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후배의 상가집에서 우연히도 구멍가게집 아들인 남자 후배와 대형 할인점에 다니는 여자 후배와 셋이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최대의 불황에서 거의 망해가는 구멍가게집을 운영하시는 부모님. 그의 부모님은 수석 졸업한 그가 학부만 마치면 돈을 많이 벌어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위해 석사과정을 입학했다. 2년 뒤, 그의 부모님은 또다시 기대했다. 석사과정만 마치면 돈을 벌어올 것으로.. 그러나 고민 끝에 그는 돈이 전혀 안되는 기초학문 분야의 박사과정생으로 입학을 결정했다.

생계형 장학금은 독차지하면서 받는 그가, 돈벌이 안되는 (나중에 훌륭한 교수 되면 몰라도...) 사회과학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에 아직까지 기대를 하고 있는 부모님의 눈총을 받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직장과 일을 병행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하려면.. 공부와 상관없는 직장은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고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며, 어느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간다. 그리고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안다.

내가 어디서 물어온 아르바이트꺼리를 수업과 강의 때문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아르바이트비가 참 아깝다는 이야기를 한다. 방학만 되도 좋았을텐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이제 겨우 박사과정 입학.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는 힘들 것이고(오히려 짐이 되시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박사과정 수료까지 아니 박사 졸업까지, 아니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때까지 몇년동안이나 아르바이트나 시간강사 수입으로 버텨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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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할인매장의 문화센터 기획 일을 하는 여자 후배... 목욕탕 집 딸로 태어나 그리 잘 살지 못하는 변두리 동네에서 여지껏 살고 있는 그녀.

대학때 세상의 부조리에 항변하며 열심히 학생회 일을 했다. 그리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빼어난 붙임성과 유머, 그리고 친근한 인간미는 그녀에게 인기란 것을 가져왔다.

열심히 일했고, 공부했으며, 높은 자리도 두루 두루 맡았다. 그리고 여학생이 취업하기 힘든 대기업 계열사에 떡하니 붙었다. 지금은 눈썹 휘날리도록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한다. 상가집에도 12시 넘어서 잠깐 왔을 정도로 늘상 퇴근도 늦다.

그래도 직장이 주는 안락함이 있지 않는가. 선후배로부터 '남자'로 취급받을 정도로 청바지에 티만 입고 여성성을 가꾸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얼마전 동남아 여행가서 찍은 사진에서는 제법 야한 옷을 입고 여성성을 풀풀 풍긴다. 그리고 친구 함값으로 받은 풍족한 돈이긴 하지만, 100만원어치의 술을 하룻밤에 넷이서 먹어 치우기도 한다.

2시가 넘은 시각, 오래간만에 그녀의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회사와 자기의 일에 대한 궁극적 생각을 엿볼 수는 없지만, (힘든 것만 제외하면) 자신의 일이 싫지 않은 눈치이다. 은근히 대기업에 일한다는 프라이드가 없을 수 없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며, 할인점 전국 점포 일이며,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특히 각 지방에서 벌어지는 까다로운 할인점 매장 개장 과정 이야기를 안타깝게 늘어놓는다.

자신의 회사가 잘 되지 않기를 바라는 회사원이 있긴 있을까? 역시 그녀도 그녀의 할인점이 번창하기를 바라마지않을 것이다. 그래서 월급도 올라가고 프라이드도 올라가고 직급도 올라가길 바랄 것이다.

회사에 다니면, 그 시야가 얼마나 줄어들지 궁금하다.

할인점에 다니면 그 할인점이 소규모 상인들의 생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민을 할까? 할인점이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기존의 유통구조를 망가뜨리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할인점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부작용에 대해서 혹시 인식은 하고 있을까?

혹시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하거나 적극 방어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까? 그런 모습은 별로 보기 싫겠다.. 고 혼자서 생각해 본다.

회사의 구성원에게 이런 상상력을 동원하라고 하는 것은, 즉,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라는 말은 회사의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참 쓸데없거나 금기시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백화점에서 꽃꽂이 강좌를 다니면서 너무나 즐거워하는 그녀, 회사의 착취에 가까운 노동 강도에 어쩔 줄 몰라하며 힘들어하는 그녀, 대통령 탄핵 소추 의결 결정 뉴스를 보고 분노하던 그녀, 앞으로 돈 잘 벌고 잘 살기를 바라는 그녀.

