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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니까 사서 보는 거다, 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만화를 펼쳐 읽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할 지언정 베토벤의 삶을 동경하는 이는 없듯이, 1989년부터 오직 이 한 만화만 무려 16년 동안 그려온 작가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郞)가 만들어 내는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는 가츠가 살아야 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의 삶을 행여 닮을 까봐 두렵고 겁이 나기 때문이다.

가츠가 살아야만 하는 세계가 끝 간 데 없이 공포스러운 것은 그 속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정하는 최소한의 기계적인 이분법이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두움,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명징한 대비는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균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속의 주인공이 어떠한 고난에 맞서 악전고투하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적들을 물리치고 원하는 것-그것이 악의 세력에게 붙잡힌 공주이건, 왕국의 재건이건-을 손에 넣게 될 것임을 믿을 수 있기에 그다지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츠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가.  인간계는 마계에 의해 끊임없이 침범당하고, 권력자들의 착취는 일상적이며, 성직자들은 마녀사냥에서 흘리는 무고한 백성들의 피에 취해있고, 신으로부터는 구원이 오지 않는다.  희망이 사라져버린 세계.  상상을 초월하는 마물들, 그리고 신성과 마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사도들.  그들에게 무력하게 사지를 찢기고 벌거벗기운 채 강간당하고 삶의 터전인 마을이 불태워져도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인간들.  그리고 제물의 낙인이 찍혀 영원히 안식할 수 없는 가츠와,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소멸해버리고 말 캐스커.  이것들을 설명하는 절망이나 공포라는 말은 차라리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스물여섯 번째 단행본인 이 책에서 가츠 일행은 트롤의 본거지에서 마을 주민들-그래보았자 먹이로 삼기위한 어린아이들과 강간을 하기 위해 데려온 젊은 여자들뿐이었지만-을 구해내고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온몸을 던져 활로를 뚫는 가츠의 싸움을 통과 의례처럼 경험하게 된다.  무수한 마물에 맞서는 단 하나의 인간, 검은 검사(劍士) 가츠.  그림체는 한마디 말도 없이 펼쳐 놓은 두 페이지 가득 붓자국이 선명한 굵고 거친 선들로 채워지고 그것들은 종이를 찢어버릴 듯이, 남은 하나의 눈마저 멀게 해 버릴 듯이 분노한다.  그리고 한 쪽 눈이 먼 가츠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트롤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기 시작했을 때부터 글썽이던 나는 기어이 또 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과 그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살갗이 찢기고 혈관이 터지는 싸움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나는, 마치 내 등 뒤에 꽂혀있는 육중한 대검의 무게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가츠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이전 편에서 가츠를 돕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던 해골의 기사는 인간으로서 신이 되어버린 그리피스와 싸워야 하는 가츠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강하게 암시하며 사도들에 맞서 그와 함께 싸움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츠의 몸에 입혀지는 광전사(狂戰士, Berserk)의 갑옷.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고통도 잊은 채 벌어진 상처에서 온 몸으로 흘러내려 갑옷 밖으로 스미는 자신의 피에 젖은 채 싸우고 있는 가츠를 끝으로 이번 권의 이야기는 끝난다.  명부마도(冥付魔道)의 길이란 무엇이며 고드핸드는 누구인지, 불사신 조드 마저도 주인으로 숭배하는 '비상하는 흰 매' 그리피스의 계획은 무엇인지.  이번 편에서도 의문은 의문으로서 침묵할 뿐 우리는 여전히 암흑(暗黒) 속 인과(因果)의 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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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낙타 > 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칼의 노래>가 마음 속에 얽히곤 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라는, 이순신의 칼만큼이나 치열하고 순결한 김훈 선생님의 말씀도 맴을 돌았다. '정치'는 순수한  '정치'의 것으로, '무(武)'는 '무'의 영역 안 그 정확한 자리로, 라고 외치는 칼의 노래.  '정치' 와 '무', 그 둘 사이를 어정쩡하게 흔들리다 간 많은 정객들 틈에서 과거의 이순신은 아스라히 스러져 갔고, 오늘날의 춈스키는 그 '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의 이면을 가른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가 이처럼 날렵하고 다급했을까.

