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신문보기는 인터넷 시대라는 지금까지도 꽤 중요한 버릇으로 남아있다. 신문의 잉크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퍼지는 알러지 환자도 있음을 TV에서 알았지만, 난 그 잉크 냄새를 즐기는 족속이다.

아침에 갓 발행된 신문을 읽지 못하면 하루종일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늦은 밤이든 며칠 지난 후가 되었든 모든 면을 뒤져본 후에야 신문을 버린다. 신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각종 미디어가 있어도, 우리 집에 배달된 신문의 모든 면을 손수 뒤지지 않으면 뭔가 할 일을 다 못 끝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강박증에 가까운 버릇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이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국민학교 고학년때부터 신문을 읽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현재까지 부모님께서 받아보시는 신문은 c일보. 지금이야 그 신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만, 그때야 그런 게 어디 있었나? 그때 신문은 세상과 통하는 흔치 않는 통로이자 지식의 보고였다.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지는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시면서 배달된 신문을 항상 가지고 들어 가셨고, 어느 정도 훑으신 다음에는 마루에 던져 놓으셨다. 늦게 일어난 우리들은 신문 쟁탈전을 벌이지만 결국은 스포츠 면을 비롯한 알짜배기 지면은 장남이 차지하고, 우리 남매는 재미가 떨어지는 나머지 부분부터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우리 삼남매는 나눠진 신문을 각자 펼쳐놓고 쪼그려 앉아 읽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당시에는 헤드라인은 물론 기사의 많은 부분까지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하지만 스포츠면의 선수 이름까지 한글 표기 전혀 없는 한자였다. 프로야구에 심취했던 나로서는 김시진(金始眞)이니 김봉연(金奉淵)이니 윤동균(尹東均)이니 하는 지면에 실릴만한 선수들의 한자 이름을 읽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국민학교 때 천자문 서예를 배운 적이 있어서 한자에 나름대로 익숙했기에, 신문에 나오는 새로운 한자 읽기에도 재미를 붙였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반드시 부모님께 여쭤보면 정확한 답변을 해주셨으니 나의 한자실력은 쑥쑥 늘어났다. 지금도 이건 선동렬의 선(宣)자이지 의(宜)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유두열의 유(柳)씨와 테니스 선수 유진선의 유(兪)씨, 유남규의 유(劉)씨가 모두 다른 집안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신문의 덕이다. 대학시절, 시험기간에 옆에 앉은 친구들에게 내 답안지를 보여준 유일한 경험도 '한문' 과목 시간에 일어났으니, 그 신문에 크게 고마워해야 할까? 물론 당시 다른 신문을 구독했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겠지만..

c 일보의 풍부한 컨텐츠(당시엔 컨텐츠란 말은 없었지만)는 어린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단행본으로도 여러 권 편집되어 나왔던 꼭지 중 하나인 이** 코너를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시사 문제와 맞닿아 있는 토픽 선택과 그 토픽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관련된 모든 자료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그 지식의 향연에 매혹되었다. 하루가 채 안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한 주제에 대한 서적을 다 뒤지는가? 책을 뒤진다고 되는 일인지? 자료조사원이 몇 명씩은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후 그 코너의 제목 삽화가 펜에서 컴퓨터로 바뀐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자료수집은 컴퓨터로 했다는 기사를 얼핏 보았고, 그래서 그 의문은 풀렸었다. (그런데 지금도 의문이다. 그 시절에 컴퓨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인터넷도 없었는데 말이지..)

당시 각종 지방신문들은 중앙신문인 c와는 말 그대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중앙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빈약한 기사거리, 조악한 편집상태와 종이의 질, 별로 관심도 없는 지역 이야기(당시만 하더라도 애향심은 별로 없고, 서울로 뜰 생각만 했다)으로 도배한 지역 신문들과 비교하면 독보적 우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민주화의 광풍이 몰아쳤었고 89년 전교조가 기지개를 펴면서 우리 사회에 다른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지만, 입시에 매달린 범생이 고등학생에게 더이상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c일보를 바라보는 범생이의 눈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89년 고3 여름, 1면엔 대문짝만하게 임수경의 북한 잠입, 탈출 소식을 전했고, 급기야 반공 애국청년 서림은 부르르 떨었다. "결국엔.... 그런데 이 새끼들이 미쳤나?". 그에 앞선 봄 무렵, 대학가요제로 유명한 '따라지 대학교(당시 부산에선 그렇게 불렀다)'에선 학생들이 선량한 전경을 불태워 죽였단다. "이 미친 놈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려나..."
c 일보의 논조와 일치되었던 그때의 그 상황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신문과 함께 했던 우리 삼남매. 국민학교때부터 허공에 한자를 쓰는 특이한 취미를 가졌고 바둑을 즐겨했던 장남은 우리 어머니 표현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과생으로 1등만 도맡아 했고, 매년 초 신춘문예에 큰 관심을 보이던 막내는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정한다. 나? 나는 신문 잉크 중독증에 빠졌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렇게 나와 인연을 맺었던 신문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구독했던 신문과는 대척점에 있는 신문을 보기 시작한다. (시리즈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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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2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척점에 있는 신문이라... 그렇담...?

엔리꼬 2004-10-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탄을 기대하세요... 지금 구상중입니다... 왜이리 글 한편 쓰기가 힘이 들까요..

sooninara 2004-12-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안에 2탄을 써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