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면 이렇게 일할 리가 없다‘는 노인들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심지어 본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노인들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또는 가장하며 그것에 기대어 마을 간부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한다. 전통을 무시하고 마을의 공동 재산에 손을 대고 선출과정도 불분명했던 마을 지도자들은 정당성이 없으므로 노인들이 신뢰하는 그 국가라면, 이런 지도자들이 벌이는 일을 승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 P30

노인들은 간부로 대표되는 정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해 질의를 던지며, 그들의 ‘부패‘를 자신들의, 그리고 다이족의 ‘깨끗함‘과 대비시킨다. 이 깨끗함은 두 가지 면에서 이야기된다. 하나는 일에서의 청렴과 순수이고, 다른 하나는 깨끗한 공간의 의미다. - P34

과거 대가족 시대에는 조부모가 손주를 돌봐주고 자식이 부모를 부양함으로써 가족 내의 수직적 ‘교환‘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 관계가 소위 합리적 가부장제의 한 측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족이 여러 곳에흩어져 사는 상황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리기보다 부모가(손주를 돌보지 않는 대신) 용돈을 주는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 P62

김형은 "전도된 계급"의 한 사례였다. 김형은 딸이 청소년기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김형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두목의 주먹은 정의였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철창행이다. 김형에게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삶은 분투와 정당한 노력의 결과였다. - P64

40대 초반의 남성, 부모에게는 자식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딸에게는 아버지이고 처가에는 사위이고 회사에서는 부대표다. 고향에 있을 때는 밑바닥에서 살았고 바다 건너 도쿄에서는 학부를 다녔고 상하이에서는 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 소싯적 그가 존경했던 사람은 주먹으로 정의를 구현하고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현재 그는 자신이 이루어낸 것을 혹시 모를 또 다른 ‘주먹‘들로부터 지켜야 한다. 그렇다. 김형에게있어 가까운 그때는 틀리고 미래를 향한 지금은 맞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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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방대함과 인구의 다양성을 고려했을 때, ‘민간중국‘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조각보를 깁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96배에 달하는 면적에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인구는 14억이 넘고,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민족이 1억 명을 훨씬 넘는데도 ‘소수민족‘이라 불리고, 이들 소수민족의 자치가 시행되는 지역이 나라 면적의 64퍼센트가 넘는다. 국경 너머 제 민족이 독립된 국민국가를 갖추고 있어 주류 민족인 한족과 불화를 빚기도 하지만, 어떤 소수민족은 이 영토적 긴장을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할 기회로 삼기도 한다. - P9

과거 유럽처럼 해외 식민지에 내부 모순을 전가하는 게 불기능한 상황에서 농촌을 원시적 축적에 따른 비용을 감내할 "저렴한 자연"으로 만들고, 도농 이원구조를 제도화해서 도시와 농촌 주민 간 호적의 차이를 사회 신분의 차이로 만든 장본인이 중국 국가다. 이 농민의 ‘탈빈곤‘을 시진핑 정권의 핵심 목표로 삼으면서 대대적인 빈곤 퇴치 사업을 벌이고, 민간 기업의 참여를 부추기면서 단기간에 극빈층 규모를 줄이는 데 앞장선 장본인 역시 중국 국가다. 신중국 성립 초기에 토지개혁과 혼인법을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미혼녀, 이혼녀, 과부에게 자기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부여한 주체 도, 197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계획생육 정책을 시행하여 여성의 몸에 대해 집요한 지배력을 행사한 주체도 중국 국가다. 민생과 민본을 강조하며 인민으로부터의 인정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지만, 동시에 누가 ‘인민‘의 자격을 갖는가를 가름하는 심판자도 중국 국가다.
- P11

