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은 지역과 무관하다

비육우나 돼지를 사육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저기에서 100마리를 사와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눠 따로따로 사육하기로 한다. 한쪽은 축사에 가두어 컴퓨터가 계산한 과학축산에 의존하며 성장호르몬 섞인 배합사료만 먹이고, 다른 한쪽은 가축의 본성에 내맡겨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흙을 파서 벌레를 잡아먹게 놔둔다면, 일정 시간 후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과학축산에 의존한 쪽은 값이 많이 나가도록 살이 붙었지만 그리 건강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체격은 보잘것없지만 튼튼할 것이다. 목장주는 살찐 쪽을 선호할 것이 틀림없다. 오직 돈을 위해서.

도시 어린이들이 시골 어린이보다 수학문제를 잘 푼다. 슈퍼와 문방구가 지천인 도시에서 계산이 빠른 것은 환경 탓이다. 도시 어린이들이 더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도시 어린이들은 들풀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 언제 애기똥풀 꽃이 피고 무당개구리는 알을 낳고 강낭콩을 언제 파종하는지, 청호반새가 어떻게 새끼를 치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살아가는데 계산이 필요하지만 생태계의 질서는 몰라도 될까. 그렇지 않다. 감성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해 금방 지치고 만다.

히말라야 북쪽의 작은 민족 라다크에는 불행이라는 단어가 없다. 어휘가 짧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불행이라는 의미를 알 필요가 없었다. 가난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모두 자기 집과 갈아입을 옷이 있고 서로 도와 나누며 자급자족했으므로 수입이 다를 리 없다. 생활수준이 한결같으니 비교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구문물이 돈과 함께 밀려들어오면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육체노동을 천대하면서 불행을 배웠다.

최근 서울 시내의 일부 대학교에서 수시모집을 하면서 지역별로 차별했다는 의혹이 시민사회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시골이나 지방도시는 물론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교 학생에 노골적인 차이를 두어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일고, 참교육 학부모회와 전국교직원조합원 소속 교사들이 해당학교와 교육인적자원부 앞에 나와 연일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평준화 원칙을 위배했다는 주장인데, 강남권과 강북권 고등학생의 학력은 입시에 반영해야 할 정도로 분명한 차이가 있을까.

학생들을 무작위로 반으로 나눠 한 그룹은 수업 마치면 학원과 과외로 입시공부에 몰두하게 하고, 한 그룹은 친구들과 산과 들로 쏘다니며 우정을 쌓고 사회 구석구석의 자원활동으로 보람을 배운다고 하자. 입시 공부에 치중한 그룹의 성적이 단연 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이 뛰어난 그룹의 학력이 당연히 뛰어날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인데, 왜 문제의 대학들은 강남권 학생들을 집중 선발했을까. 그건 학생을 선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육으로 끌어올린 성적을 학력으로 판단한 천박성 때문이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일찍부터 강남권 고등학교로 옮겼다는 거 모르는바 아니다. 그런데, 아파트 값 올리며 일찍부터 학교를 옮긴 열성부모의 아이는 원래 학력이 높을까.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려서부터 남을 의식하는 부모의 천박한 욕심으로 일찍부터 사육된 아이가 강남으로 옮겼을 터이므로.

하루종일 실험에 몰두한 대학원생을 두고, 생각은 언제 하느냐고 교수가 핀잔을 주었다는데, 남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성적 올리기에 급급했던 고등학생들은 하인이나 로봇처럼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할지 몰라도 대학 진학 후 또는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는데 대단히 미숙하다. 한마디로 창의성이 부족하다. 남을 배려하는 일도 교과서에 의존하려 든다. 문제는 잘 풀지만 원리를 찾는데 실패하는 유학생들이 초반에 고전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 깊은 교육자라면 표피적인 성적에 의존하며 사육된 학생을 선발하는데 몰두하지 않아야 옳다. 다양한 지역에서 창의력 있는 학생을 공정하지만 유연하게 선발하는 편이 미래지향적이라고 본다. 차제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침밥 차리는 엄마가 시리얼에 우유 부어 먹이는 엄마보다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 냉정한 과학적 칼로리보다 눈에 비치는 엄마의 정성이 아이의 감성을 따뜻하게 그리고 창조력 있게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얼을 보면 개 사료가 생각난다.
 
박병상
(요즘세상, 200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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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게임은 끝났다. 고교등급제 반대한다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마저 그랬다.(물론 다른 대안을 내놓으려 하긴 했지만)  고교등급제가 어디 논의거리가 되는가? 그러나, 의도한 것인지, 의도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상황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번 사건도 언론에 의해서 '고교평준화 반대' 에서 '사학의 자율성',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나아가 검은 속마음을 가진 못되먹은 몇몇 단체의 선동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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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일보 사설이다.

[사설]연세대 유감 표명 일리 있다
 
일부 단체가 제기한 고교등급제 적용 의혹을 받으면서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던 연세대가 어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 대학은 “일부 단체가 강남 강북을 대립시키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양상으로 우리 학교의 입학정책을 단편적 자료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비난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는 이번 고교등급제 파문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사태는 몇몇 대학의 수시모집에서 강남지역 학생들에게 고교등급제를 적용해 우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전교조 등 일부 단체들이 압박하자 교육부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반은 대학에 입학서류철을 요구했고, 면접을 담당한 교수명단까지 제출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동안 일부 단체들은 외곽에서 연일 대학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헌법이 보장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권’을 새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학을 여론재판에 올려 욕보이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대학이 지닌 학생선발권에 관한 일이다. 일부 단체의 ‘선동’에 교육당국까지 가세한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연세대가 발표문에서 “일부 단체가 강남과 강북을 대립시켰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 단체의 ‘교묘한 의도’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수시모집에서 강남보다 훨씬 많은 학생을 입학시키는 다른 지역의 특수목적고는 슬며시 빼놓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처럼 몰고 간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연세대가 “입학정책은 신뢰의 기반 위에 대학자율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천명한 것에 공감한다. 고교등급제 의혹은 곧 흑백이 가려지겠지만 어떤 구실로도 이번처럼 대학을 유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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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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