그들과 같은 학문을 전공했던 학문적 선배 한 사람이 구멍가게와 할인점에 대해 쓴 글을 오늘 보면서, 그리고 어제 있었던 두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에 놀라며, 결론도 없는 글을 쓴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글로 써서 올릴 공간을 만들어 준 알라딘에 무한한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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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대형 할인매장 대신 동네 구멍가게를 애용하자

http://yjt21.net/ 이종태

웬 때아닌 구멍가게 타령인가 고개를 갸웃하시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에 어떤 젊은 주부가 낸 책이 소개가 되었더군요. 아마도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이던가요. 흔히 생태적인 삶이라면 전원을 생각하지만, 어차피 도시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 인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니 도시에서 살면서도 가급적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한 여러가지 삶의 지혜들을 소개한 좋은 책 같았습니다.

그 내용들 대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것들, 예를 들어 음식물 안 남기기, 소비를 줄이기, 고쳐서 쓰기 등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평소 제가 늘 생각하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대형 할인매장보다는 골목 구멍가게를 애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단가가 싸다는 이유로 대형 할인매장을 찾지만, 거기에서는 대량으로 물품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실상은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고 썪거나 남아 물건 귀한 줄 모르게 처분하게 되어 결국은 과소비, 낭비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단가가 싼 대신 훨씬 더 많은 소비를 통하여 결국은 가계에 더 큰 부담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형 할인매장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잃는 것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서민 경제의 위축을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대형 할인매장은 말할 것도 없이 대규모 자본, 즉 재벌회사들이 서민 주머니를 털기 위해 만든 매장입니다. 게다가 외국 자본이 압도적이지요. 우리가 거기에서 물건을 살수록 자본은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에 자본을 집중시키는 것이 되고, 그럴수록 우리의 소비습관과 행태는 그들의 유통방식에 종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독과점이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유무형의 폐해는 우리가 잘 아는 것이 아닙니까? 동전의 양면처럼, 대기업의 성장은 서민경제의 위축을 가져옵니다. 뉴코아나 이마트가 개장되었을 때 동네 소규모 수퍼들이나 재래시장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해서 일가족 생계를 그런대로 꾸려가던 많은 분들이 눈물을 머금고 권리금까지 포기한 채 가게문을 닫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유통업의 발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변화를 미화하기도 합니다. 과도한 다단계를 거치는 동안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는 농수산물의 왜곡된 가격구조는 그러한 유통합리화의 대표적인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이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유통의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대형 마트의 등장은 그나마 서민들이 소자본으로 먹고살기 위해 파고들 수 있었던 골목경제와 재래시장경제를 대자본이 싹쓸이 하여 서민들의 목숨줄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대형 유통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구멍가게 연합이라고나 할까요. 즉, 동네 수퍼들이 공동출자하여 큰 유통회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국으로 안되면 권역별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건을 공동구매하고 판매는 각자가 하는 것입니다. 큰 물류창고도 지어야겠지요. 어떤 분한테 이런 말을 하니까 좋은 생각인데, 가게마다 파는 물건 가격이 달라 어렵다고 하더군요. 물론 어려움도 많겠지요. 하지만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형 자본과 공동으로 맞서 싸우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의 성공을 위해서는 아마도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으로 요청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직접 지원보다는 세제 혜택이나 물류창고 건립 등 간접비용 충당 방식이어야 하겠지요. 이에 대해서도 대자본들이 아마도 공정거래법 위반이라고 항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서민경제의 위축이 국민들의 구매력을 떨어뜨려 우리 경제 전반의 침체를 장기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서민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긴급한 문제이며 여기에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는 것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검토해야 할 문제들은 더 많고 크겠지요.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우리가 대형 마트에 가서 산더미처럼 물건을 사오는 것보다 매일 기꺼이 동네 골목에서 필요한 무우 한 개, 라면 한 봉지를 사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같은 처지의 서민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점도 함께 생각하고 실천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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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5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멍가게 이용, 저도 그런 생각을 언젠가 하긴 했는데

편리함에 길들여져 한달에 두어 번 산더미같이 쌓인 카트를

밀고 다니지요.

엔리꼬 2004-11-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필이면 집 바로 앞에 대형 마트가 있어서요.. 그래서 가끔 시장 가보면, 다른 맛이 나곤 하지요..

sooninara 2004-12-2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동네슈퍼에서 그냥 사요..할인점 다녀오면 돈을 쓰고도 먹을것도 없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