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이 징그러운 세상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요한 부덴부로크 영사(領事)는 사위인 그륀리히의 부채를 떠맡지 않기 위해서, 딸의 마음을 조심스레 떠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진의(眞意)를 알지 못했던 그의 딸, 토니 부덴부로크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아버지에게 말한다. 실상 그녀의 마음 속에 부부간의 사랑이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시민 사회의 윤리에 충실한 정숙한 부인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그녀에게서 인내심의 가면을 벗겨버린 것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입에 올린 '파산'이라는 단어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위인 그륀리히의 채무를 변제해주었다가는 그녀의 친정이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그 한 마디에 그녀는 결국 남편에 대해 남았던 일말의 애정마저 깨끗이 털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에게 맺혀있던 온갖 감정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긍지 높은 상인 가문의 여성으로써, 역시 건실하다고 생각되었던 상인에게 시집 온 그녀에게 '파산'이란 단어는 그만큼이나 놀랍고, 당혹스러우며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친정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애초에 겉도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남편으로 인해 부덴부로크 가가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와의 얼마 남지 않은 정을 완전히 떼어버린다.  

 그렇다. '파산'이란 단어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자존심의 문제다. 또한 그런 자존심은 비단 유서깊은 상류 상인 가문의 후예인 토니 부덴부로크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부덴부로크의 시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안락함을 누리고,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현대 사회에 들어서 급속히 성장한 '중산층'들은 비록 그들이 과거의 부덴부로크 가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과 명망은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사회를 이뤄나가는 중요한 계층이라는 자부심을 항상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은 비록 한 조직의 우두머리는 아니지만, 자신에게 다수의 사람들이 속해있는 사회와 조직이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현대 사회는 그 발전의 과정에서 과거에 비해서 보다 전문화된 방대한 인력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고, 괄목할 만한 대중의 의식적 성장은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역량 개발에 나서게 만들었다. 결국 사회의 발전과 그들 중산층의 성장은 그 선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상호간의 진보와 확대를 이끌어나갔다. 이런 그들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의 부덴부로크라고 할 만한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말하듯이 그네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현대의 중산층들에게는 애초에 결핍돼 있다거나, 나날이 쇠퇴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한 주장에는 궁극적으로 그 모든 미덕이 사회의 흐름을 선도해 온 사회지도층 자신들만의 전유물이며,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덴부로크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자신들보다 무절제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나를 포함한 중산층들조차도 실제로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하다는 생각을 의식의 밑바탕에 남겨두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제시되는 뚜렷한 증거나 수많은 당사자들에 대한 인터뷰 없이 중산층의 붕괴의 절대 다수가 무분별한 과소비에 기인한다고 믿거나(과소비 신화)-물론 나 역시도 절대 그런 이들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대다수 중산층 채무자들이 파산에 있어서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악덕 채무자 신화) 비단 사회 지도층 인사들만이 아닌 대다수 우리 중산층들도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도 그런 이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 중산층 대비, 과소비로 인한 파산자나 악덕 채무자의 비율은 한국이 더 높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중산층들이 지닌 그들의 자부심이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자신의 맡은 바 직무에서 충실하며 그를 통해 계층의 상승을 희망하도록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그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 나머지 그 자신을 파멸시킬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한 때 좁은 정읍 시내에서도 수많은 아줌마들로 하여금 거리에 파라솔을 치게 만들었던 신용카드 발급 열풍이나, 일각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송되면서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했던-비록 그 카드의 발급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명품 브랜드 의상과 자전거와 배낭으로 수수한 척 꾸미고 아내와의 사랑을 즐기던 정우성의 삼성카드 CF나 재벌의 본부인도 아닌 정부(情婦)쯤이나 되어야 저렇게 살 수 있으리라는 이영애의 LG카드 CF의 열풍을 바라보면서 이미 그런 생각을 가진지는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미 1∼2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중산층들은 하나둘씩 바로 그 카드로 말미암아 결국은 돌려 막고 막다가 지친 끝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에서 그들의 빚이 어디에 소모되었는지를 밝힌 내용들을 읽어보면 대부분은 주식 투자라던가, 사업의 실패, 가계(家計)의 어려움, 명품에 대한 소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외에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다른 사례들을 살펴보면 한국 중산층의 파산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뀔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배웠음은 분명하다. 분명 그들 책임의 일정 부분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정부와 사회의 것이며, 사회의 빼놓을 수 없는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온 그들로써는 파산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수모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그들이 꿈꿔온 모든 것의 붕괴를 의미하며, 타인들로 하여금 그가 헛된 이상을 가지고 방종하게 살아왔으며, 이 사회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미국의 과소비 신화와 악덕 채무자 신화를 논박하는 데 있어서 미국 중산층 가정들의 숨겨진 재정 소모 요인 중 가장 큰 것으로 지적한 주택에 대한 입찰 전쟁과 부모의 맞벌이로 인한 가정의 안전망 부재 중에서 주택에 대한 입찰 전쟁 같은 경우는 아직 한국에서는 막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저자들이 말하는 대로 둘이 버는 경우에 해고 확률 역시 두 배라고 할 지라도, 입찰 전쟁으로 말미암아 주택에 대한 과다한 고정 지출이 없는 상황에서 그 수입의 상당수가 저축 또는 의식주에서의 추가적인 지출이나 문화 생활 및 자녀의 대학 등록금 등으로 소비되고 있기에 해고는 파산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일상 생활에서의 절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의 맞벌이 중산층이 우선적으로 신경써야 할 문제는 엄마의 직장 생활로 말미암은 가정에서의 다목적 안전망 부재에 따른 문제뿐이다.