  내가 춈스키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에서 변형생성문법을 배울 때였다. 그 때는 그저 언어학 쪽의 신선한 학자정도로만 마음속에서 매김됐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 신문에서 우연히 포리송 탄원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룬 뒤의 춈스키와 그의 고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렴풋한데 아마 이러했던 것 같다. " 내가 누군가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것과, 그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책을 쭉 읽으면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간 대목도 사실 이 글 전체 맥락과 다소 거리는 있으나,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프랑스 지식인의 폐쇄성을 꼬집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만 있으랴.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토론 문화에 대한 경험이 비천하고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이 벽으로 가로막힌 경우,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귓바퀴를 틀어 막아버리거나 적대적인 감정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내용과 표현의 형식을 '포를 뜨듯이' 아주 합리적이며 예리한 칼날로 갈라 사고하는 진보적 정치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새롭고 설레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1999년, 현대 정치, 언론, 경제, 지식인의 문제에 대하여 프랑스의 두 언론인(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과 춈스키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대화 형식 그대로 담아놓았다. 우선, '지식인'과 '진실'에 대한 뜻매김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춈스키는 '지식인'이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라 정의하면서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규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또 얼마나 저명한지, 그리고 우리 체제 안에 반체제 운동을 하건, 우리 적의 체제 안에서 체제 전복적 활동을 하건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반 위에서건 진실을 말하는 이가 바로 '지식인'이라 본다.
  그리고 '진실'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사실"이라 했다. 우리 세계는 '진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을 칼로 예리하게 발라 찾아내는 참 지식인(춈스키는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 했다.)도 거의 없는 듯하다. 춈스키는 진실이란 "의자 위에 있는 책"을 두고 "책이 의자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했지만, 우리 세계 속에서 진실은 그처럼 간단하거나 자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는 지식인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세계는 가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권력의 중심은 부자나라들에 있다.  최강대국들(미국, 일본, EU)과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IBRD, IMF)과 국제기관(WTO)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이러한 체제와 국가 권력 기관은 서로 공생하고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해야할 언론이나 학교, 인텔리겐차, 그리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는 연구기관들이 권력에 동원되어 대중이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권력기관들은 지식인들을 앞세워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며 권력을 강화시킨다. 춈스키는 예전에는 폭력적 수단으로 대중을 억압하고 진실을 은폐했는데, 이제는 정교하게 꾸며진 여론조작이라는 전략으로 대중을 통제한다고 "조작된 동의"란 분석 틀을 가지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주입을 통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갖게 되면서 장시간 노동은 기꺼이 수용하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와 같은 인간적 가치는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려는 소수 대중과, 민주주의를 제한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지배계급간의 투쟁만 계속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도 춈스키가 분석한 바와 결코 다른 걸음을 걷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IMF로 인해 우리 은행들은 대부분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 있는 실정이고, 다른 공공기업도 민영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과점형태의 경제활동을 우려케 하므로 우리 경제구조나 사회 전반에 걸친 부작용을 낳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WTO로 인한 우리 농업경제는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가. 이라크 파병 문제의 저변에는 또 얼마나 큰 경제문제가 걸려있는가.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지는 정치권력자들의 부패, 비리는 언제나 경제 경영자들과 짝을 이룬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암담하고도 탄탄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언론이나 지식인의 작태는 또 얼마나 '조작된 동의'를 구하고 있는가.
  춈스키는 이런 곤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중의 결집된 힘에 있다고 본다.  억압받는 대중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지고 또, 우리 세계가 느리나마 진보의 역사를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론의 압력, 즉 조직화된 대중의 역량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언론과 지식인은 민간기업(대기업)에 시청자나 팔아 넘기지 말라고,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말라고,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가 되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춈스키의 그러한 예리하면서도 따끔한 충고는 비단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언론과 지식인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가 아닌 '진실'의 배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 문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한편, 언론은 자신의 고유 영역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혀내는 태도와 모순된 체제에 대한 비판,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에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정치나 다른 경제 분야도 역시 본래 영역과 범위에 충실한 활동과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 문제 각 영역의 고유함과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언론은 정치의 수단이 되고 정치는 경제의 목적이 되고 하는 옳지 못한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춈스키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올렸었다. 정치적인 알력구조 속에는 절대 자신의 '무'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순신과 그의 외로운 '칼의 노래'가 자꾸 맴돌았던 것이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읽기가 아니었다면, 어느덧 춈스키는 분리되고 선명해져야 할 세상을 향해 예리한 칼을 갈고 있으리라.
          2004년 5월 4일 쉬는 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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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슈마리 > 쉽게 만나는 최신 경제학의 세계


경제학,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기저기 경제학 강의를 다니다보면, 가끔 황당한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미시경제학은 왜 들으려 하나요?"

