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창문은 최대한 활짝 밀어젖히면서 정치의 창문은 완전히 닫거나 최대한 닫아걸려고 노력한다. 문화는 반쯤 열려 있어 때로는 열렸다가 때로는 닫히는 창문의 빛과 그림자 아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가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리고 문학, 즉 작가들의 글쓰기는 바로 이런 위치에 멈춰서 있다. 다시 말해서 창문이 때로는 열렸다 때로는 닫히고, 빛이 때로는 밝았다 때로는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이 창문 앞에 모여 호흡하고 생존하는 사람들, 즉 14억의 중국인은 밝기와 어둡기가 일정치 않고 냉기와 열기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보니 인간의 정신과 영혼, 인성마저 항상성을 나타내지 못해 갈수록 타락하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 P169

모든 계획경제의 최종 목적은 경제 번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을 국가가 소유하고 당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다. 국유경제 (기업)라고 하는 것보다 인간의 ‘국유‘ 혹은 정신 및 영혼의 ‘당유(黨有)‘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 P169

정치는 작가들에게 불꽃과 환한 빛, 눈에 보이는 이른바 ‘긍정적 에너지‘의 현실과 존재를 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문학 자체는 작가들에게 ‘긍정 에너지‘만 쓸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 에너지가 아닌‘ 존재와 진실,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진실도 쓸 것을 요구한다. - P171

그리고 작가들은 절반은 열려 있고 절반은 닫혀 있는 이 창문 아래서 생존과 명예, 지위를 위하여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이 창문을 관리하는 사람의 휘하에서 세 가지 글쓰기 방식을 취하게 된다.

첫째는 빛을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이다. 빛을 보고 빛을 얻는 것이다. 빛을 써서 더 빛날수록 명예와 지위가 아침에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일처럼 자신의 팬과 인생을 온통 찬란한 빛으로 비춰줄 것이다.
둘째는 빛을 차용하여 쓰는 것이다. 빛을 빌려 쓰는 작가들은 전부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일정한 양심과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다. 빛을 받아들여 쓰고 싶지 않지만 내면의 예술적 감정과 심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 절반은 열려 있고 절반은 닫혀 있는 창문의 그림자 아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의 빛을 차용해서 글을 써야 한다. (중략) 그리하여 이처럼 남의 빛을 차용한 글쓰기는 어둠과 빛 사이를 떠다니면서 예술이라는 평형의 장치를 사용하여 양자 모두에게 손해가 나지 않는 문학적 이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셋째는 빛을 넘어서 곧장 어둠 속의 진실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빛을 넘으면 빛을 배반하게 되고 빛과 어둠의 주변을 오가며 글을 쓰는 대다수 작가의 인정된 글쓰기를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빛과 빛 주변의 존재는 전부 일종의 공통된 인식이라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어둠 속의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직접 가서 접촉하고 느끼며 증명해야 한다. 때문에 글을 써도 종종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공통 인식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회의와 쟁론, 비난의 대상이 된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이처럼 빛을 뛰어넘어 곧장 어둠에 다가가는 글쓰기, 밝은 창문을 벗어나 닫힌 창문 뒤로 다가가는 글쓰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좀더 큰 재능과 창조력이 필요하다. (중략) 작가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밝은 곳에서의 인간의 즐거움과 순조로움, 그리고 어둠 속에서의 몸부림과 한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절반은 닫혀 있고 절반은 열려 있는 창문의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빛과 어둠의 상호 변화, 그 빈번한 상호 변화 속에서 인간의 내면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 구체적인 상황이다. - P174

국가의 검열에 대해 작가들은 마음속으로 매우 익숙해져 있다. 아들이 폭력적인 아버지를 잘 알고 현신이 폭군의 기질을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작가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문학예술 정책을 집행하고 당을 대신하여 장악하는 구체적인 집행자들이다. - P176

문학에 대한 심사와 검열에 있어서는 범죄나 과실이 아니기 때문에 대응할 수 있는 명확한 법률 조문이 없다. 또한 변호사도 없고 검찰도 없기 때문에 범죄에 대한 변호도 없고 법원과 법관의 집행에 대한 감독도 없다. 모든 것이 집행자들의 정책 기준에 대한 감각과 파악, 양심의 깊이에 따라 결정된다. - P177

