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까지 중국에서의 전쟁은 미국과 영국에게는 먼 나라의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본국은 대공황과 뒤이어 발발한 유럽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1937년 이후에도 중국에 체류 중이던 많은 서구인에게 전쟁은 늘 겪는 현실이면서도 외국 중립국 국민으로서 신분 보장은 그러한 현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 점은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은 적성국민으로 전락했다. 중국 동부 전역에서 미국인과 영국인들이 붙들려 억류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한가운데에서 오랫동안 오아시스처럼 남아 있었던 상하이의 국제 공공 조계는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도시에서 연합국의 국적을 가진 수천여 명의 외국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 P289

중국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준 것과는 별개로, 미국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영국,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 미국인들은 아편 밀매에 열을 올렸으며 중국 내에서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렸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30분, 하와이의 항구에서 미함대가 괴멸함과 동시에 그 세계 또한 사라졌다. - P290

한 세기 동안 중국에서 미국인들은 제국주의의 한 축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자비로웠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언제나 중국은 궁극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P291

비록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실망시켰지만, 그가 한층 비난을 쏟아낸 상대는 또 다른 동맹국인 영국이었다. "영국은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장제스는 이렇게 썼다. "후대는 앞선 세대가 과거의 수치심을 딛고 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에 닥친 재난의 화근이 단순히 일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이 그동안 중국에서 저질렀던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기억에서 지울 생각 또한 없었다. - P293

문제는 중국과 서구가 서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구 연합국들이 보기에 중국은 일본군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이 나타나 자신들을 만행으로부터 구해주기만을 무릎 꿇고 간절히 기다리는 애처로운 나라였다. 반면, 장제스와 대다수 중국인의 생각은 자신들이야말로 추축국의 침략에 맞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워온 수였다.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수없이 있었지만 중국은 외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로인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과 동등한 열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미국은 영국보다는 좀더 중국이라는 동맹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비록 일부 영국인들이 중국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이들은 은근한 무심함과 노골적인 경멸감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중략) 영국과 미국인들은 실질적인 협력 관계에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말로만) 중국이 자신들에게 중요한동맹국의 하나라고 여길 뿐이었고, 결국 장제스는 서양 연합국들에 대해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결과가 되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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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부터 1941년까지 2년 동안 이 전쟁은 일본군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항전만이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이 되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좌우되는 동맹은 예전의 친구끼리 싸우게 만들었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묘한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 P255

6월 초의 도쿄 여행은 재앙으로 끝났다. 6월 6일, 일본의 주요 각료 5명은 회의를 열고 왕징웨이 정권이 중국에서 얼기설기 엮여 있는 일본의 여러괴뢰 정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주도 아래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왕징웨이의 꿈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났다. 게다가 중국의 모든 영토를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포함해 일본의 요구는 그야말로 가혹했다. - P260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공산당과 손을 잡은 것은 국민당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의 정권이 진정한 국민정부의 연장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왕징웨이에게 청천백일기의 채택은 북벌 전쟁 당시 장제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13년 동안 품어왔던 야심을 실현하고 쑨원의 혁명을 비로소 완수하게 만들 것이었다. - P261

샹잉이 퇴각에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마오의 우유부단함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마오는 충돌이 빚어진 책임을 확실히 짊어졌어야 마땅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샹잉은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마오의 경쟁자였다. 이제 그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 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 P275

 일본군이 중국에서 더 이상의 추진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석유와 고무를 비롯해 전쟁 수행에 절실한 자원들이 풍부한 동남아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P283

미국인들은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을 요량으로 여러 차례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두 진영의 대치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했다. 미국은 그 보복으로1941년 7월 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10월에는 도조 히데키 장군이 이미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정부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도쿄는 한층 서구 열강들과의 싸움에 박차를 가했다. 목표는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 반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필리핀이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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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성격은 공격에서 방어로 바뀌었다. 전쟁 첫해와 같은 격렬한 전투는 줄어들었다. 그 대신,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동맹관계, 비밀 외교, 앞으로 자신들의 진로를 영원히 바꾸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발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가가 인민의 일상적인 복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전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가가 인민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만큼 인민 또한 국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 P206