"주식 투자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시경제학은 주식 투자하고는 상관이 없는데요"

"그럼, 경제학은 뭐에 쓸모가 있나요..."

사실, 쓸모가 없다는 대답이 솔직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터라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대개, 경제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고, 감각을 키우는데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 경제학 교과서이나 대중서를 대할 때면 지나칠만큼 트렌디하게 흘러가는 경영학 관련 서적들과 크게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커리큘럼의 규범이 확실하고 립서비스와 진배없는 사기가 아닌 진정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라는 항변이 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아닌 '사회'의 과학이고 보면 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대중이 외면하고 소비층이 얇아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쉽게 썼다는 수십종의 경제학 풀이서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시중에 나가보면, 원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딱딱하고 비싼 교과서를 빼고서도, "알기 쉬운"이라는 꼭지를 단 경제학 대중서는 많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이러한 책들 중에서 제대로 건질만한 책은 극히 드물다. "알기 쉬운"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책들은 경제원론의 표준적인 주제나 쳬계를 따르되, 수식과 그래프만 없애고 몇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그럴듯하게 재포장해 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기본기 이외에, 그리고 경제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 교과서 이외에, 대중을 유혹할 수 있는 보다 그럴듯한 포장과 알맹이를 지닌 경제학 대중서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산업조직으로 풀어낸 경제학의 묘미

런 면에서 보면, 이토 모토시게의 [비즈니스 경제학]은 그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우 대담한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토 모토시게는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일본의 학자로서 전방위적인 관심과 더불어 대중적인 글쓰기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비즈니스"라는 대중적인 골자를 빼놓고 보면, 이 책은 이른바 '산업조직'에 관한 책에 가깝다. 경제학 원론이나 개론을 가르칠 때 산업조직에 관한 부분에서 김이 빠져버리기 일쑤다. 일단, 이론적인 기반이 되는 완전경쟁 시장을 다루고 그 대척점에 선 완전 독점을 다룬다. 그렇다면, 현실은 그 사이 어딘가 일텐데, 기업간의 현실적인 경쟁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과점 시장은 분석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피해간다. 은근 슬쩍 넘어간다고 쳐도, 뒷 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

현대 경제학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세련화된 산업조직을 원론 차원에서 수용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엎친데 덮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과점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론이라는 또하나의 분석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 역시 원론이나 개론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모토시게는 고고할 수 있는 학자임에도 이런 부담스러움을 기꺼히 감수하면서, 속세의 때까지 적당히 묻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책의 전반부는 산업조직론의 기본 테마인 가격 차별의 논리, 주인-대리인 문제, 그리고 게임이론을 통한 경쟁전략과 같은 최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산업조직론에서는 잘 알려진 주제들이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포장해 잘 먹기 좋게 조리해두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산업조직론의 대강을 훑은 후에 후반부에는 좀 더 다양한 주제가 펼쳐진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 전략 개념을 차용해 경영학의 논의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정보화로 인해 초래되는 경제의 변화를 논하고 저자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제경제와 비즈니스까지 풀어나가고 있다. 전반부에 비해 공력이 떨어지는 맛이 없지는 않지만, 다양한 주제를 쉽게 전달핟나는 애초의 취지에는 여전히 충실하다.

토착 경제학을 위한 노력

내용을 떠나서 이 책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은 경제학의 이론이 말하는 현실을 꼼꼼히 찾아내려 한 모토시게의 노력이다. 요시노야의 규동 판매 전략이라든가 세븐 일레븐의 점포 확대 방식 등을 논한 부분 등 책 곳곳에 등장하는 일본 기업들의 실제 사례는 경제학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저자의 지향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교과서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럴듯한 토착적인 사례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신문 기사를 맹맹한 수준에서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이 대부분이고 본다면, 적절한 예를 찾아 이론과 맞춰나가려는 우리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싶다. 고고함을 버리고 속세로 뛰어든 모토시게를 우리의 학문 풍통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 역시 간절해진다. 이왕이면 값비싼 하드커버 양장을 한 딱딱하고 부담스러운 교과서 말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드러운 대중서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쉬운 점 몇 가지  

경제학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다음의 두가지는 아쉽게 느껴진다.