상황은 종종 집행자들이 머리에 ‘오사모‘를 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당에 충성하기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함으로써 권력을 확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탄력적인 검열의 수준을 최대한 확대하고 삼엄하게 만들어 중국식 운동과 혁명에 일관되었던 확대의 습성이 검열에서 더욱 강화되게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털을 불어 헤쳐서 상처를 찾듯이 억지로 결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중략) 검열은 검열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권력이 되기도한다. 수많은 책이 검열 과정에서 ‘관계‘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검열을 집행하는 권력이 임의로 통과될 수 없는 책을 통과시켜 출판할 수 있게 해주고 통과되어야 할 책을 통과시키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 P178

검열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권력 남용과 출판사들의 과도한 긴장이 오늘날 검열의 집행 단계에 나타나는 두 가지 가장 큰 특징이다. 출판사들은 너무 신중하여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그럴수록 검열은 더 확대된다. 권력의 남용은 중국의 모든 권력 기관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 P179

검열 집행자는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철저한 검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소리나 형태도 없이 검열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이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문학예술 정책의 제정자들이 있고 중간에는 검열 제도의 집행자들이 있으며 맨 아래층에는 출판기구의 편집자들이 있다. - P181

작가들의 자기 검열의 자각성과 본능성이 예술에 미치는 피해는 사람들이 가시적으로 파악하는 검열과 삭제, 금지의 폐해를 훨씬 초과한다. 자기 검열은 출생하기도 전에 거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에 의한 거세다. 심지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거세라고 할 수 있다. - P182

전업 작가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예술의 멀고 높음과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와 사상, 상상에 대한 관리 및 규제, 통제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이러한 장점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의 작가만이 이러한 집단적인 관리 속에서 작가로서의 글쓰기의 독립성과 문학 인격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전업 작가 제도의 가장 큰 폐단 가운데 하나는 작가들로 하여금타성에 빠져 창조성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 내에서 전업 작가들은 지금까지의 국유화와 당유화, ‘큰솥 밥‘처럼 노동을 하든 안 하든 보수가 같고 창조를 하든 안 하든 같은 결과를 맞게 된다. - P183

전업 작가의 두 번째 폐단은 작가들이 글쓰기의 개성을 상실하여 쉽게 집단화되고 국유화된다는 것이다. - P184

작가들이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을 바란다면 반드시 전업 작가의 대오에 들어가야 한다. 전업 작가의 대오에 들어가면 반드시 사상의 깊은 곳이 집단화되고 당유화되며 국유화되어야 한다. 또한 글쓰기에 대한 국가의 모든 정책과 권력의 규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출판에 임해야 하고 이러한 출판은 수십 년 동안 양성해온 독자들의 가치관을 반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개체에서 집단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로써 문학의 국유화와 당유화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대단히 통속적이고 효과적인 연계이자 체제의 가장 효과적인 사상 관리의 사슬이 된다. 작가가 이런 사슬의 한 고리 또는 마디가 되면 그의 문학관과 세계관 내지 인생관과 가치관이 독립성과 개성을 상실하게 되고 집단과 국가의 글쓰기 이데올로기만 남게 된다. - P186

전업 작가 제도의 세 번째 폐단은 작가들로 하여금 자아를 잃고 독립적 인격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작가의 업무는 글을 쓰는 것이고 언행은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회사는 중국의 위에서 아래까지의 모든 작가협회 조직이고 사장은 인민을 대표하며 이끄는 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체제 안에서 조직이 작가를 양성하고 키워주면 작가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글쓰기와 자기 상상의 궤적 및 역동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직을 위해 일을 하고 글을 쓰고 복무하게 된다. - P187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작가협회의 근본적인 목적은 수많은 특수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작가를 ‘당의 작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중략) 중국작가협회의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고 방법만 변할 뿐이다. 강제성과 압박성, 학생들에 대한 억지 주입식 교육 같은 정치적 주입으로 유도와 교육, 회의와 학습을 통해 전통적 방식인 명예와 수상, 문학예술 가치의 훈육과 양성 등의 방식으로 ‘당의 작가‘가 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작가들에게 ‘순수한 예술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인격의 독립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아닌 일종의 타협의 방법으로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 P188