정부는 피란민들의 처우가 공산당이나 일본과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중산층, 특히 진보 성향의 사람들에게 확실한 대안은 공산당이었다. 가난한 농촌 출신 피란민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향 땅에서 살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군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중국을 휩쓸었던 대다수 군벌들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국민정부는 피란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적인 자긍심 문제를 넘어 이들이 ‘자유중국‘의 현실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P215

일본군은 국민당이 철수한 뒤 점령한 지역을 떠맡을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1937년 7월의 사건이 전면전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급격하게 확대되는 새로운 정복지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결여되어 있었다. 전례는 있었다. 일본군은 특히1931~1932년 당시 만주 점령의 경험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지배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편적인 수법은 나름 영향력이 있는 친일 부역자들을 찾아내 일본을 위해 일할 현지 정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 P220

산시성 주변은 지독하리만큼 가난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이 점이 그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메시지가 먹혀들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이기도 했다. - P229

일본은 완고한 반공주의 국가이면서도 정작 주된 목표는 장제스였다. 전중국이 일본의 지배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쪽은(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의 항전이었다. 끝없는 폭격에 시달리는 국민당 정권은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옌안은 고립된 곳이라 충칭에 비해 피란민의 수가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외부의 관찰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마음껏 추진할 수 있었다. 옌안은 미지의 장소로 남았다. - P231

저우포하이와 그의 보스였던 왕징웨이는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가장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중국이 파괴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소련에 의해 공산 중국이 세워질 것인가 두 가지 미래에 직면한 왕징웨이 일행은 평화 협상만이 전란에서 중국을 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기보다는 소위 대아시아주의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순수한 이념적 열정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열강들의 행태는 그들에게 일본을 보다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일본의 생활 방식을 동경한 열렬한 부역자라는 의미의 "친일"은 결코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민족주의 혁명의 대의에 그토록 헌신했던 한 사람에게는 기묘한 입장이었다. - P250

왕징웨이는 변절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대중 연설문을 준비 중이었다. 저우포하이는 토론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하려고 애를 썼다. 첫 번째,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굴복시키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두 번째, 일본은 중국인들의 항전(왕징웨이가 위원회에서 투표에 부쳤던)이 "국가의 독립과 생존"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두 가지가 평화적으로 실현된다면 (즉, 협상을 통해서) 중국은 "전쟁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었다. 왕징웨이는 어떠한 합의에서도 자신이 정의로운 전쟁에서 애국적인 승리자로 비추어지기를 원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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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책이 1969년에 출판된 책인데 왜 요즘 많이 듣던 얘기가...

요즘 시대에 어린아이들도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곱 살이나 여덟아홉 살쯤 된 아이들이 소년 심판소에 들어오면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이 어린 범죄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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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국민당의 행위를 되짚어보면서 그들이 우한에 매달리지 말아야 했다거나 제방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러나 1938년의 무더운 여름, 장제스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능한 한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중국 내륙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최상의 여건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만행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홍수를 통한 잠깐의 지연 또한 전략의 일부였다. 국민당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서 적어도 한동안은 냉혹한 계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제방 파괴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당 스스로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 P198

일본군이 우한만 점령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서 신속히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갈지 모른다는 장제스의 속단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취약하다고 판단한 그는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시를 초토화시켜야 한다는(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고) 암시를 주었다. 현지 병사들이 불을 질렀고 도시는 이틀에 걸쳐 불바다가 되었다. 정작 일본군은 창사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80킬로미터 떨어진 둥팅호에서 멈췄다. 장제스는 참사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부하들이 (그중 일부는 처형당했다)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 P203

전쟁이 시작된 지 15개월이 지난 1938년 10월의 어두웠던 시간, 한 가지사실만큼은 변함없었다. 관찰자들(중국의 사업가, 영국 외교관, 일본 장군들)은 매번 새로운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틀림없이 중국이 항전을 끝내고 신속하게 항복하거나 적어도 중국 정부가 도쿄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일이 해결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우한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본군의 가공할 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침략자의 동원력과 기술력, 경제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싸우고 있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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