사회란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통일된 유기체가 아니라 복수의 세계들을 새롭게 연결해내는 움직임 그 자체다. 그런 면에서 사회를 궁극적으로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점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우리의 상상을 심각하게 제약한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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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미디어가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눈앞에 ‘물질로서의 책=그 최고 형태로서의 종이책‘과 ‘물질이 아닌 책=전자책‘ 이라는 두 갈래 방향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그 역사적인 분기의 장에 맞닥뜨렸다.
종이책에는 할 수 있는 것(예를 들면 물리적 고정)도 할 수 없는 것(예를 들면 멀티미디어화나 인터넷 유통)도 있고, 그러한 점은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무언가 하나의 기준으로 종이책과 전자책의 우열을 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공존밖에 없다. 여태까지는 한줄기 길이었던 책의 역사가 두 방향으로 나뉘어, 각각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함께 가진 두 종류의 책이, 부분적으로 상호 중첩되면서도 별도의 영역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복잡한 공존 관계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26

2004년, 구글사는 구글 프린트 (현재의 구글 북스)라는 새 프로젝트를 발족해 세계 각지의 대학 도서관이나 공립 중앙 도서관과 손을 잡고, 여태까지 출판된 종이책 전부를 디지털 스캔해서, 그로부터 작성한 전자책을 전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대사업에 착수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그 옛날부터 많은 도서관인이 ‘전 세계의 책을 한곳에 모은 거대 도서관‘ 이라는 꿈을 허무하게 좇아왔다. 그 ‘전 세계 도서관‘의 꿈을 지금은 구글이라는 글로벌 기업이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을 투입하여 일거에 현실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P231

훌륭한 구호 뒤꼍에 그들을 여기까지 밀어붙여 움직이게 한 것은 결국, 종이책이라는 형식으로 보존되어온 인류의 지적 자산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째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어 그것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고 글로벌한 정보 권력을 장악하려는 욕망뿐이었던 것이다. - P231

저명한 서적사가인 로버트 단턴이 하버드대학 도서관의 관장으로 선출되어 구글 북스 계획의 제휴 상대인 구글사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거기서 그는, 이 회사에는 변호사나 기술자가 수천 명이나 있다고 하는데 한 명의 서지학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패한다‘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 P235

독서의 황금시대로서의 20세기가 실은 줄곧 안정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혁명의 충격으로 종이책이 처음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처럼 아주 심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차페크에 따르면 이미 전세기의 1920년대, 독서의 황금시대가 그 전성기에 들어서려고 하던 무렵 영화의 성숙 때문에 그 자신을 포함하여 책을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재빨리, 그 위기를 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하나 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동시에 이 위기가 사람들이 종이책의 힘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 P239

마이니치 신문사가 패전 후 계속해온 독서 조사에 따르면 근년에는 "요즘의 젊은이들은 조금도 책을 읽지 않는다"라고 탄식하는 노인들이 젊은이 이상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도 ‘젊은이들‘ 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년, 고령층을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점차 책을 읽지 않는 가운데 그들도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듯하다.
- P241

일반적으로 말하면 패전 전부터 이어져 오는 교양주의적 · 권위주의적 ‘독서의 계단.‘의 질서가 드디어 이 단계가 되어 거의 완전하게 붕괴된 것이다. 기다 겐에서 시바타 모토유키, 이케자와 나쓰키까지, 전술한 사람들의 작업도 아마 이 붕괴 현상에 진지하게 대처하려던 데에서 시작되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 독서가 이기고 인텔리 독서가 패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인텔리가 인텔리라는 것의 오랜 구속으로부터, 그리고 대중이 대중이라는 것의 마찬가지로 오랜 구속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이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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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황금시대로서의 20세기는 동시에 이 시청각미디어들이 보급되고 눈부시게 성숙한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 (즉, 책의 최고 형태로서의 현재의 활자본)은 머지않아 이 새로운미디어, 특히 영화에 추월당해버리지 않을까? 그러한 불안이 실은 그 이전 20세기 전반부터 조금씩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TV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위기감이 한층 더 깊어져갔다. - P199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책이 다른 미디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압도적인 우위성이 조금씩 의문시됨과 동시에 저급문화low culture와 고급문화 high culture를 구분하는 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나 대중의 독서를 도스토옙스키나 파스칼을 읽는 것보다 한참 하위에 두는, 처음부터 그렇게 단정하고 의심하지 않는 교양주의적 ‘책의 계단‘의 질서도 서서히 무너져갈 수밖에 없다. - P201