오늘날 중국 작가들 가운데 중·노년층의 80퍼센트는 모두 이런 전업 작가 대오에 속해 있다. 1980, 1990년대에 출생한 작가들에 대해서도 중국작가협회는 회원제로의 흡수와 정기 회의(전국작가대표대회나 청년작가창작대표대회), 평가 및 장려 제도(마오둔문학상이나 루쉰문학상 등) 등의 표창 및 수상 방식을 통해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과 새로 등장하는 인터넷 작가들을 흡수하여 당을 중심으로 ‘단결‘시키고, 더 나아가 동화시키거나 양성하고 변화시킨다. 우선은 이런 대오의 일원이 되게 한 다음, 점차 독립된 인격이 없는 문학의 가치 판단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작가들의 글쓰기에서 독립과 자유, 사상을 상실하게 하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 P189

문화대혁명처럼 철두철미한 극좌의 독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민주와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고 부분적이며 가변적인 정치 개방과 경제의 시장화, 정치의 폐쇄화 등의 이중 모순을 보이고 있는 환경에서 작가들은 독립적 사유와 상상의 가능성을 갖추고 있고 동시에 거대한 정체성의 장애 및 유혹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작가는 나름의 대응 방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순종과 호응으로 이익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문학과 재능을 명예와 지위, 물질적 이익의 교환 조건으로 삼는 셈이다. (중략)
두 번째 방법은 거리 두기와 도피다. 이는 대단히 숭고하고 가치있는 글쓰기 전략으로서 "나의 모든 것은 문학 자체를 위한 것이다"라는 숭고한 신념의 발현이기도 하다. 문학을 상아탑‘의 부속물로

여기거나 혹은 ‘상아탑‘의 명예로 주류와 권력, 복잡한 사회의 온갖 어지러운 현상에서 이탈하여 혼자 서재 안이나 무릉도원에서 조용하고 한적한 마음으로 산보하는 것, 문학을 귀삼아, 장자의 출세를 이유와 근거로 삼아 맑고 조용한 생활과 글쓰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중략)
세 번째 방법은 문학에서는 독립된 사유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독립 인격을 갖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은 과감하게 인간의 경과 현실을 직시하고 용감하게 글쓰기에 임하며 현실 속에서 문학의 존재를 직시하고 용감하게 문학 속에서의 인간과 현실적 존재를 직시한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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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가지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열 가지, 스무 가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면 그 사건들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듣기 힘들고 괴상한 일들이 매달 매주, 거의 매일 한 지역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이런 사건들 자체의 구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이 땅, 이 땅의 현실에 아무도 파악 못 하고 치료할 수도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P145

사람들은 대도시나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돈과 허망함과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바삐 돌아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어둠의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여 미끄러져가고 있다. 죽음을 향한 질주이자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전부 죽은 영혼들인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마주하여, 팽창되고 왜곡된 현실과 부조리, 불가사의한 어둠, 엽기적인 진실을 마주하여 문학적 상상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작가들은 빠르게 발전하고 변형되는 인심 및 생활에 대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파악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 P146

오늘날 중국의 현실과 현실 속의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풍자, 폭로는 하나같이 연민과 사랑, 뜨거운 열정을 담은 포옹과는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같이 매우 단순하고 편파적이며 일부를 전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좀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시각으로 얘기하자면 오늘날 중국의 수많은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복잡한 현실 파악 능력을 상실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현실과 현실 속의 사람들에 대해 알맞은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유지가 진정한 난제인 것이다. - P149

작가들에게 아무런 권력도 없고 이런 단어를 ‘1989년 6월 4일‘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지도 못해 ‘1990년에서 한 해 모자라는 해의 5월 35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글쓰기의 독립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해 약소함과 안전감으로 위안과 만족을 얻는것은 아Q가 마음속으로만 욕을 내뱉으면서 이를 사회와 적에 대한 반항과 반격으로 여겼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나는 슬픔과 고통을 통감한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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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시종 금지가 곧 예술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서가 때로는 용기와 두려움 없는 태도, 그리고 지나친 외부의 견제를 의미할 수는 있지만 예술의 유일한 법문이 되지는 못한다. - P109

