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신시대는 전대에 시작된 출판 산업화나 독서층 확대의 흐름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이 1872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 1편의 간행이다. - P93

가령 1편의 진본과 해적판을 합하여 22만 권이라고 한다면, 일본 인구가 3500만이므로 국민 160명 중 한 명은 반드시 이 책을 읽은 사람이다. - P95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 「학문의 권장」을 읽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중심은 초판 간행 전해인 1871년의 폐번치현과 산발탈도령으로 수입과 자긍심을 완전히 박탈당한 무사(추정 200만 명)와 그 자제들이었을 것이다. 즉, 도쿠가와막부 성립 후 주자학으로 스스로를 개조하기 위해 ‘학문‘에 진력하던 사람들의 후예다. 그들의 눈에는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후쿠자와의 가르침이 ‘수신‘에서 시작하여 ‘치국 · 평천하‘에 이르는 주자학의 가르침과 겹쳐서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실직한 사무라이 (사족)들의 힘만으로 이 정도베스트셀러가 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당연히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폐지한 신시대에 야심을 불태우던 지식층 서민 (평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족이는 평민이는 이 책의 독자는 후쿠자와의 사민평등 주장에 강하게 공명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입신출세의 전범(매뉴얼)으로 파악한 사람들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 P95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이것과 같은 시기에 와시 목판본에서 와시 활자본, 그리고 그다음에 양지 활자본으로의 전환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막부 말기 나가사키의 모토키 쇼조의 납활자 주조를 시작으로, 메이지 원년대부터 10년대에 걸쳐, 산업혁명기의 유럽에서 개발된 철제 인쇄기와 윤전인쇄기, 목재펄프를 이용한 제지 기술, 양식 제본술 등이 잇달아 수입되었다. - P96

메치니코프는 일본어 습득 과정에서 "글자 자체를, 글자와 글자를 이어줄 뿐인 많은 엉긴 선과 소용돌이 모양으로부터 구별하는" 데에 큰 고생을 강요당했다. 그런 탓도 있고 하여, 활판인쇄가 도입됨으로써 일본의 인쇄 문자가 외형의 명확함과 완성도를 획득하고 독서의 과정을 현저하게 용이하게 했다고 하면서 『메이지유신 회상』에서 이 변화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사조시의 연면체 글자를 때로 읽기 힘들다고 느꼈던 점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도 동일했다. - P97

「메이지 초기의 독자상」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소설을 좋아하던 그 서민들의 독서 습관을 바꾼 직접적인계기는 책이 아니라 신문 그것도 1872년에 창간한 〈도쿄니치니치신문> 등 한문조의 대신문(인텔리 대상)에 이어 그 후에창간된 <요미우리신문> <히라가나삼화신문> <가나요미신문> 등의 히라가나 중심, 후리가나가 붙은 소신문(대중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나가키 로분, 다카바타케 란센, 소메자키 노부후사(2세 슌스이) 등의 극작가가 알기 쉬운구어체로 쓴 연재물이 "여성 독자와 일반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요미우리신문>의 발행 부수가 메이지 10년대에는 2만 5000부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재물‘의 인기가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회로를 독점해온 대본업자의 퇴장"을 촉진했고, 이윽고 사람들이 "매일 정량의 활자를 소화하는 습관을 체득"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리라고 마에다는 추정하고 있다.
- P99

집 바깥에서도 신문종람소나 신문회화회 등의 시설이 각지에 출현하여, 비치해둔 신문을 단골손님이 읽기도 하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마을이나 동네의 지식인이 그것을 읽어주는 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공동의 독서는 단순히 서민 수준에서의 읽고 쓰기 능력의 부족분을보충한다는 사회적인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음독이라는 행위가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 쌍방에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 같다. - P103

「밀회」는 19세기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단편 연작 「사냥꾼의 수기」중 한 편으로 1852년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888년에 후타바테이 시메이 (당시 24세)가 번역하여 도쿠토미 소호가 주재하던 잡지 <국민의 벗>에 발표했다. 그리고 그 400자 원고용지로 불과 20여 매의 짧은 작품이 당시 젊은 독자들에게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주게 된다. - P104

간바라 아리아케 이하의 소년들은 「밀회」 덕에 새로운 문장이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아름다움, 미묘함, 정치한 사고의 움직임 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러한 문장은 독자에게 높은 집중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을 다물고 읽을 때에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한 독서를 한 번이라도 체험하면 「미녀의 기구한 만남」을 소리 높여 읽던 부류의, 종래의 ‘공동의 독서‘가 얼마나 조잡하고 유치한 것이었던가를 뼈저리게 알게 된다. - P107

이 시기에 일본사회 각층에서 독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전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기세로 증가했다. 이 비약을 가능하게 한 최대 요인 중 하나가 문해율의 향상이다. 즉, 1879년에 발표된 교육령이 러일전쟁 후 메이지 말년에 드디어 열매를 맺었고, 일본인의 문해율이 90퍼센트에 점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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