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표면적인 목표는 달성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진짜 동기였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완전히 통제하고자 했던 이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개전의 이유는, 식민주의를 끝내고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몰아내는 것이었다.(중략)도쿠가와 때의 쇄국으로부터 1945년의 절박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외국으로부터 사상적.군사적.경제적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고자 했던 일본 역사의 궤적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 P166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거나 혹은 석간신문만 잠깐 봐도 알 수 있듯이, 증오와 히스테리, 추하고 비열한 민족주의 또는 근대라는 이름을 빌려 등장한 온갖 괴물이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전유물은 아니다. 괴물들은 근대화 과정을 겪었던 모든 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나타냈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에서 유난히 정치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은, 일본에서는 정치적 현실과 그 현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던 ‘허구‘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이런 간극은 물론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빼고는 어디든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이 중 후자는 부분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이나 이타가키와 같은 사람의 대의정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지만, 더 큰 동력은 일본에 대한서양의 기대로부터 나왔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마땅히 의회와 법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라면 고기를 먹고 남녀 혼탕을 삼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일본이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한다고 서양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했다. - P149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이런 무책임의 정치는 승리할 전망이 없는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 뛰어든다든가, 일본보다 열 배는 더 큰 산업 기반을 가진 열강을 향해 침공을 감행한 데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상황, 즉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P152
사실 사무라이들이 무예를 실전에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실전경험이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면서 사무라이들의 기풍은 역설적으로, 상관에 대한 절대적 복종, 어떠한 명령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르는 자세, 나약함과 물질적 편안함에 대한 경멸 등을 강조하며 점점 더 완고하게 군대식으로 변해갔다. 특히 마지막 항목은 정치적으로도 유용했는데, 사무라이 계급의 경제 상황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다.도쿠가와 막부의 첫 한 세기 반 동안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쌀로 지급되는 고정 급료에 묶여 있던 사무라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자신들보다 신분이 빛은 사람들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대부분 가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무라이는 신분의 우월성에만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 P101
외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일굴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검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 (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 P102
약간 비슷하기도 한 것이 아직까지도 일본의 컨텐츠에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의롭고 올곧은 주인공이 늘 등장한다는 것...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향한 충성심과 순수함으로 싸우다 스러지는 고귀한 패자는 일본 문화에 식상하리만큼 자주 등장하는 전형 중 하나다. 19세기 말 봉 - P63
6세기 말 불교와 함께 화장의 전통이 일본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의 천황은 해자로 둘러싸인 열쇠고리 모양의 거대한 무덤에 묻혔다.(43쪽 사진) 이 무덤들을 관리하는 일본 궁내청에서는 무덤의 신성한 제례적 성격을 신성모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고학자들의 발굴활동을 거의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면에는 황실의 혈통이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주장에 문제가 될 만한 사실이 발굴을 통해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숨어 있다. - P49
오늘날 일본 생활의 모든 부분에 녹아 있는 정교한 취향과 세련됨은 헤이안 궁정의 극도로 귀족적인 미학에 그 뿌리가 있다. 일본 료칸에 도착해 객실에 놓인 완벽한 형태의 꽃꽂이를 볼 때나, 백화점에서 배달된 물건이 우아한 글씨의 제품 설명과 함께 계절을 암시하는 기막힌 포장에 담겨올 때나, 자동차 문을 열면 만나는 깔끔한 라인과 외형 마무리에 들어간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을 볼 때면, 당신은 1000년 전 헤이안 귀족들의 외형에 대한 집착과 그 시절 섬세한 미학의 편린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