오늘날, 중국으로 말하자면 거의 매년 몇권 혹은 몇십 권의 책이 검열을 통해 출판이 금지되고 있다. 이에대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런 출판 제도와 검열을 싫어하면서 이런 검열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여러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 이런 작품들의 검열과 금지 때문에 좋은 작품이라는 월계관을 그 작품의 지위에 내려놓거나 그 작가의 머리 위에 씌워주지도 못한다. - P111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금지와 논쟁이 중국 검열 제도의 치욕인 동시에 중국에 대한 서양의 절실한 관심의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지와 쟁론이 예술적 성취도가 높은 훌륭한 작품의 척도나 기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몇 년 전에 중국의 한 작가가 인민폐 10만 위안(한화 약1700만 원)을 중국의 출판 기구에 뇌물로 주면서 자신의 소설에 금지와 비판의 조치가 내려지게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이 우스운 사건이야말로 금지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단초가 되는 것이지 결코 예술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님을 잘 설명해준다. - P112

내 작품을 평가할 때, 나는 독자들이 나를 ‘가장 많은 쟁론의 대상이 되고‘ ‘금서가 가장 많은‘ 작가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작가로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요컨대 내 일생의 노력은 좋은 작품을 써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금서가 가장 많고 쟁론의 대상이 가장 많이 되는‘ 작가가 아니라 좋은 작가가 되기를 원한다. - P113

나는 현재 중국의 정치환경과 문화 생태, 그리고 현실의 속박 안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일생의 글쓰기가 내용에서 형식에 이르기까지 금지된 적은 없더라도 질책과 쟁론의 대상조차 되어본 적이 없다면 이는 대단히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 P115

금지당하고 비판받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니다. 금지와 비판이 좋은 작품을 써냈다는 것을 증명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복잡하고 잔혹한 현실 상황에서 금지와 비판이 가장 예술적임을 의미하진 않지만 적어도 존경의 근거를 증명하기는 한다. 금지와 비판은 적어도 작가의 인성이 용기와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평생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반만 열려 있는 창문으로 갑자기 열렸다 갑자기 닫히는 바람 같은 정치 환경에 처해 있었다면 평생의 명예와 수상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가련하고 슬픈 일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 P116

글쓰기의 신념이 울타리 밖의 자유로 통하는 길을 쟁취하기 위한 위치에 맞춰져 있어야지 스스로 마음대로 울타리를 드나들 수 있는 축신술의 이상에 맞춰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들의 글쓰기 신념은 울타리 문에 구멍을 뚫는 것이어야지 몸집을 줄여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울타리 문을 열다가 죽을지언정 몸집을 줄여 드나들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눈으로 보고 있어야 한다. 눈으로 볼 수도 없다면 그 반쯤 열린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바람과 문틈 밖을 오가는 발걸음 소리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수도 없다면 우리는 머리와 몸으로 울타리 담장을 들이받는 양이나 울타리 문의 자유로운 통행을 쟁취하기 위해 행동하고 희생하는 양들에게 말없이 존경과 지지의 마음이 담긴 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 P119

한 가지 생략된 문제는 작가들이 문학을 통해 탐구가 허락되지 않은 현실과 역사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할 때, 종종 정직함과 용기에 좌우되어 사실의 진상이 주재자가 되어 모든 것을 압도하고 팽창되어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내면의 걱정이 예술의 필요성을 덮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진실이 곧 예술은 아니라는 상식과 이치를 무시하게 된다. - P121

중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사망한 사람은 2000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중국 문학에는 서양처럼 전쟁과 생명 전체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이 거의 없고 전쟁에서 사라진 평민을 그린 감동과 슬픔으로 가득한 작품도 하나 없다. 거의 모든 예술작품이 당파와 전쟁 영웅에 대한 가공송덕이다. - P122

중국의 일류 작가, 가장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창조력을 갖춘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사회에서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회하여 돌아갈지언정 허락되지 않은 역사와 현실, 진실과 진상을 건드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똑똑하고 지혜롭다. 그들은 대부분 ‘조직 내부‘의 행렬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고, 이처럼 양심과 용기를 가진 작가들은 뛰어난 예지와 창조력, 그리고 문학예술에 대한 인지력 때문에 예술에 있어서 혹은 예술 자체로부터 그 무겁고 거대한 진실과역사를 진정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된다. - P123