 그런 까닭에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는 오히려 한국에서는 그 과소비 신화나 악덕 채무자 신화가 맞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미국에서와 같은 막대한 금액의 주택에 대한 고정 지출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중산층의 파산은 정부나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책임져야할 것이라기보다는 각 중산층 가정에서의 지출 합리화로 개선될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국과 같이 신용사회의 전통이 오랫동안 뿌리내리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신용의 접근성은 너무도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지난 수 세대 동안 은행에서의 엄격한 대출 자격 심사를 겪는 조부모, 부모 세대를 보고 자랐으며, 그 자신도 그런 심사를 겪었을지 모를 미국인들의 신용 생활은 분명 우리의 그것보다 보다 신중하고 절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주택에 막대한 금액을 소모하기로 작정한 것은 비단 중산층 가정의 꿈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이라는 사회 계층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신분의 유지와 상승의 동시 추구라는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교육이 주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 중산층들이 맞벌이를 통해서 '두 배로 확보된 실탄'을 일시에 그에 쏟아 부은 것이 미국의 중산층 위기의 본질이다. 그에 반해서 은행의 신용 대출이 일시에 개방되어 버린 한국에서는 과거 얼마동안 존재했던 엄격한 신용 대출은 단지 힘없는 중산층들에 대한 은행의 횡포 탓에 겪은 수모 정도로 인식되었을 뿐, 그들의 경제 생활에 있어서 '남의 돈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맞벌이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절대적인 소비 요인 없이도 절대적인 액수의 소비를 했으며, 그 결과 대다수 중산층들은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내가 한국 중산층들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단순히 내수 진작을 위해 신용 대출을 활성화시킨 정부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데는 바로 그들이 경제 생활에 있어서 미숙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기야 현재는 자신들이 쓴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인터넷 상에서 채권추심을 피하기 위한 노하우까지 공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이들이 있어서 오늘날 돈이 필요한 다른 중산층들은 더욱 높은 이자를 물고 있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장기주택저당대출(모기지)의 판매는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아직 자세한 약관은 모르지만 미국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 대출은 보다 광범위한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올 소지가 충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 사회는 중산층들이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 대출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한국 중산층의 맞벌이는 단순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 추세와 의식의 성장에 따른 성질이 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그 두 배로 확보된 실탄이 곧바로 교육을 위한 입찰 전쟁으로는 소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맞벌이 소득의 상당액이 일시적인 사교육비로 소모되기는 했어도, 그것은 장기적으로 주택에 재정을 소모해야하는 대출의 성격이 아니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이 미국보다 모든 지역에서 균질함을 유지했다거나, 한국 부모들이 미국 부모들에 비해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평준화 지역과 비평준화 지역이 혼재된 한국의 교육 현실, 다수가 넉넉히 살지 못했던 시대의 경험을 통해 합리화된 부모의 경제적 능력 및 사회적 지위와 자녀 교육의 무관(無關)함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교육에 있어서의 부모의 관심, 자녀의 정신력 등 비물질적인 요인의 강조,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치안 상황 등으로 인해서 그동안 한국에서 교육과 경제력, 거주 지역 및 주택간의 관계는 그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에 촉발된 대표적인 평준화 지역인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강남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좋은 