첫째, 산업조직론의 이론체계를 지닌 앞부분이 보다 탄탄한 이론의 구성과 치밀한 사례의 소개로 전개됨에 반해 다양한 주제가 섞여 있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맥이 풀리는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정보통신 혁명을 다루는 부분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특히, 배리안(H. Varian)과 샤피로(R. Shapiro)가 쓴 명저 [Information Rules]와 같은 뛰어난 참고도서가 존재하는데도 그 내용들이 책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은 점은 꽤나 의아하다. 앞서 장들이 해당 분야의 주요 교과서들을 참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둘째, 책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 번역의 전반적인 수준은 무난하나, 세부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간혹 드러난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 일본 책을 번역할 때 미국 저자들의 이름이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는지 종종 의아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번역서에서는 서구권 저자들의 인명 표기에 가타카나 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현재 이에 대한 번역업계의 규정이나 관행이 어떤 것인지 필자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어쨌든 폴 밀그롬(Paul Milgrom)이 "미르그롬"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꽤나 거슬렸다.(하지만, 마이클 포터 같은 경우에는 그냥 "포터"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자의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원저자인 모토시게의 착각이라고 생각되지만, 게임이론 관련 부분의 참고서가 된 딕시(Dixit)와 네일버프(Nalebuff)의 책은 [전략의 게임 Games of Strategy]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 Thinking Strategically]이다. [전략의 게임]은 딕시와 수전 스키스(Susan Skeath)가 쓴 다른 게임이론 관련 서적의 제목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원저자가 혼동했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출판될 때 책 제목이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하다(번역문에는 영어 원제 앞에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라고 표기되어 있어 전자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하지만, 번역이 또하나의 창작이라는 적극적인 취지에서는 이러한 부분 정도는 미리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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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미야자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첫 공개~~!!!-[2004 베니스영화제] '센과 치히로 … ' 명성 이을까-중앙일보

[2004 베니스영화제] '센과 치히로 … ' 명성 이을까

●미야자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첫 공개
 
 "노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은 있을 수 없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63) 감독의 고민 중 하나다. 제61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4일 오후 세계 최초로 공개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에 대한 감독 나름의 '해답'이다. '하울의…'는 이번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유일한 애니메이션. 2년여의 제작기간 동안 내용 또한 철저하게 감춰졌었다.

 '하울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2002년 베를린 영화제의 황금곰상, 2003년 아카데미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감독의 이름값을 확인케 했다. 마법사 하울과 마법에 걸린 '90살 소녀'의 사랑이 베네치아(영어명 베니스)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이번 작품은 1986년 영국에서 출간된 다이아나 윈 존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18세 소녀 소피는 길을 가자 우연히 매력적인 마법사 하울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하울을 짝사랑하던 '쓰레기 마녀'가 소피를 하울의 여자친구로 오해, 소피를 90살 먹은 할머니로 둔갑시킨다. 가게를 나와 방황하던 소피. '움직이는 성'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실제로는 18세지만 겉으로는 90살 노파로 나오는 소피와 마법사 청년의 '팬터지'가 펼쳐진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반전(反戰) 등 그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를 바탕에 깔고 사랑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는 듯했다. 굳이 '노년의 사랑'을 강조하진 않지만 '사랑은 젊음의 전유물' 같은 편견을 허물어뜨리는 것.

 등장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주인공인 하울과 소피는 물론 '쓰레기 마녀''부르이 악마''허수아비', 그리고 움직이는 성 등이 긴장감 있게 어울렸다. 손으로 그린 그림을 애용해왔던 미야자키 감독은 이번에 전작과 달리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는 건 인간에 대한 감독의 애정 때문일 것이다. 베네치아=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2004.09.05 17:12 입력 / 2004.09.05 17:15 수정 

