을 것이다. 군복만 입었지 맨주먹인 집단이었다." - P67

겐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폭력도 폭력이지만 일본군의 형식주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범령으로 불린 ‘보병수칙‘이나 ‘작전교법‘ 그리고 ‘군인훈시‘ 등을 암기해야 했다. 한 자 한 구를 원문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고참병이 군인이 지켜야 할 것이 다섯 가지, 군인시에 쓰여 있다. 말해 봐‘라고 하면 ‘예. 충절, 예의, 무용, 신의 검소 다섯 가지입니다‘라는 식으로 답하면 안 되고 원문대로 ‘하나, 군인은 충절을 다 하는 것을 본분으로 해야 한다. 하나 군인은 예의를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답해야 한다. 전투방법을 적은 보병수칙‘도 ‘사위를 경계하고‘를 ‘주위를 경계하고‘로 말하면 안 된다. 모두 형식주의였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형식을 갖추는 것뿐이었다."
"장비도 서류에서 위에 보고되어 있는 ‘숫자‘는 따지지만 서류상 형식만 갖춰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내무반에서 장비가 부족하게 되면 책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다른 중대에서 훔쳐와 ‘숫자‘를 맞추기 때문에 하여튼 도둑질이 많았다." - P71

"4월이 되고 나서 다른 중대에 일본에서 초년병들이 와서 호되게 훈련을 받았다. 우리들도 그렇지만 포로가 되기 위해 보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 P73

"군대는 ‘관공서‘인 거다. 위에서 부대를 편성하라고, 여기에 주둔해 있으라고 여러 가지 명령을 하면 서류상으로는 그대로 하지만 명령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원래 초년병 교육 때부터 명령한 것을 그대로 하지 않으면 맞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배우지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적이 공격해오면 어떻게 될까 같은 것은 나로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당시 병사의 회상록에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이판섬이나 레이테섬 등 남방전선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조차도 적이 눈앞에 닥쳐올 때까지 아무런 방어 준비도 하지 않고 주둔부대가 ‘빈둥빈둥‘하던 사례는 많다. 겐지가 놓여 있던 상황도 예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 P74

무단장에는 약 6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어서 역은 피란하려는 일본인 가족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군용열차에 ‘지방인‘(민간인에 대한 당시 군의 호칭)을 태우고 피난시킨다는 생각은 일본군에게는 없었다.
"적어도 우리들이 타고 있던 화물열차에는 피란민은 타지 않았다. 대부분의 피란민은 역에 남겨진 것 같다. 당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상상력도 없었다."
당시 만주에는 약 15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처음부터 소련의 침공이 있으면 국경 근처에서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하면서 한반도 바로 앞에서 방어하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인을 사전에 피란시키는 것은 일본인을 퇴각 시킬 때 후퇴 전술을 눈치 챌 수 있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미 전투 이전부터 일본인 보호는 사실상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 P79

"어이, 여기 사람들이 왔다‘라고 하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 돌았다. 그 사람들에게 들었더니 현지 소집된 거주 일본인은 패전 직후에 제대해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대증명서를 내줄 테니 군에 적을 두었던 사람은 출두하라는 통지가 와서 현지 경찰서 앞에 나갔더니 무장한 소련군이 베이링까지 호송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소련군에게서 이송할 인원의 규모를 지정받은 일본의 군대조직이 사람 수 확보를 위해 재소집한 것 같았다. 그들은 베이링에서 지급된 일본군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부인에게 장 좀 봐달라는 부탁을 받아 나선 김에 출두해 베이링 집결지에 끌려와 그대로 시베리아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중략)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 중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통지를 무시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적었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윗사람을 믿어 걸려들어 버렸다." - P84

열차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짊어지고 옮긴 그룹도 있었다.
"시체를 포로에게 옮기도록 한 것은 사람 숫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거다. 소련군의 수송지휘관은 화물열차에 실은 포로를 확실하게 수용소에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시체를 포함해 확실히 옮긴 뒤 수용소 소장에게 사람 숫자를 확인받고 수령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군도, 일본군도 군대는 그런 곳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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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가게가 문을 닫은 직후 도키오카는 오카야마에 징병검사를 위해 귀향했는데 거기서 결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징병관은 결핵이라서 징병검사 불합격이 된 그를 "(결핵에 걸린 것은) 당신이 충성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그는 그대로 오카야마의 본가에 머물러 있다가 1944년 여름에 죽었다. - P45

