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황금시대로서의 20세기는 동시에 이 시청각미디어들이 보급되고 눈부시게 성숙한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 (즉, 책의 최고 형태로서의 현재의 활자본)은 머지않아 이 새로운미디어, 특히 영화에 추월당해버리지 않을까? 그러한 불안이 실은 그 이전 20세기 전반부터 조금씩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TV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위기감이 한층 더 깊어져갔다. - P199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책이 다른 미디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압도적인 우위성이 조금씩 의문시됨과 동시에 저급문화low culture와 고급문화 high culture를 구분하는 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나 대중의 독서를 도스토옙스키나 파스칼을 읽는 것보다 한참 하위에 두는, 처음부터 그렇게 단정하고 의심하지 않는 교양주의적 ‘책의 계단‘의 질서도 서서히 무너져갈 수밖에 없다. - P201
196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일본의 소비사회화가 일거에 진행된 것이다. 그렇게 갓 태어난 새로운 사회에 쇼핑을 좋아하는 젊은이 무리가 패전 후 처음으로 그 모습을 거리에 드러냈다. 그것이 단카이 세대다. 만화 잡지든 무엇이든 그들은 이미 신간을 읽고 버리는 소비재로 다루는 습성을 익히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까지 책 시장에는 매력적인 신간이 매우 적었다. 있어도 판에 박은 듯한 책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시기가 되면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과 관계없이 간행된 책의 내용이나 형태가 다양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전쟁으로 강요된 굶주림 때문에 책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변용되기 시작한다. - P202
고전을 중심으로 하는 ‘딱딱한‘ 문고는 한 권의 책을 장시간에 걸쳐 판매한다. 즉, 책의 생명이 길었다. 그에 비해 ‘부드러운‘ 문고는 대량의 책을 단기간에 팔아버린다. 그러므로 단명한다. 물론 잡지의 생명은 그보다 더욱 짧다. 고작 일주일 또는 한 달, 문고든 잡지든 그와 같은 단명 상품이 매장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어느샌가 독자는 분주하게 제공되는 이 상품들의 (독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서의 면을 강화해갔다. - P203
흥미로운 것은 이 출판 종수의 급증이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책과 멀어지기‘의 진행과 궤를 같이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사람의 숫자가 줄었다고 하는데 왜 출판종수는 이토록 급격히 증가한 것일까? 아니, 그전에 젊은 세대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도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 P207
신자유주의 경제의 ‘자유‘는 무잇보다도 ‘큰 정부가 기업에 강요하는 규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서관과 같은 공공사업에는 철저하게 냉랭하다. 그 냉랭함이 자치단체의 임원이나 정치가, 나중에는 주민(이용자)의 다수에게까지 공유되어, 도서관 안팎에서 어느샌가 ‘도서관에 기업의 경영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 그것은 두말없이 좋은 것이다‘라는 판단이 힘을 받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따라 도서관 예산을 대폭 축소하고 전임 도서관 직원을 파견이나 계약 사원으로 대체하여 결국에는 우리 사회에 도서관이 존재하는 의미 등을 진정으로 생각한 적도 없는 외부 기업에 운영을 통째로 위임해버린다. 그런 턱없는 짓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개혁‘의 일환으로, 최근 도서관이 새롭게 구입하는 책 중에 차지하는 ‘부드러운 책‘의 비율이 급증하고 그 한편으로 ‘딱딱한 책‘의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 P219
과거에는 딱딱한 책‘이 월등하게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만화나 대중소설, 영화나 재즈나 유행가나 패션 등을 다루는 ‘부드러운 책‘은 그보다 훨씬 더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별은 1960년대 이후에 점차 엷어졌고, 이윽고 ‘딱딱한 책‘ 중심의 신문 서평에서도 ‘부드러운 책‘이 책으로서의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래저래 두 가지 성질의 책을 가로막는 벽이 서서히 무너지고,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쌍방을 홀가분하게 왕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독서 환경이 드디어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일어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1990년대가 되면 이번에는 그 ‘부드러운 책‘ 이 시장의 중심에 쿵 하고 눌러앉아 ‘딱딱한 책‘은 한쪽 구석으로 내몰려버렸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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