교육구에 대한 입찰 경쟁, 신분의 세습 및 상승의 수단으로써 새삼 강조되는 가운데 나날이 치솟는 교육에 대한 관심-특히 물질적 지원의 측면에서-, 최근 급류를 타고 있는 충청권으로의 행정 수도 이전 등의 이슈는 이제 부동산, 그 중에서도 특히 주택이 그동안보다도 더더욱 재산으로써 각광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동안도 때때로 분당, 일산 등의 신도시 건설과 여러 대규모 개발 사업 등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주택 가격의 대폭 상승이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주택의 재산 가치가 과대평가된 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동안 주택이 적정한 재산 가치를 가지는 국가로 예를 들었던 미국 역시도 실상은 여러 가지 요인, 그 중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한 좋은 교육구에 자리한 주택들을 중심으로 그 가치에 지나친 거품이 존재한지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주거 지역이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의 수준에 대한 문제야말로 일시적인 신도시 건설이나 대규모 토목 공사와 같은 요인보다 훨씬 강하고 지속적인 주택 가격의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주택 가격의 상승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중산층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온갖 대출 회사들의 배를 불려주는 기능 밖에 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그 집을 통해서 이익을 볼 수가 없다. 애초에 그들은 두 배의 소득을 배경으로 한 치열한 입찰 경쟁을 통해서 막대한 액수의 대출을 받아 그 집을 매입했으며, 은행의 교묘한 술수와 나날이 불안해지는 고용사정 및 가정의 안전망 부재로 인해 은행의 대출금을 다 갚고, 나날이 오르는 그 집을 잘 팔아서 이익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몇 배는 더 어렵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지적한 내용 중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은행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며, 또한 은행은 그들의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갖은 술수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미 교육 제도 자체의 모순과 중산층 가정의 맞벌이로 인해서 극대화된 '입찰 전쟁'에 편승해서 은행은 이미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고리대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신용 기록이 양호해서 충분히 저리로 대출 받을 수 있는 가정에도 교묘하게 고리 대출 상품을 떠 안기고, 유색인종들에게는 동일한 재정 상황의 백인 가정들보다도 무조건 고리를 물리고, 겉으로 보기에 다소 순박해보이거나 고령자인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고리 대출 상품을 추천하는 등, 그야말로 이런 이야기가 과연 미국의 그것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파산 신청 이후에 벌어지는, 법을 기꺼이 무시하는 온갖 치졸한 행태들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기본적으로 이런 상황의 뒤에는 은행 업계의 로비와 신용의 접근권 보장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이해로 말미암아 이자율과 대출 자격에 대한 규제를 사실상 포기해버린 정부의 무책임함이 있다. 이렇듯이 모든 상황이 자신들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에서는 끊임없이 중산층의 파산을 부추기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그들의 표적은 이제 단순히 고리를 통해 원금과 이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중산층들이 그들의 돈으로 매입한 주택,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하긴 그 얼마나 매력적인 담보인가.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끊임없이 값이 오르고, 게다가 그 담보를 사기 위해서 또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리를 마다 않고 기꺼이 돈을 빌려서 또 사고. 게다가 그 중산층들은 비싸디 비싼 이자로 원금을 다 갚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한 명이 해고를 당하거나, 가족 중 누가 아프거나 해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해서 2차, 3차 모기지를 받고 종국에는 그네들에게 헐값에 그 집을 도로 넘기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들에게 그 비싼 이자를 물고 그 많은 돈을 빌려서 산 그 집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단지 은행의 영속적인 번영의 증거물이었을 뿐이다.

