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면서 DMB의 도서 목록이 곧바로 떠오른 건 나뿐인가...?
DMB 시리즈가 일본어판을 중역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이 시기의 ‘하야카와 포켓 미스터리‘를 번역해 출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서 중심의 작은 출판사였던 하야카와쇼보가 ‘하야카와 포켓 미스터리‘라는 시리즈 간행을 개시했다. 미키 스필레인의 가벼운 하드보일드 소설 「위대한 살인」을 시작으로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코넬 울리히의 「검은 옷을 입은 신부」,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애거사 크리스티의 「할로 저택의 비극」,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 얼 스탠리 가드너의 「기묘한 신부」, 존 딕슨 카의 「죽은 자를 깨우다」와 같은 명작과 최신작을 연이어 출간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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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폐합을 강요당한 것은 제지업계만이 아니었다. 이케지마도 말했듯이 이와 동일한 사태가 출판업계에도 생겨나, 그때까지 2214개 있던 출판사가 10분의 1로, 2000종 이상 있던 잡지도 반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게다가 이 통제의 배후에는 물자 부족뿐 아니라 시국에 반하는 의견이나 퇴폐적인 표현은 철저하게 금압하겠다는 국가의 가혹한 의사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 의사를 명확하게 표명해 보인 사건이 이른바 ‘요코하마 사건‘ 이다.
1942년, 잡지 좌담회를 가장하여 공산당이 재건 모의를 했다는 조작극으로 가이조사, 주오코론샤, 아사히신문사, 이와나미쇼텐, 니혼효론샤 등에서 90 명 가까운 편집자나 기타 관계자가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으로 네 명이 옥사한다. 그리고 <가이조〉와 〈주오코론>은 폐간된다.
(중략)
요코하마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40년에는 새롭게 내각정보국이 발족하여 종이 배급권을 일거에 장악함과 동시에 사전 검열을 통해 국가나 사회의 ‘안녕질서를 어지럽힌다‘라고 판정된 책이나 신문·잡지의 발행을 금지하고 주형이나 지형마저 몰수해버리는 언론통제 시스템이 개미가 기어 나올 틈도 없이 만들어졌다.
결국 언론이나 출판의 자유는 없었던 셈이다. - P171

이와나미쇼텐이 패전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47년 여름에 『니시다 기타로 전집』전 19권의 간행을 개시하자 출간 전야부터 그 서점 앞에 장사진이 밤새워 줄을 섰다. 출판 역사상 유명한 이 일화는, 새로운 책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허기가 얼마나 깊었던지를, 그리고 동시에 그들 안에 니시다를 그 일원으로 하는 다이쇼 교양주의의 기억이 대전을 거쳐 그대로 계속 살아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178

미소 냉전이 격화하는 세계에서는 그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가? 또한 어떠한 사회에 나는 살고 싶은가? 그 실마리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사회성이 강한 평론으로 향했다.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에 응답하는 것처럼, 단순한 대학 지식인이 아니라 강한 개성을 가진 독립적인 평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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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에 걸쳐, ‘딱딱한 책‘과 ‘부드러운 책‘을 불문하고, 낮에도 밤에도 일상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계층을 넘어 일본인의 생활 습관이 되었다. 어쩌면 그리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방향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백만 잡지와 엔본(염가판 전집)과 문고라는 새로운 출판 형태의 출현이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사람들의 독서와 직접 관련된 몇 가지 변화가 병행해서 일어났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일반 가정에 전등이 보급된 것이다. - P141

오랜 꿈을 실현한 소시민들은 기대했던 대로 자신의 서재에서 많은 명저와 차분히 교분을 나눌 수 있었을까?
동기야 어떻든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서재 생활의 꿈은 의외로 일찍 시들어버린 것 같다. 무엇보다 일이 바빴고, 읽기보다는 겨우 손에 넣은 새로운 생활과 그 미래를 보증해줄 문화적인 누름돌로서의 장서,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 P148

비록 자신은 읽지 않더라도 그들의 장서는 아들이나 딸, 나아가 손자 대에까지 계승되었고, 그 결과 가가같이 여하튼 ‘책이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 P149