http://news.joins.com/et/200409/05/200409051712575601a000a300a3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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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이 징그러운 세상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요한 부덴부로크 영사(領事)는 사위인 그륀리히의 부채를 떠맡지 않기 위해서, 딸의 마음을 조심스레 떠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진의(眞意)를 알지 못했던 그의 딸, 토니 부덴부로크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아버지에게 말한다. 실상 그녀의 마음 속에 부부간의 사랑이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시민 사회의 윤리에 충실한 정숙한 부인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그녀에게서 인내심의 가면을 벗겨버린 것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입에 올린 '파산'이라는 단어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위인 그륀리히의 채무를 변제해주었다가는 그녀의 친정이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그 한 마디에 그녀는 결국 남편에 대해 남았던 일말의 애정마저 깨끗이 털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에게 맺혀있던 온갖 감정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긍지 높은 상인 가문의 여성으로써, 역시 건실하다고 생각되었던 상인에게 시집 온 그녀에게 '파산'이란 단어는 그만큼이나 놀랍고, 당혹스러우며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친정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애초에 겉도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남편으로 인해 부덴부로크 가가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와의 얼마 남지 않은 정을 완전히 떼어버린다.  

 그렇다. '파산'이란 단어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자존심의 문제다. 또한 그런 자존심은 비단 유서깊은 상류 상인 가문의 후예인 토니 부덴부로크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부덴부로크의 시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안락함을 누리고,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현대 사회에 들어서 급속히 성장한 '중산층'들은 비록 그들이 과거의 부덴부로크 가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과 명망은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사회를 이뤄나가는 중요한 계층이라는 자부심을 항상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은 비록 한 조직의 우두머리는 아니지만, 자신에게 다수의 사람들이 속해있는 사회와 조직이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그 발전의 과정에서 과거에 비해서 보다 전문화된 방대한 인력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고, 괄목할 만한 대중의 의식적 성장은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역량 개발에 나서게 만들었다. 결국 사회의 발전과 그들 중산층의 성장은 그 선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상호간의 진보와 확대를 이끌어나갔다. 이런 그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의 부덴부로크라고 할 만한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말하듯이 그네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현대의 중산층들에게는 애초에 결핍돼 있다거나, 나날이 쇠퇴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한 주장에는 궁극적으로 그 모든 미덕이 사회의 흐름을 선도해 온 사회지도층 자신들만의 전유물이며,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덴부로크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자신들보다 무절제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나를 포함한 중산층들조차도 실제로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하다는 생각을 의식의 밑바탕에 남겨두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제시되는 뚜렷한 증거나 수많은 당사자들에 대한 인터뷰 없이 중산층의 붕괴의 절대 다수가 무분별한 과소비에 기인한다고 믿거나(과소비 신화)-물론 나 역시도 절대 그런 이들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다수 중산층 채무자들이 파산에 있어서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악덕 채무자 신화) 비단 사회 지도층 인사들만이 아닌 대다수 우리 중산층들도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도 그런 이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 중산층 대비, 과소비로 인한 파산자나 악덕 채무자의 비율은 한국이 더 높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중산층들이 지닌 그들의 자부심이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자신의 맡은 바 직무에서 충실하며 그를 통해 계층의 상승을 희망하도록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그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 나머지 그 자신을 파멸시킬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한 때 좁은 정읍 시내에서도 수많은 아줌마들로 하여금 거리에 파라솔을 치게 만들었던 신용카드 발급 열풍이나, 일각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송되면서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했던-비록 그 카드의 발급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명품 브랜드 의상과 자전거와 배낭으로 수수한 척 꾸미고 아내와의 사랑을 즐기던 정우성의 삼성카드 CF나 재벌의 본부인도 아닌 정부(情婦)쯤이나 되어야 저렇게 살 수 있으리라는 이영애의 LG카드 CF의 열풍을 바라보면서 이미 그런 생각을 가진지는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미 1∼2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중산층들은 하나둘씩 바로 그 카드로 말미암아 결국은 돌려 막고 막다가 지친 끝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에서 그들의 빚이 어디에 소모되었는지를 밝힌 내용들을 읽어보면 대부분은 주식 투자라던가, 사업의 실패, 가계(家計)의 어려움, 명품에 대한 소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외에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다른 사례들을 살펴보면 한국 중산층의 파산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뀔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배웠음은 분명하다. 분명 그들 책임의 일정 부분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정부와 사회의 것이며, 사회의 빼놓을 수 없는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온 그들로써는 파산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수모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그들이 꿈꿔온 모든 것의 붕괴를 의미하며, 타인들로 하여금 그가 헛된 이상을 가지고 방종하게 살아왔으며, 이 사회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미국의 과소비 신화와 악덕 채무자 신화를 논박하는 데 있어서 미국 중산층 가정들의 숨겨진 재정 소모 요인 중 가장 큰 것으로 지적한 주택에 대한 입찰 전쟁과 부모의 맞벌이로 인한 가정의 안전망 부재 중에서 주택에 대한 입찰 전쟁 같은 경우는 아직 한국에서는 막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저자들이 말하는 대로 둘이 버는 경우에 해고 확률 역시 두 배라고 할 지라도, 입찰 전쟁으로 말미암아 주택에 대한 과다한 고정 지출이 없는 상황에서 그 수입의 상당수가 저축 또는 의식주에서의 추가적인 지출이나 문화 생활 및 자녀의 대학 등록금 등으로 소비되고 있기에 해고는 파산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일상 생활에서의 절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의 맞벌이 중산층이 우선적으로 신경써야 할 문제는 엄마의 직장 생활로 말미암은 가정에서의 다목적 안전망 부재에 따른 문제뿐이다.

