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스님의 단식은 100일이 다 되어 가고, 입춘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건만 날씨는 춥기만 하다. 단식은 이상하게도 추운 날에 그것도 길거리에서 꼭 텐트 치고 하게 된다. (조선인님 옆지기님도 그러했다.) 더운 날 하는 단식은 별로 뇌리에 박힐만큼 강렬하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친구도 지금같이 추운 날, 단식 중이다.


그 친구는 대학 시절 소위 극렬 운동권이었다. ‘과대표’, ‘학생회장’보다는 ‘사수대장’, ‘투쟁부국장’ 등의 직책이 어울렸다. 탁월한 입담솜씨에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주위엔 항상 사람이 몰려들었다. 어느 모임에 있던지 모임의 분위기를 꽉 잡았고, 항상 중심이 되었다. 게다가 사귄 여자만 열손가락은 될 정도로 이성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물론 이렇게 강한 사람에게는 항상 적들도 있기 마련이다.


애초부터 학과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람 만나서 술 마시고, 놀고, 책 읽고, 투쟁하길 좋아했다. 군대 보일러병 시절, 그는 혼자서 보일러실에서 근무하면서 몇 백권의 책을 독파했다. 세미나를 할 때면 그의 눈은 빛났고 말은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입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명확한 논리 때문에 그의 주장에 거의 반박하지도 못했다. (물론 지금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겠지만)


졸업 후 학원이나 학습지 회사 선생이다 방황을 잠시 했다. 샌님들같은 학습지 회사 선생들과 내기 당구, 내기포커를 해서 쉽게 딴 돈으로 나에게 회를 사주기도 했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직업을 쉽게 버릴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 가서 혁명이 어떻게 완수되었는지 공부하고 싶다고 하더니, 돌연 안산의 공단에 취직을 했다.


소위 위장취업이었다. 요즘이야 취업난 때문에 학력을 낮춰서 지원하거나 고등교육 받은 것을 숨기기까지 하는 사례가 즐비하지만, 몇 년 전 당시에는 그것은 명백히 불순한 의도의 위장 취업이었다. 게다가 그는 순수하게 돈을 벌기 위한 의도만 가지고 입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80년대 몇몇 학출 인텔리들처럼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공장 생활을 목적의식으로 무장하며 버티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삶은 그의 실제 삶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잘 적응했다. 특유의 친화력과 카리스마, 술 실력과 입담으로, 그리고 발굴의 축구실력으로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하는 작업뿐만 아니라 무슨 일에도 열심히 하는 그를 사람들은 좋아했고, 자연스레 여러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몇 번 옮긴 후, 그는 어느새 회사는 물론 지역 내에서 필요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조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사무장의 직책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졸업장 취득 사실을 알아낸 회사에 의해 해고당하고 만다. 속내는 자기 맘대로 다루기 어려운 노조 간부를 제거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는 부당해고라며 반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 추운 겨울, 60여일의 농성은 단식농성으로 이어지고, 안산의 추운 거리에서 9일 동안이나 밥을 먹지 못했다. 학력을 허위기재하고 하향 취업한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가 있었다지만, 그는 법정 투쟁 이전에 회사와 몸으로 싸우고 있다.


사실 이 소식은 다른 후배를 통해서 들은 것이다. 나는 그 친구랑 정말 친하게 지냈다. 함께 책도 많이 읽고 토론도 하고, 못하는 술이지만 같이 먹고, 서로의 집에서 번갈아가며 자고,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눈 사이였다.

 

술, 담배, 잡기, 당구, 여자, 화염병, 짱돌. 그는 나와는 달랐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서로 생각이 달랐고 가는 길도 달랐다. 그 친구는 자신의 신념대로 공장으로 들어갔고 나는 제도권의 삶을 걸어갔다. 물론 우리가 똑같은 길을 걸어가자고 약속한 적도 없었고, 서로의 삶에 개입할 권리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내온 시간들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서로의 진심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랬던 우리사이였지만, 농성과 단식 소식은 그를 통해 직접 듣지 못했다.


사는 곳이 서로 다르고, 한 명은 독신으로 또 한 명은 애기 둘 가진 아빠로 바쁘게 살아가다보니 점점 연락이 뜸해져 갔다. 농성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찾아가기는커녕 아직 안부전화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미안한 구석은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생활을 똑바로 잘 하면 된다고, 그러면 그 친구에게 부끄러울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지금도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동자로서의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인 그 친구 앞에만 서면 내 자신이 오히려 초라해 보이고 빚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단식 소식에, 농성 소식에도 맘 편하게 전화 한통 하는 것이 이렇게도 힘이 든다.


친구 사이에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은 멀어져간다는 뜻인가?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5-02-02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2-0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찌르르하네요.
친구분 참 멋집니다.
하루 빨리 단식 농성이 끝나면 좋겠네요.
의견이 관철되어......

엔리꼬 2005-02-0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네. 그렇군요.. 저도 그러도록 노력할께요..
로드무비님 / 실제로 만나보면 진짜 멋진 놈입니다. 빨리 농성도 끝나고 장가도 가야 할텐데....쩝

털짱 2005-02-05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펙트가 강한 글을 읽고나면 침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히 한마디의 논평조차 덧붙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남깁니다.
외롭고 두렵다고 회피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에 용감하기에 더 힘든게 아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