이 교사의 이야기 중에 특히 겐지의 인상에 남았던 것은 ‘신문은 하단부터 읽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언론이 통제되어 신문 지면에는 일본이나 독일의 승리라는 인상을 주는 제목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시오 선생의 충고대로‘ 읽고 있으면 다른 면이 보였다.
"국제면이 특히 그랬지만, 신문에서 큰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1편의 상단에는 독일 승리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아래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독일의 불리한 상황을 전하는 기사가 작게 나와 있었다. 기자도 그런 형태로 관심을 보도하려고 했던 것일 테다. 시오 선생은 ‘신문에 읽혀서는 안 된다. 신문의 이면을 봐라‘라고 말했다. 이 습관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 P48

후지통신기는 그렇지 않았지만 당시는 급여뿐 아니라 직원과 공원은 문조차 따로 쓰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패전 후에는 이런 ‘직공 차별‘의 철폐가 노동운동의 큰 주제가 된다. - P52

"젊은 현역병을 배용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생경험이 있는 나이 든 군대가 소집되자 화려한 벌을 해도 본인도 가족도 기뻐하지 않는다. 울면 ‘비국민‘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지만 기뻐할 이유가 없다. 주변에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송별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다." - P54

"당시는 관료나 고급군인이 아닌 서민에게는 연금제도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동안에 가능한 한 저축해 노후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랬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그런 인생설계는 전부 파탄이 났다. 아버지가 만약 그것을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홋카이도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자체가 파탄 나는 것 같은 엄청난 시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까지 인생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 P57

"나는 전쟁을 지지했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간 것이었다. 큰 전과를 올렸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는 점점 형세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깊이 생각하는 것도 몸에 배어 있지 않았고 그를 위한 정보도 없었다. 우리 일반인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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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점령지인 중국이나 일본 본토나 마찬가지였나 보네... 도대체 뭘 위한 전쟁인가...


"물건이 들어오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의 가게가 많았다. 근처에서 제대로 개점하고 있는 것은 수세미나 빗자루를 파는 잡화점 정도였다. 밖에서 외식 같은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저 가게에 물건이 들어왔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하면 모두 눈을 반짝였다." - P43

물자 궁핍도 더 심해졌다. 배급미에 보리, 쌀, 감자 등의 대용식을 더해 양을 늘렸고 염분이 있는 것을 부식으로 집어넣는다. 백미는 금지되었고 현미는 영양이 있다고 선전했지만 그대로 먹으면 배가 아프기 때문에 어느 집에서나 한 되들이 병에 현미를 넣어 막대기로 찧어서 도정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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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 193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과 불황을 거쳐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침투해 금융이나 무역의 국제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자면 도시의 중산시민층 대두를 촉진해 그 후 소비문화의 기원이 형성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농촌의 급격한 연구 유출과 도시 팽창이 동시에 생겨나고 있었다. 산업조합이나 구매조합이 대두했지만 그 배경에는 도시와 지방의 양쪽에서 빈곤과 불안정, 양극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 P18

1930년 전후부터 애국심 교육이 강화되었지만 그것도 그 뒤처럼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육칙어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데다 역대 일왕의 이름도 배웠다. 그러나 역대 일왕 이름은 4. 5대를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일장기를 향한 경례나 궁성요배(‘황거‘ 방향을 향해 머리 숙여 절하기)는 해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 P31

군수경기와 물자부족은 인플레이션을 불러 1939년 10월에는 정부가 가격 등 통제령을 공포했다. 약 10만 점의 상품에 정부가 정한 공정가격이 붙었고 업자조합에서 의견을 모아 판정의 허가를 얻은 협정가격 등이 설정되어 판매업자는 자유롭게 가격을 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유통의 정체를 불렀고, 겐지의 기억으로도 1939년 후반에는 튀김 기름이나 생선을 손에 넣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 P39

도시에서는 식료품이 부족한 반면에 운송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지방에서는 자주 특정 산물이 쌓여 있었다. 물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 통제경제가 도입되면 필연적으로 ‘연줄‘에 따른 ‘빼돌리기‘가 횡행한다. 통제를 벗어난 고가 유통을 가리키는 ‘암시‘라는 말이 1939년쯤부터 퍼져 공정가격의 동향과는 별도로 암시장 가격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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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공감... 회식때마다 피하려고 애쓴다는 것까지 다 공감...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이강고, 감홍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라고 칭송했던 죽력고의 훌륭함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지만, 이곳에서 맛본 전통 증류식 소주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코끝을 감싸는 화려한 쌀의 향기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맑은 불기운에 나는 그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 숨은 내가 회식 때마다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같은 이름이 붙어 있는 16.9도짜리 술과는 절대 겸상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오죽하면 수백 개의 수정 구슬이 은쟁반에 떨어지는 이미지가 떠올랐을까.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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