 그런 까닭에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는 오히려 한국에서는 그 과소비 신화나 악덕 채무자 신화가 맞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미국에서와 같은 막대한 금액의 주택에 대한 고정 지출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중산층의 파산은 정부나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책임져야할 것이라기보다는 각 중산층 가정에서의 지출 합리화로 개선될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국과 같이 신용사회의 전통이 오랫동안 뿌리내리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신용의 접근성은 너무도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지난 수 세대 동안 은행에서의 엄격한 대출 자격 심사를 겪는 조부모, 부모 세대를 보고 자랐으며, 그 자신도 그런 심사를 겪었을지 모를 미국인들의 신용 생활은 분명 우리의 그것보다 보다 신중하고 절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주택에 막대한 금액을 소모하기로 작정한 것은 비단 중산층 가정의 꿈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이라는 사회 계층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신분의 유지와 상승의 동시 추구라는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교육이 주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 중산층들이 맞벌이를 통해서 '두 배로 확보된 실탄'을 일시에 그에 쏟아 부은 것이 미국의 중산층 위기의 본질이다. 그에 반해서 은행의 신용 대출이 일시에 개방되어 버린 한국에서는 과거 얼마동안 존재했던 엄격한 신용 대출은 단지 힘없는 중산층들에 대한 은행의 횡포 탓에 겪은 수모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 그들의 경제 생활에 있어서 '남의 돈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맞벌이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절대적인 소비 요인 없이도 절대적인 액수의 소비를 했으며, 그 결과 대다수 중산층들은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내가 한국 중산층들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단순히 내수 진작을 위해 신용 대출을 활성화시킨 정부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데는 바로 그들이 경제 생활에 있어서 미숙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기야 현재는 자신들이 쓴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인터넷 상에서 채권추심을 피하기 위한 노하우까지 공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이들이 있어서 오늘날 돈이 필요한 다른 중산층들은 더욱 높은 이자를 물고 있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장기주택저당대출(모기지)의 판매는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아직 자세한 약관은 모르지만 미국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 대출은 보다 광범위한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올 소지가 충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 사회는 중산층들이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 대출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한국 중산층의 맞벌이는 단순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 추세와 의식의 성장에 따른 성질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그 두 배로 확보된 실탄이 곧바로 교육을 위한 입찰 전쟁으로는 소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맞벌이 소득의 상당액이 일시적인 사교육비로 소모되기는 했어도, 그것은 장기적으로 주택에 재정을 소모해야하는 대출의 성격이 아니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미국보다 모든 지역에서 균질함을 유지했다거나, 한국 부모들이 미국 부모들에 비해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이 혼재된 한국의 교육 현실, 다수가 넉넉히 살지 못했던 시대의 경험을 통해 합리화된 부모의 경제적 능력 및 사회적 지위와 자녀 교육의 무관(無關)함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교육에 있어서의 부모의 관심, 자녀의 정신력 등 비물질적인 요인의 강조,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치안 상황 등으로 인해서 그동안 한국에서 교육과 경제력, 거주 지역 및 주택간의 관계는 그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에 촉발된 대표적인 평준화 지역인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강남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좋은 