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국민당의 행위를 되짚어보면서 그들이 우한에 매달리지 말아야 했다거나 제방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러나 1938년의 무더운 여름, 장제스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능한 한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중국 내륙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최상의 여건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만행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홍수를 통한 잠깐의 지연 또한 전략의 일부였다. 국민당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서 적어도 한동안은 냉혹한 계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제방 파괴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당 스스로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 P198
일본군이 우한만 점령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서 신속히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갈지 모른다는 장제스의 속단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취약하다고 판단한 그는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시를 초토화시켜야 한다는(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고) 암시를 주었다. 현지 병사들이 불을 질렀고 도시는 이틀에 걸쳐 불바다가 되었다. 정작 일본군은 창사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80킬로미터 떨어진 둥팅호에서 멈췄다. 장제스는 참사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로 부하들이 (그중 일부는 처형당했다)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 P203
전쟁이 시작된 지 15개월이 지난 1938년 10월의 어두웠던 시간, 한 가지사실만큼은 변함없었다. 관찰자들(중국의 사업가, 영국 외교관, 일본 장군들)은 매번 새로운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틀림없이 중국이 항전을 끝내고 신속하게 항복하거나 적어도 중국 정부가 도쿄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일이 해결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우한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본군의 가공할 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침략자의 동원력과 기술력, 경제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싸우고 있었다.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