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이미 예로부터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서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일본인들은 직계 가족과 친한 친구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인간관계에서 정해진 행동 양식을 선호하고 예상외의 상황을 극도로 꺼리는 나머지 서양 사람들에게는 거의 병적으로 보일 정도다.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그에 맞춰 어떻게 대접받기를 기대하는지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한다. 가령 일본의 비즈니스 미팅에서 명함을 교환하는 습관은 서로의 상대적인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다. 일본 기업의 경영진이나 공무원 무리와 함께 있을 때는, 이들이 자동차나 식당이나 회의실에서 어디에 앉는지, 사무실에서의 자리 배치는 어떻게 되는지, 서로 어떤 경어 표현을 쓰는지를 보면 각자의 직위와 서열을 즉각 알 수있다. 술집의 여종업원, 주부, 학생, 기업 간부, 대학교수, 건설직 노동자,
엔지니어, 예술가들은 저마다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는 예측가능성에 기반해서 항상 의례를 따르는 듯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일본 사회생활의 이러한 예측 가능성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흔히 ‘일본적 문화의 한 측면이라고 뭉뚱그려져 더 깊은 이해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사례다. 예측 가능성 역시 허용된 틀을 벗어나 행동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도쿠가와 시대의 권력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 - P200

미쓰이가 노조를 파괴하고 대신 고분고분한 사측 노조를 만드는 데 성공하자, 다른 기업들도 그걸 따라하기 시작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본의 대기업들은 정규직 남성 직원들에게 평생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할 의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업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분기 이익이나 주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직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회사가 재정적으로 힘들 때라도, 제대로 된 회사라면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안정의 보장이라는 좌파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 충족되면서, 노동 투쟁은 점점 일종의 의례적인 절차로 변해갔다. 가끔 있는 반나절 파업은 중요한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사전에 조심스럽게 조율되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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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정부의 문제 중 하나는 애초 메이지 헌법을 다시 쓰는 작업에 참여한 일본의 법학자들이 프러시아의 법률 전통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프러시아에서는 법을 시민이 통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명확히 하는 수단으로 본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일본의 본질로 여겨지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위계질서라는 것은 무정부주의와 야만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이들의 사상적 공간에서 신성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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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사람 검사 - 드라마가 아닌 현실 검사로 살아가기
서아람 외 지음 / 라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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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사람 검사‘라기보단 ‘여자 엄마 검사‘라는 제목이 떠올랐던 책... 검사로서의 경험 부분은 흥미롭게 읽었고, 엄마로서의 이야기들은 읽으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역시 일하면서 애 낳아 키우는 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을 재차 다지게 된 책이다.(이런 효과를 의도하진 않으셨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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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본은 전쟁을 통해 표면적인 목표는 달성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진짜 동기였던,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완전히 통제하고자 했던 이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개전의 이유는, 식민주의를 끝내고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아시아로부터 몰아내는 것이었다.
(중략)
도쿠가와 때의 쇄국으로부터 1945년의 절박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외국으로부터 사상적.군사적.경제적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고자 했던 일본 역사의 궤적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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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거나 혹은 석간신문만 잠깐 봐도 알 수 있듯이, 증오와 히스테리, 추하고 비열한 민족주의 또는 근대라는 이름을 빌려 등장한 온갖 괴물이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전유물은 아니다. 괴물들은 근대화 과정을 겪었던 모든 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나타냈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에서 유난히 정치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은, 일본에서는 정치적 현실과 그 현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던 ‘허구‘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간극은 물론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빼고는 어디든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하나도 아닌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이 중 후자는 부분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이나 이타가키와 같은 사람의 대의정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지만, 더 큰 동력은 일본에 대한서양의 기대로부터 나왔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마땅히 의회와 법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라면 고기를 먹고 남녀 혼탕을 삼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한다고 서양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했다. - P149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이런 무책임의 정치는 승리할 전망이 없는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 뛰어든다든가, 일본보다 열 배는 더 큰 산업 기반을 가진 열강을 향해 침공을 감행한 데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상황, 즉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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