교육구에 대한 입찰 경쟁, 신분의 세습 및 상승의 수단으로써 새삼 강조되는 가운데 나날이 치솟는 교육에 대한 관심-특히 물질적 지원의 측면에서-, 최근 급류를 타고 있는 충청권으로의 행정 수도 이전 등의 이슈는 이제 부동산, 그 중에서도 특히 주택이 그동안보다도 더더욱 재산으로써 각광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동안도 때때로 분당, 일산 등의 신도시 건설과 여러 대규모 개발 사업 등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주택 가격의 대폭 상승이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주택의 재산 가치가 과대평가된 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동안 주택이 적정한 재산 가치를 가지는 국가로 예를 들었던 미국 역시도 실상은 여러 가지 요인, 그 중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한 좋은 교육구에 자리한 주택들을 중심으로 그 가치에 지나친 거품이 존재한지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주거 지역이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의 수준에 대한 문제야말로 일시적인 신도시 건설이나 대규모 토목 공사와 같은 요인보다 훨씬 강하고 지속적인 주택 가격의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주택 가격의 상승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중산층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온갖 대출 회사들의 배를 불려주는 기능 밖에 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그 집을 통해서 이익을 볼 수가 없다. 애초에 그들은 두 배의 소득을 배경으로 한 치열한 입찰 경쟁을 통해서 막대한 액수의 대출을 받아 그 집을 매입했으며, 은행의 교묘한 술수와 나날이 불안해지는 고용사정 및 가정의 안전망 부재로 인해 은행의 대출금을 다 갚고, 나날이 오르는 그 집을 잘 팔아서 이익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몇 배는 더 어렵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지적한 내용 중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은행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며, 또한 은행은 그들의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갖은 술수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미 교육 제도 자체의 모순과 중산층 가정의 맞벌이로 인해서 극대화된 '입찰 전쟁'에 편승해서 은행은 이미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고리대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신용 기록이 양호해서 충분히 저리로 대출 받을 수 있는 가정에도 교묘하게 고리 대출 상품을 떠 안기고, 유색인종들에게는 동일한 재정 상황의 백인 가정들보다도 무조건 고리를 물리고, 겉으로 보기에 다소 순박해보이거나 고령자인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고리 대출 상품을 추천하는 등, 그야말로 이런 이야기가 과연 미국의 그것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파산 신청 이후에 벌어지는, 법을 기꺼이 무시하는 온갖 치졸한 행태들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런 상황의 뒤에는 은행 업계의 로비와 신용의 접근권 보장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이해로 말미암아 이자율과 대출 자격에 대한 규제를 사실상 포기해버린 정부의 무책임함이 있다. 이렇듯이 모든 상황이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에서는 끊임없이 중산층의 파산을 부추기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그들의 표적은 이제 단순히 고리를 통해 원금과 이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중산층들이 그들의 돈으로 매입한 주택,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하긴 그 얼마나 매력적인 담보인가.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끊임없이 값이 오르고, 게다가 그 담보를 사기 위해서 또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리를 마다 않고 기꺼이 돈을 빌려서 또 사고. 게다가 그 중산층들은 비싸디 비싼 이자로 원금을 다 갚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한 명이 해고를 당하거나, 가족 중 누가 아프거나 해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해서 2차, 3차 모기지를 받고 종국에는 그네들에게 헐값에 그 집을 도로 넘기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들에게 그 비싼 이자를 물고 그 많은 돈을 빌려서 산 그 집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단지 은행의 영속적인 번영의 증거물이었을 뿐이다.