최종적으로 작가가 쓴 작품의 의미를 평가하는 기준은 인간과 인류의 감정 및 사물의 기억을 연장했는지의 여부가 된다. 문학작품이 연장한 기억은 인류에게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작가들과 현재의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강줄기와 시간, 미래를 결정한다. - P124

이러한 양심과 지성을 갖춘 작가들이 그저 정직과 양심에만 의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양심과 지성 외에 작가들에게는 좀더 높은 예술적 추구와 창조력이 있어야 한다. - P126

 오늘날 중국에서 ‘즐겁게 죽는 것‘은 허용되지만 현실을 마음대로 사유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돈을 신앙으로 삼는 것은 허용하고 미친 듯한 배금주의를 성스러운 높이까지 올려놓지만 신앙에 대한 선택과 경건함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문학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허용‘ ‘불허‘의 구별과 맞닥뜨리게 된다. ‘독자 지상주의‘와 ‘시장 제일주의‘ ‘환락 만세‘ ‘순수예술‘을 선택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예술의 진실한 탐구‘와 현실 속 ‘영혼에 대한 문학의 끊임없는 질의‘는 허용되지 않는다. 칭송은 높이 평가하지만 질의는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태도와 세력을 조성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통제 속에서 복잡하고 풍부한 현실을 거의 모든 사람이 수용하는 글쓰기와 수많은 사람이 침을 뱉는 글쓰기로 분류하는 것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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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중국의 작가와 독자들에게 살아 있으면서도 혁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은 ‘본질적‘이고 ‘본원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숭고하고 피곤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 P87

중국이라는 오래된 땅은 줄곧 성과 성애에 대해 늦가을의 매미처럼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몹시 갈구하고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한편으로는 예로부터 "배가 부르면 음욕을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애를 화의 근원으로 간주해왔다. 그래서 『롤리타』는 상당 기간 동안 ‘엄숙 문학(정통 문학)‘으로 간주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인은 오랫동안 정치적 억압에 시달렸고 온갖 거짓말과 유언비어에 속아왔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금서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취향이 세계의 모든 문학상을 초월했다. - P96

이 ‘거친 아이‘는 문학적 의미에서 볼 때는 일종의 ‘해방된 독립이자 창조‘라고 할 수 있고 사회학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문학에서 발양된 미국의 ‘자유 정신‘이자 인간의 독립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거친 아이‘라는 문학의 공동 형상이 중국에서 그토록 위력을 떨치면서 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역사 및 현실이 이러한 문학적 야성과 현실에서의 인간의 자유를 크게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친 아이‘의 자유 생활과 자유 생존, 분투하여 자유를 쟁취하는 것 내지 자유를 타락시키는 것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중국인, 즉 독자들의 ‘거친‘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결합시켰다고 할수 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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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현실을 마주하고 작가가 국가 및 권력을 마주하고 있을 때, 문학과 작가의 비천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늘날의 중국에서 작가와 문학이 정말로 먼지 속으로 들어가서도 숭고함을 느낄 수 있고 사회 발전과 함께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까? - P60

중국 문학은 세계에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중국 이야기를 써내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비친함을 느끼지 못하고, 독특하며 유일무이한 다른 인류의 중국식 시대에 처해 있으면서도 과거 루쉰이 당시의 중국인인 ‘아Q‘를 써냈던 것처럼 오로지 오늘날의 다른 인류인 중국인을 써내지 못한 데 대해 마땅히 느껴야 하는 자괴감을 느끼지 못한다. 문학이 바로 ‘다른 중국‘의 비천한 시대에 처해 있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가 그 안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 P69

문학의 비천함은 ‘다른 중국‘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좀더 다른 예술의 힘, 혹은 영생하는 작가와 문학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의 중국, 즉 ‘다른 중국‘과 ‘다른 시대‘에는 작가가 비천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비천함을 위해 글을 쓰며, 글을 쓸수록 더 비천해지고 비천해질수록 더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사정은 이렇다. 문학은 비천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비천함은 문학예술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다른 중국‘의 비천함을 자각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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