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전쟁을 한 책임도 명확히 하지 않고 전쟁에 져도 논리적인 제도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다. 고급 군인에게는 연금을 주면서 우리들에게는 10만 엔의 국채와 은배를 준다고 한다. 그것도 낙하산 공무원이 좌지우지하는 기금 같은 걸 만들어서 말이다."
"그런 건 눈속임이라고 생각했다. 금액이 얼마 안 되더라도 패전 직후였다면 고마워했을 것이고 나라도 어려운데 줬다고 감사했을 거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돈 따위가 무슨 필요냐며 오기로라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0년 4월에 겐지는 이 위로금을 청구했다. 그 이유는 같은 수용소에 있던 한국계 중국인 전 일본군에게는 청구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와 나눠 가지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P325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전 일본군의 숫자는 여러 설이 있으나약 1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한국에 귀국한 뒤에도 ‘전 일본군 병사‘나 ‘공산주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거나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2월에는 약 500명의 한국인 억류자가 38도선을 넘어 귀국했는데 한국군의 오발사격으로 37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들은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공안경찰의 심문, 경찰의 감시, 차별이나 취업 불이익 등을 당했다. 이런 어려움은 일본 이상이었다고 한다. 한국정부의 역사 바로잡기 작업에 따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 P327

"과거에도 평생 남 밑에서 일하다 인생이 끝나는 사람은 많았지만 ‘부지런한 부자는 하늘도 못 막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정규직의 경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사용자 측의 ‘노동 윤리‘도 사라졌다. 젊은 사람들이 불쌍하다."
"내가 스무 살 즈음에는 세상의 구조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자랐다. 정보도 주지 않았고 정권을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판할 자유도 없었다. 지금은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려 하지 않는 사람,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금부터 20년이 지나면 더 나빠질 것이다. 경제도 국채 금리가 오른다면 대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 - P348

1963년에 출판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진 야마구치 히토미의 <에부리만 씨의 우아한 생활>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처럼 1925년에 태어나 나이가 그대로 쇼와의 연호(1925년을 의미한다)와 일치한다는 설정이다. ‘가장 평균적인 인간‘이라는 의미로 ‘에브리맨 씨‘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거기서 묘사한 것은 대기업 전기회사의 사택에 사는 대기업 정사원의 생활이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한 대로 그런 생활을 한 사람은 당시 노동인구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런 생활을 평균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책의 집필자나 구매자에 도시 중산층이 많아 그들 중에 ‘대학을 나와 샐러리맨이 된다‘ 하는 사람이 다수였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일것이다. - P355

인간은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 생활, ‘평범‘이라고 부르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생애에 몇 차례인가는 위기를 경험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큰 틀에서는 동시대의 사회적 맥락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이야말로 평균적인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묘사한 아버지의 궤적은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위기 상황을 경험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의 순간을 골라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일상적인 생활을 보여주기만 해서도 전체를 그린 것은 아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동시대의 사회적 맥락 속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입체적인 역사 기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 P356

인간은 자신이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불안이 생겨난다. 그런 불안을 가라앉히는 방법 중에는 시장에 넘쳐나는 상품이라는 형태도 있다. 그러나 주변을 향해 대화를 하고 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수동적인 구매보다도 결실이 많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거듭 말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도 그런 상호작용의 한 가지 형태이다.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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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는 전해에 있었던 미군의 남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겐지도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행위를 떠올렸다.
"미군의 잔학한 행위는 보도로 알았지만 일본군의 잔학성에 비하면 미군이 한 것은 장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 시절에는 교실에서 동급생이 중국 전선에서 돌아온 부대에서 얻었다는 사진을 몰래 보여주었다. 포로인 중국인의 목을 군검으로 싹뚝 자르는 순간이 찍혀 있었다." - P290

"‘난징 학살은 없었다‘라는 주장이 나왔을 때는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나‘ 하고 생각했다. 책에서밖에 지식을 얻지 않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잔학 행위를 한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짐승이었지만 전후에 돌아와서는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가슴에 감춰두고 살았을 것이다."
1970년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했다. 겐지의 느낌은 "군복 같은 제복 입는 단체를 만들어 무엇을 생각하고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자살할 때의 행동에 대해서는 광기 어린 행동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었다. - P291

1988년 9월에 쇼와 일왕이 병이 악화되어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겐지는 쇼와 일왕이 죽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었고 천황은 대원수였기 때문에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내보여서 무언가를 말할 마음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쇼와 천황이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사과해야만 했고 사과를 받고 싶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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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생활 중에 아버지 유지가 가끔 병문안 온 것 외에는 문안객도 없었다.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요양소 내에서 이렇다 할 친구도 없었고 장래의 전망도 없었다. 도쿄도청에 근무하던 와세다실업 시절의 친구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편지를 받은 기억도 없다. 천애고독으로 미래도 없어 자살하고 싶어진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겐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처지가 되어도 인간은 오로지 희망을 찾아낸다. 시베리아에 있던 때도 그랬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아버지에게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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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나 고위급 군인은 전쟁에 져도 강화조약 뒤에 위로금이 나왔다. 그러나 서민은 일할 때 모은 돈도 이미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없어졌다. 바보같은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아버지나 할아버지·할머니를 이런 어려운 생활에 몰아넣은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P175

시베리아 억류자는 ‘시베리아 귀향자‘였기 때문에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지역사회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직업을 얻는 데도 손해를 봤다는 경험을 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겐지는 그 때문에 일본 대기업에 일자리를 얻는 길을 사실상 차단당했다. - P180

"생활에 여유가 없어 책 같은 것을 사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나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전쟁의 진실은 어떻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전쟁 중에는 거짓 발표로 무엇 하나 진실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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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을 맞춰 야외 노동을 나가면 치타의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 앞을 지나간다. 주방 하수구에 빵가루가 섞인 상태로 구정물이 얼어 있었다. 그 빵가루를 노리고 대열을 이탈했다가 감시병에게 혼나는 동료 포로들을 보고 겐지는 비참함을 느꼈다. - P122

"내가 살아남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혼성부대에 들어가 수용소에서 계급 차별이 없었던 것. 또 하나는 수용소의 체제 개선이 빨랐던 것이다. 내가 있던 수용소는 지역 군사령부가 있던 치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개선 속도가 빨랐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떨어져 지방에 있던 수용소는 사망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겐지는 자기가 살아남은 것은 이런 객관적인 조건이 우연히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판단력이나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든가, 정신력이 있었다든가, 신이 지켜주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시기 죽은 사람에게 특징이나 경향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약했다든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했다든가, 그런 것으로 생사가 나뉘지는 않았을 거다. 장교는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 쪽에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 P127

시베리아 억류만이 아니라 전쟁 체험 기록은 학도병, 예비사관, 장교 등 학력이나 지위의 혜택을 본 사람이 쓴 것이 많다. 그것들은 귀중한 기록이지만 특정한 시각의 기록이기도 하다. 생활에 여유가 없고 문해 능력 등이 떨어지는 서민은 손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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