노마도 이와나미도 출판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중학교나 여학교 교사를 했었다. 그 덕도 있는지 그들은 "국내외의 고전을 읽고 스스로의 품격을 고양한다"라는 교양주의적 독서의 이념에 공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독서 습관을 "몇 안 되는 서재와 연구실" 등의 "좁은 부류의 사람들"(「독서인에게 부쳐」)에서 보다 넓은 세계로 해방시키고자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즉, 엘리트적인 교양주의의 민중화 · 대중화다. 그를 위해서도 일본의 가정 집집에 동서고금의 고전이나 명작의 처소를 만들자. 바꾸어 말하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가정 도서관‘의 실현,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제공하는 엔본 전집이나 문고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 P150

결국 책장의 책들은 단순히 아버지의 장서였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세대나 시간을 넘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구성된 가정 도서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 P150

사회 각층에서, 독서를 건전한 생활을 어지럽히는 악덕의 일종이라 간주하던 종래의 관습이 그 힘을 상실해갔다.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무조건 독서를 금했던 니노미야 긴지로의 친척 아저씨나, .‘책만 읽어서 어쩌냐‘라고 꾸짖던 나카노 시게하루와 미키 기요시의 모친들 같은 사람들의 숫자가 줄고, 그를 대신하여 ‘우리의 인생에서 독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습관이다‘ 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상식이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20세기 독서‘의 기본이 되었고 지금도 아직 무언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이 새로운 상식인 것이다. - P152

1927년, 이 신작가들을 결집하여 헤이본샤에서 『현대대중문학전집』이라는 엔본 전집이 출간되었다. 전 60권. 1권 시라이교지집은 초판이 33만 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지는 권들도 잘 팔려서 그것을 계기로 ‘대중문학‘이라는 새 명칭 (시라이의 명명이라고 여겨지고 있다)이 널리 사회에 정착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중문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만 현재와는 달리 이 단계의 ‘대중문학‘이라는 말은 주로 오래된 강담본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시대소설을 의미했다. - P155

책에는 실은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하나가 상품으로서의 얼굴, 그리고 또 하나는 공공의 문화 자산으로서의 얼굴이다. 출판사는 책을 사고파는 상품으로서 생산하고, 도서관은 그 책에서 상품성을 떼어내 누구나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문화 자산으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서점에서는 돈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책도 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읽을 수 있다. 실현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얼굴의 공존을, 출판사와 도서관 쌍방이 함께 나란히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라는 20세기 독서의 기반에는, 하나는 이러한 이중성을 허용하는 관용과 대담한 제도적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 P159

소형에 가벼운 문고판이라면 몰라도 작은 활자로 소설이나 평론을 빽빽이 적어 넣은 두꺼운 엔본을 통근 전철에서 읽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관심은 ‘그만큼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나 짧은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 것‘으로 흘러갔고, 그에 대응하여 새로운 장르의 읽을거리가 등장했다.
하나는 수필, 탐방, 좌담회, 실화, 수기 등 한마디로 ‘잡문‘이라 불린 가벼운 읽을거리, 1923년에 창간된 후 이 흐름을 타고 매상을 늘렸고 이윽고 신시대의 국민 잡지라 여겨지게 된 것이 기쿠치 간이 편집한 <분게이산주>다. 그리고 또 하나 신흥 대중소설, 앞에서언급한 시대소설이나 통속소설이다. - P162

그것과 관련하여 또 하나 예를 들면, 친천히 읽기‘에서 ‘빨리 읽기‘로의 변화가 있다. 이것도 20세기에 들어 우리의 독서에 생겨난 특유한 습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찍이 메치니코프가 지적한 것처럼, 전대의 목판본에 비해 문자의 개성을 지우고 규격화한 활판인쇄본은 압도적으로 읽기가 쉽다. 거기에다 구독점이나 후리가나의 채용, 글자 수 맞추기나 행간의 궁리, 환자서체의 세련화, 인쇄 기술의 향상과 같은 혁신이 겹쳐져 읽기 쉬운 책이 한층 더 읽기 쉽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뿐 아니라 출판 유통이 정비되어 읽고 싶은 책을 구하기 쉽게 되었고, 전기 보급 덕분에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읽기‘에서 ‘빨리 읽기‘로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러한 근대화 과정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빨리 읽기‘는 바로 ‘다독‘으로 이어진다. 소수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그것이 전대의 독서의 기본적인 자세였지만, 그것이 출판 근대화 이후에는 대량생산된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읽는 것으로 바뀐다. 그 변화가 결정적이었던 것이, 대략 말해서, 역시 교양주의 독서의 시대였던 것이다. - P163

