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김가게가 문을 닫은 직후 도키오카는 오카야마에 징병검사를 위해 귀향했는데 거기서 결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징병관은 결핵이라서 징병검사 불합격이 된 그를 "(결핵에 걸린 것은) 당신이 충성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그는 그대로 오카야마의 본가에 머물러 있다가 1944년 여름에 죽었다. - P45
이 교사의 이야기 중에 특히 겐지의 인상에 남았던 것은 ‘신문은 하단부터 읽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언론이 통제되어 신문 지면에는 일본이나 독일의 승리라는 인상을 주는 제목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시오 선생의 충고대로‘ 읽고 있으면 다른 면이 보였다. "국제면이 특히 그랬지만, 신문에서 큰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1편의 상단에는 독일 승리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아래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독일의 불리한 상황을 전하는 기사가 작게 나와 있었다. 기자도 그런 형태로 관심을 보도하려고 했던 것일 테다. 시오 선생은 ‘신문에 읽혀서는 안 된다. 신문의 이면을 봐라‘라고 말했다. 이 습관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 P48
후지통신기는 그렇지 않았지만 당시는 급여뿐 아니라 직원과 공원은 문조차 따로 쓰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패전 후에는 이런 ‘직공 차별‘의 철폐가 노동운동의 큰 주제가 된다. - P52
"젊은 현역병을 배용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생경험이 있는 나이 든 군대가 소집되자 화려한 벌을 해도 본인도 가족도 기뻐하지 않는다. 울면 ‘비국민‘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지만 기뻐할 이유가 없다. 주변에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송별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다." - P54
"당시는 관료나 고급군인이 아닌 서민에게는 연금제도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동안에 가능한 한 저축해 노후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랬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그런 인생설계는 전부 파탄이 났다. 아버지가 만약 그것을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홋카이도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자체가 파탄 나는 것 같은 엄청난 시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까지 인생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 P57
"나는 전쟁을 지지했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간 것이었다. 큰 전과를 올렸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는 점점 형세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깊이 생각하는 것도 몸에 배어 있지 않았고 그를 위한 정보도 없었다. 우리 일반인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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