 어떤가? 끔찍하지 않은가? 나는 정말 끔찍했다. 그렇다, 분명 은행의 관점에서 볼 때 안정적으로 이자와 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중산층은 매력적인 고객이다. 그런 그들에게 은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소 꼼수를 피우는 것은 이해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의 그들은 완전히 중산층의 완전한 파산 그 자체를 바라고 있는 행태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들은 지금 있는 법망을 교묘히 피하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끊임없이 중산층들의 몰락을 부채질한다. 과거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속주민들의 세금인상을 추진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양을 키워서 털을 깎는 용도로 생각해야지 아예 잡아먹어서는 안된다." 과연 지금의 정부는 은행을 비롯한 대출 회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오늘의 중산층은 아무리 잡아먹어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새로운 중산층들이 '매에~'하고 자신들을 찾아오리라고 기대하는 걸까? 그들의 이러한 예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 해도 아마 그들이 잡아먹는 중산층들의 수가 새로 중산층에 편입되는 이들의 수보다 월등히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제시한 대책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공감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일단 이 책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가려서 보지 못하고, 또 국민의 반발을 우려한 은행권의 로비로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엇보다도 정부에 의한 지속적이고 엄밀한 이자율 규제와 대출 자격에 대한 엄격한 심사의 부활이야말로 중산층들이 더 이상 털을 깎이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히는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들이 원하는 집을 사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그들을 도태시키는 매몰찬 짓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단기적인 내수 진작과 금융업계의 집요한 로비에서 벗어나 중산층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정부가 필요한 이유는 중산층들이 보다 쉽게 많은 돈을 꿔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돈을 꿀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주도록 노력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시한 교육 제도에 있어서의 해결책은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바우처'라는 교육 서비스 이용권을 통해서 거주지와 학교의 연계성을 약화시키려는 생각은 이 책 한 권만을 읽은 내가 동의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것 같다. 물론 미국적 현실을 이 책으로부터 배운 후에 그것이 미국에 적합하다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을, 역시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에 적용하자고 말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근본적으로 미국과 달리 여전히 평준화와 비평준화가 맞붙고 있는 한국에서 난 평준화론자다. 물론 바우처를 통해 학교의 재정에 대해 학부모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학교의 교육 수준을 높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학교를 향해서 가정들이 경쟁하던 체제를, 가정을 위해 학교가 경쟁하는 체제로 바꾼다면 당장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국은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학교가 생기고, 또 그런 학교를 다녀야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찌할 셈인가? 물론 그런 학교를 폐교시키고 좋은 학교에 모든 아이들을 다니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문제가 있고 한 학교에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받아들였다가는 교육 수준이 도로 낮아질 위험성도 상존한다. 내가 표피만 보고 논하는 것이란 두려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궁극적으로는 전액 무상 교육으로 운영되는 프랑스식의 평준화 교육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데 있어서만큼은 다른 여타의 고민 없이 본인의 실력만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도록 시설과 커리큘럼면에서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이 있어야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정부 개입에 의한 전국적인 교사 대우의 향상이다. 단순한 보수의 균등화가 아니라 오히려 근무 지역의 여건에 따른 보수의 차등화와 인사 제도의 개선이 있어야한다. 교육이 단순한 경쟁이 아닌 미래의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는 긴 안목에 입각한 범정부적 지원으로 교육 문제의 극복 가능성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중산층은 그네들이 지닌 상식성과 건실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와 정부 모두에게 일종의 사각지대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알아서 제 앞가림을 아이는 부모가 다소 느슨하게 키우는 경향이 있듯이. 그러나 부모는 아이가 그렇게 똘똘하다고 해서 그 아이를 마구잡이로 착취하거나 부모의 책무를 대신 떠 안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어디까지나 아이이며, 잘 성장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부모는 이끌어준다. 반면에 우리의 정부와 사회는 알아서 제 앞가림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중산층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모두 방기하고 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해서 이미 대다수 중산층은 맞벌이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과거의 중산층이 그랬듯이, 그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중산층 스스로 해결하라고 내버려둔다. 세금만 두 배로 받아내고 나머지는 똘똘한 아이들에게 다 내맡겨둔 셈이다. 게다가 정부와 사회는 중산층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계층 상승 욕구도 제대로 소화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알아서 하렴'이라고 말하듯이. 그 결과는 현재와 같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학교 등록금-위 글에서 특별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끊임없는 등록금 인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정말이지 훌륭했다-과 밑도 끝도 없는 입찰 전쟁이라는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분명 맞벌이의 함정은 대다수 중산층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유의 자부심으로 말미암은 허영심과 끊임없이 추구하는 계층상승에의 욕구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커다랗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함정은 그렇게 그들이 위를 바라보는 동안 정부와 금융권이 파놓은 제도와 대출이라는 이름의 그것이다. 아직 우리의 현실과 본격적으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점도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면 이 책은 오히려 예언서라고 불려야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추세로 볼 때 이 상황은 우리에게도 머지 않은 미래일 테니 말이다. 부디 그런 미래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한번쯤 권하고 싶다. 다행히 사회과학-그 중에서도 경제학- 도서치고는 어렵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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