 어떤가? 끔찍하지 않은가? 나는 정말 끔찍했다. 그렇다, 분명 은행의 관점에서 볼 때 안정적으로 이자와 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중산층은 매력적인 고객이다. 그런 그들에게 은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소 꼼수를 피우는 것은 이해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의 그들은 완전히 중산층의 완전한 파산 그 자체를 바라고 있는 행태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들은 지금 있는 법망을 교묘히 피하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끊임없이 중산층들의 몰락을 부채질한다. 과거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속주민들의 세금인상을 추진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양을 키워서 털을 깎는 용도로 생각해야지 아예 잡아먹어서는 안된다." 과연 지금의 정부는 은행을 비롯한 대출 회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오늘의 중산층은 아무리 잡아먹어도 어디선가 끊임없이 새로운 중산층들이 '매에~'하고 자신들을 찾아오리라고 기대하는 걸까? 그들의 이러한 예상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 해도 아마 그들이 잡아먹는 중산층들의 수가 새로 중산층에 편입되는 이들의 수보다 월등히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제시한 대책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공감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일단 이 책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가려서 보지 못하고, 또 국민의 반발을 우려한 은행권의 로비로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엇보다도 정부에 의한 지속적이고 엄밀한 이자율 규제와 대출 자격에 대한 엄격한 심사의 부활이야말로 중산층들이 더 이상 털을 깎이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히는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들이 원하는 집을 사고,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그들을 도태시키는 매몰찬 짓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단기적인 내수 진작과 금융업계의 집요한 로비에서 벗어나 중산층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정부가 필요한 이유는 중산층들이 보다 쉽게 많은 돈을 꿔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돈을 꿀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주도록 노력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시한 교육 제도에 있어서의 해결책은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바우처'라는 교육 서비스 이용권을 통해서 거주지와 학교의 연계성을 약화시키려는 생각은 이 책 한 권만을 읽은 내가 동의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것 같다. 물론 미국적 현실을 이 책으로부터 배운 후에 그것이 미국에 적합하다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을, 역시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에 적용하자고 말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근본적으로 미국과 달리 여전히 평준화와 비평준화가 맞붙고 있는 한국에서 난 평준화론자다. 물론 바우처를 통해 학교의 재정에 대해 학부모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학교의 교육 수준을 높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학교를 향해서 가정들이 경쟁하던 체제를, 가정을 위해 학교가 경쟁하는 체제로 바꾼다면 당장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국은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학교가 생기고, 또 그런 학교를 다녀야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찌할 셈인가? 물론 그런 학교를 폐교시키고 좋은 학교에 모든 아이들을 다니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문제가 있고 한 학교에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받아들였다가는 교육 수준이 도로 낮아질 위험성도 상존한다. 내가 표피만 보고 논하는 것이란 두려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궁극적으로는 전액 무상 교육으로 운영되는 프랑스식의 평준화 교육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데 있어서만큼은 다른 여타의 고민 없이 본인의 실력만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도록 시설과 커리큘럼면에서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이 있어야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정부 개입에 의한 전국적인 교사 대우의 향상이다. 단순한 보수의 균등화가 아니라 오히려 근무 지역의 여건에 따른 보수의 차등화와 인사 제도의 개선이 있어야한다. 교육이 단순한 경쟁이 아닌 미래의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는 긴 안목에 입각한 범정부적 지원으로 교육 문제의 극복 가능성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중산층은 그네들이 지닌 상식성과 건실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와 정부 모두에게 일종의 사각지대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알아서 제 앞가림을 아이는 부모가 다소 느슨하게 키우는 경향이 있듯이. 그러나 부모는 아이가 그렇게 똘똘하다고 해서 그 아이를 마구잡이로 착취하거나 부모의 책무를 대신 떠 안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어디까지나 아이이며, 잘 성장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부모는 이끌어준다. 반면에 우리의 정부와 사회는 알아서 제 앞가림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중산층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모두 방기하고 있다. 시대는 끊임없이 변해서 이미 대다수 중산층은 맞벌이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과거의 중산층이 그랬듯이, 그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중산층 스스로 해결하라고 내버려둔다. 세금만 두 배로 받아내고 나머지는 똘똘한 아이들에게 다 내맡겨둔 셈이다. 게다가 정부와 사회는 중산층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계층 상승 욕구도 제대로 소화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알아서 하렴'이라고 말하듯이. 그 결과는 현재와 같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학교 등록금-위 글에서 특별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끊임없는 등록금 인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정말이지 훌륭했다-과 밑도 끝도 없는 입찰 전쟁이라는 비상식적인 상황이다. 분명 맞벌이의 함정은 대다수 중산층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유의 자부심으로 말미암은 허영심과 끊임없이 추구하는 계층상승에의 욕구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커다랗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함정은 그렇게 그들이 위를 바라보는 동안 정부와 금융권이 파놓은 제도와 대출이라는 이름의 그것이다. 아직 우리의 현실과 본격적으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 점도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면 이 책은 오히려 예언서라고 불려야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추세로 볼 때 이 상황은 우리에게도 머지 않은 미래일 테니 말이다. 부디 그런 미래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한번쯤 권하고 싶다. 다행히 사회과학-그 중에서도 경제학- 도서치고는 어렵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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