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 정부의 문제 중 하나는 애초 메이지 헌법을 다시 쓰는 작업에 참여한 일본의 법학자들이 프러시아의 법률 전통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프러시아에서는 법을 시민이 통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명확히 하는 수단으로 본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일본의 본질로 여겨지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위계질서라는 것은 무정부주의와 야만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이들의 사상적 공간에서 신성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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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사람 검사 - 드라마가 아닌 현실 검사로 살아가기
서아람 외 지음 / 라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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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사람 검사‘라기보단 ‘여자 엄마 검사‘라는 제목이 떠올랐던 책... 검사로서의 경험 부분은 흥미롭게 읽었고, 엄마로서의 이야기들은 읽으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역시 일하면서 애 낳아 키우는 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을 재차 다지게 된 책이다.(이런 효과를 의도하진 않으셨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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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표면적인 목표는 달성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진짜 동기였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완전히 통제하고자 했던 이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개전의 이유는, 식민주의를 끝내고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몰아내는 것이었다.
(중략)
도쿠가와 때의 쇄국으로부터 1945년의 절박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외국으로부터 사상적.군사적.경제적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고자 했던 일본 역사의 궤적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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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거나 혹은 석간신문만 잠깐 봐도 알 수 있듯이, 증오와 히스테리, 추하고 비열한 민족주의 또는 근대라는 이름을 빌려 등장한 온갖 괴물이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전유물은 아니다. 괴물들은 근대화 과정을 겪었던 모든 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나타냈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에서 유난히 정치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은, 일본에서는 정치적 현실과 그 현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던 ‘허구‘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간극은 물론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빼고는 어디든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이 중 후자는 부분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이나 이타가키와 같은 사람의 대의정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지만, 더 큰 동력은 일본에 대한서양의 기대로부터 나왔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마땅히 의회와 법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라면 고기를 먹고 남녀 혼탕을 삼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한다고 서양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했다. - P149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이런 무책임의 정치는 승리할 전망이 없는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 뛰어든다든가, 일본보다 열 배는 더 큰 산업 기반을 가진 열강을 향해 침공을 감행한 데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상황, 즉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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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무라이들이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이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면서 사무라이들의 기풍은 역설적으로, 상관에 대한 절대적 복종, 어떠한 명령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는 자세, 나약함과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경멸 등을 강조하며 점점 더 완고하게 군대식으로 변해갔다. 특히 마지막 항목은 정치적으로도 유용했는데, 사무라이 계급의 경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첫 한 세기 반 동안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쌀로 지급되는 고정 급료에 묶여 있던 사무라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자신들보다 신분이 빛은 사람들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대부분 가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무라이는 신분의 우월성에만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 P101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일굴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검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 (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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