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폐합을 강요당한 것은 제지업계만이 아니었다. 이케지마도 말했듯이 이와 동일한 사태가 출판업계에도 생겨나, 그때까지 2214개 있던 출판사가 10분의 1로, 2000종 이상 있던 잡지도 반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게다가 이 통제의 배후에는 물자 부족뿐 아니라 시국에 반하는 의견이나 퇴폐적인 표현은 철저하게 금압하겠다는 국가의 가혹한 의사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 의사를 명확하게 표명해 보인 사건이 이른바 ‘요코하마 사건‘ 이다.
1942년, 잡지 좌담회를 가장하여 공산당이 재건 모의를 했다는 조작극으로 가이조사, 주오코론샤, 아사히신문사, 이와나미쇼텐, 니혼효론샤 등에서 90 명 가까운 편집자나 기타 관계자가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으로 네 명이 옥사한다. 그리고 <가이조〉와 〈주오코론>은 폐간된다.
(중략)
요코하마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40년에는 새롭게 내각정보국이 발족하여 종이 배급권을 일거에 장악함과 동시에 사전 검열을 통해 국가나 사회의 ‘안녕질서를 어지럽힌다‘라고 판정된 책이나 신문·잡지의 발행을 금지하고 주형이나 지형마저 몰수해버리는 언론통제 시스템이 개미가 기어 나올 틈도 없이 만들어졌다.
결국 언론이나 출판의 자유는 없었던 셈이다. - P171

이와나미쇼텐이 패전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47년 여름에 『니시다 기타로 전집』전 19권의 간행을 개시하자 출간 전야부터 그 서점 앞에 장사진이 밤새워 줄을 섰다. 출판 역사상 유명한 이 일화는, 새로운 책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허기가 얼마나 깊었던지를, 그리고 동시에 그들 안에 니시다를 그 일원으로 하는 다이쇼 교양주의의 기억이 대전을 거쳐 그대로 계속 살아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178

미소 냉전이 격화하는 세계에서는 그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가? 또한 어떠한 사회에 나는 살고 싶은가? 그 실마리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사회성이 강한 평론으로 향했다.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에 응답하는 것처럼, 단순한 대학 지식인이 아니라 강한 개성을 가진 독립적인 평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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