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부터 1941년까지 2년 동안 이 전쟁은 일본군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항전만이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이 되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좌우되는 동맹은 예전의 친구끼리 싸우게 만들었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묘한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 P255

6월 초의 도쿄 여행은 재앙으로 끝났다. 6월 6일, 일본의 주요 각료 5명은 회의를 열고 왕징웨이 정권이 중국에서 얼기설기 엮여 있는 일본의 여러괴뢰 정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주도 아래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왕징웨이의 꿈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났다. 게다가 중국의 모든 영토를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포함해 일본의 요구는 그야말로 가혹했다. - P260

왕징웨이는 장제스가 공산당과 손을 잡은 것은 국민당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의 정권이 진정한 국민정부의 연장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왕징웨이에게 청천백일기의 채택은 북벌 전쟁 당시 장제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이래 13년 동안 품어왔던 야심을 실현하고 쑨원의 혁명을 비로소 완수하게 만들 것이었다. - P261

샹잉이 퇴각에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마오의 우유부단함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마오는 충돌이 빚어진 책임을 확실히 짊어졌어야 마땅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샹잉은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마오의 경쟁자였다. 이제 그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 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 P275

 일본군이 중국에서 더 이상의 추진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석유와 고무를 비롯해 전쟁 수행에 절실한 자원들이 풍부한 동남아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P283

미국인들은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을 요량으로 여러 차례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두 진영의 대치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했다. 미국은 그 보복으로1941년 7월 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10월에는 도조 히데키 장군이 이미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정부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도쿄는 한층 서구 열강들과의 싸움에 박차를 가했다. 목표는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 반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필리핀이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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