과거의 유교적인 ‘수양‘의 시대라면 한권의 책을 경전처럼 반복해서 읽으면 된다. 그러나 ‘세계인‘이 되려고 하는 현대인의 지적 · 윤리적 기초가 되는 ‘교양‘이 되면 그렇게만 할 수는 없다. 미키뿐 아니라, "동서고금에 걸쳐" 대량의 책을 읽는 것은 교양주의적 독서에서는 필수적인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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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하자면 독서 사회의 한복판에 ‘대중‘이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등장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20세기를 독서의 황금시대로 만든 최대의 사건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118

근현대에 이르면 책을 읽는 우리 안에 어느새인가 또 하나 다른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혼자서, 그러나 다른 장소에 있는 미지의 타인들과 함께 읽고 있다.
라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책을 사든 도서관에서 빌리는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나 열의만 있으면 누구나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실제로 읽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툼한 역사서나 사상사든 그때그때의 베스트셀러는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나 말고도 계층이나 지역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고 있을 것‘이라는 의식이 생겨난다. - P118

‘혼자서 읽는다‘ 라는 의식이 개인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면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읽는다‘ 라는 또 하나의 의식은 오랜 역사끝에 20세기가 되어 비로소 실현된 독서의 평등화라는 국면과 대응하고 있다.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평등화를 현실화한 요인의 첫째는 메이지 정부가 국책으로서 강력하게 추진한 문해 교육일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읽고 쓰는 능력의 향상으로 가속도가 붙어 확대된 독자층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책을 만들고(책의 대량생산), 그 책들을 그들 앞에 신속하게 배달하는 구조(전국적인 유통망)를 갖춘-즉,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자본주의적 산업으로서의 출판의 구조가, 이 시기에 놀랄 만한 기세로 충분히 마련되었다는 것. - P119

‘백만 잡지‘와 ‘엔본‘과 ‘문고‘라는 신종 출판 형태가 한꺼번에 출현함으로써 일본인의 독서 환경이 송두리째 변화한다. 일본의 독서 역사에서 유수의 대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25

메이지 초기가 ‘신문의 시대‘였다는 것은 이미 전술했다. 그 다음이 바로 이 ‘잡지의 시대‘ 이고, 그것을 뒤에서 밀어주는 형태로 ‘서적의 시대‘가 찾아온다.
(중략)
이 잡지의 시대‘를 일본에서 선도한 것이 하쿠분칸의 대중 종합잡지 〈다이요>다. - P125

잡지들의 다수가 대량출판 · 대량판매를 전제로 하는 대중잡지로 발간되었다. 지식층을 대상으로 <주오코론〉 〈가이조> 등의 딱딱한 종합지도 있었지만 중심은 역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중 지향의 큰 바람을 타고 선행 잡지인 <다이요>를 추월하여 모든 잡지의 독자들을 한꺼번에 모두 묶어버리고자 했던 고단샤가 새로운 대중 종합지를 창간했다. 그것이 <킹>이다. 내로라하는 ‘모든 잡지의 왕‘이다, 라고 과감하게 대대적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 P126

쇼와 시대 초기에 간행된 균일한 1엔 전집본, 그것이 엔본이다. 공무원이나 큰 회사 샐러리맨의 초임이 75엔이던 시대에, 통상 장편소설 세 권이 담긴 박스를불과 1엔이라는 저가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 이름이 생겨났다. - P129

엔본 붐을 경험함으로써 일본 사회의 독서 풍경은 급변했다. 엔본 붐 이전에 일상의 독서 재료로 존재하던 것은 신문·잡지를 제외하면 강담본뿐이었다. 그러나 엔본 붐 이후에는 동서고금의 문학 사상과 관련된 양질의 거대한 저장품이 각 계층의 바로 곁에 대량으로 축적되었다. 사람들의 독서환경은 현격히 향상되었다. (…) 엔본이라는 이름의 독서 혁명으로 초래된 것은, 강담을 대신하여 『부활』 『레미제라블』이 마을의 술집 여성이나 온천 여관 여급의 일상적인 읽을거리가 된 독서 세계였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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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신시대는 전대에 시작된 출판 산업화나 독서층 확대의 흐름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 1872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 1편의 간행이다. - P93