196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일본의 소비사회화가 일거에 진행된 것이다.
그렇게 갓 태어난 새로운 사회에 쇼핑을 좋아하는 젊은이 무리가 패전 후 처음으로 그 모습을 거리에 드러냈다. 그것이 단카이 세대다. 만화 잡지든 무엇이든 그들은 이미 신간을 읽고 버리는 소비재로 다루는 습성을 익히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까지 책 시장에는 매력적인 신간이 매우 적었다. 있어도 판에 박은 듯한 책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시기가 되면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과 관계없이 간행된 책의 내용이나 형태가 다양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강요된 굶주림 때문에 책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변용되기 시작한다. - P202

고전을 중심으로 하는 ‘딱딱한‘ 문고는 한 권의 책을 장시간에 걸쳐 판매한다. 즉, 책의 생명이 길었다. 그에 비해 ‘부드러운‘ 문고는 대량의 책을 단기간에 팔아버린다. 그러므로 단명한다. 물론 잡지의 생명은 그보다 더욱 짧다. 고작 일주일 또는 한 달, 문고든 잡지든 그와 같은 단명 상품이 매장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어느샌가 독자는 분주하게 제공되는 이 상품들의 (독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서의 면을 강화해갔다. - P203

흥미로운 것은 이 출판 종수의 급증이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책과 멀어지기‘의 진행과 궤를 같이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사람의 숫자가 줄었다고 하는데 왜 출판종수는 이토록 급격히 증가한 것일까? 아니, 그전에 젊은 세대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도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 P207

신자유주의 경제의 ‘자유‘는 무잇보다도 ‘큰 정부가 기업에 강요하는 규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서관과 같은 공공사업에는 철저하게 냉랭하다.
그 냉랭함이 자치단체의 임원이나 정치가, 나중에는 주민(이용자)의 다수에게까지 공유되어, 도서관 안팎에서 어느샌가 ‘도서관에 기업의 경영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 그것은 두말없이 좋은 것이다‘라는 판단이 힘을 받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따라 도서관 예산을 대폭 축소하고 전임 도서관 직원을 파견이나 계약 사원으로 대체하여 결국에는 우리 사회에 도서관이 존재하는 의미 등을 진정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 외부 기업에 운영을 통째로 위임해버린다. 그런 턱없는 짓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개혁‘의 일환으로, 최근 도서관이 새롭게 구입하는 책 중에 차지하는 ‘부드러운 책‘의 비율이 급증하고 그 한편으로 ‘딱딱한 책‘의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 P219

과거에는 딱딱한 책‘이 월등하게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만화나 대중소설, 영화나 재즈나 유행가나 패션 등을 다루는 ‘부드러운 책‘은 그보다 훨씬 더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별은 1960년대 이후에 점차 엷어졌고, 이윽고 ‘딱딱한 책‘ 중심의 신문 서평에서도 ‘부드러운 책‘이 책으로서의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래저래 두 가지 성질의 책을 가로막는 벽이 서서히 무너지고,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쌍방을 홀가분하게 왕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독서 환경이 드디어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1990년대가 되면 이번에는 그 ‘부드러운 책‘ 이 시장의 중심에 쿵 하고 눌러앉아 ‘딱딱한 책‘은 한쪽 구석으로 내몰려버렸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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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면서 DMB의 도서 목록이 곧바로 떠오른 건 나뿐인가...?
DMB 시리즈가 일본어판을 중역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이 시기의 ‘하야카와 포켓 미스터리‘를 번역해 출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서 중심의 작은 출판사였던 하야카와쇼보가 ‘하야카와 포켓 미스터리‘라는 시리즈 간행을 개시했다. 미키 스필레인의 가벼운 하드보일드 소설 「위대한 살인」을 시작으로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코넬 울리히의 「검은 옷을 입은 신부」,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애거사 크리스티의 「할로 저택의 비극」,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 얼 스탠리 가드너의 「기묘한 신부」, 존 딕슨 카의 「죽은 자를 깨우다」와 같은 명작과 최신작을 연이어 출간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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