가령 1편의 진본과 해적판을 합하여 22만 권이라고 한다면, 일본 인구가 3500만이므로 국민 160명 중 한 명은 반드시 이 책을 읽은 사람이다. - P95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 「학문의 권장」을 읽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중심은 초판 간행 전해인 1871년의 폐번치현과 산발탈도령으로 수입과 자긍심을 완전히 박탈당한 무사(추정 200만 명)와 그 자제들이었을 것이다. 즉, 도쿠가와막부 성립 후 주자학으로 스스로를 개조하기 위해 ‘학문‘에 진력하던 사람들의 후예다. 그들의 눈에는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후쿠자와의 가르침이 ‘수신‘에서 시작하여 ‘치국 · 평천하‘에 이르는 주자학의 가르침과 겹쳐서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실직한 사무라이 (사족)들의 힘만으로 이 정도베스트셀러가 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당연히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폐지한 신시대에 야심을 불태우던 지식층 서민 (평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족이는 평민이는 이 책의 독자는 후쿠자와의 사민평등 주장에 강하게 공명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입신출세의 전범(매뉴얼)으로 파악한 사람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 P95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이것과 같은 시기에 와시 목판본에서 와시 활자본, 그리고 그다음에 양지 활자본으로의 전환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막부 말기 나가사키의 모토키 쇼조의 납활자 주조를 시작으로, 메이지 원년대부터 10년대에 걸쳐, 산업혁명기의 유럽에서 개발된 철제 인쇄기와 윤전인쇄기, 목재펄프를 이용한 제지 기술, 양식 제본술 등이 잇달아 수입되었다. - P96

메치니코프는 일본어 습득 과정에서 "글자 자체를, 글자와 글자를 이어줄 뿐인 많은 엉긴 선과 소용돌이 모양으로부터 구별하는" 데에 큰 고생을 강요당했다. 그런 탓도 있고 하여, 활판인쇄가 도입됨으로써 일본의 인쇄 문자가 외형의 명확함과 완성도를 획득하고 독서의 과정을 현저하게 용이하게 했다고 하면서 『메이지유신 회상』에서 이 변화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사조시의 연면체 글자를 때로 읽기 힘들다고 느꼈던 점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도 동일했다. - P97

「메이지 초기의 독자상」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소설을 좋아하던 그 서민들의 독서 습관을 바꾼 직접적인계기는 책이 아니라 신문 그것도 1872년에 창간한 〈도쿄니치니치신문> 등 한문조의 대신문(인텔리 대상)에 이어 그 후에창간된 <요미우리신문> <히라가나삼화신문> <가나요미신문> 등의 히라가나 중심, 후리가나가 붙은 소신문(대중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나가키 로분, 다카바타케 란센, 소메자키 노부후사(2세 슌스이) 등의 극작가가 알기 쉬운구어체로 쓴 연재물이 "여성 독자와 일반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요미우리신문>의 발행 부수가 메이지 10년대에는 2만 5000부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재물‘의 인기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회로를 독점해온 대본업자의 퇴장"을 촉진했고, 이윽고 사람들이 "매일 정량의 활자를 소화하는 습관을 체득"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리라고 마에다는 추정하고 있다.
- P99

집 바깥에서도 신문종람소나 신문회화회 등의 시설이 각지에 출현하여, 비치해둔 신문을 단골손님이 읽기도 하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마을이나 동네의 지식인이 그것을 읽어주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공동의 독서는 단순히 서민 수준에서의 읽고 쓰기 능력의 부족분을보충한다는 사회적인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음독이라는 행위가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 쌍방에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 같다. - P103

「밀회」는 19세기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단편 연작 「사냥꾼의 수기」중 한 편으로 1852년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888년에 후타바테이 시메이 (당시 24세)가 번역하여 도쿠토미 소호가 주재하던 잡지 <국민의 벗>에 발표했다. 그리고 그 400자 원고용지로 불과 20여 매의 짧은 작품이 당시 젊은 독자들에게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주게 된다. - P104

간바라 아리아케 이하의 소년들은 「밀회」 덕에 새로운 문장이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아름다움, 미묘함, 정치한 사고의 움직임 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러한 문장은 독자에게 높은 집중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을 다물고 읽을 때에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한 독서를 한 번이라도 체험하면 「미녀의 기구한 만남」을 소리 높여 읽던 부류의, 종래의 ‘공동의 독서‘가 얼마나 조잡하고 유치한 것이었던가를 뼈저리게 알게 된다. - P107

이 시기에 일본사회 각층에서 독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전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기세로 증가했다. 이 비약을 가능하게 한 최대 요인 중 하나가 문해율의 향상이다. 즉, 1879년에 발표된 교육령이 러일전쟁 후 메이지 말년에 드디어 열매를 맺었고, 일본인의 문해율이 90퍼센트에 점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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