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니까 사서 보는 거다, 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만화를 펼쳐 읽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할 지언정 베토벤의 삶을 동경하는 이는 없듯이, 1989년부터 오직 이 한 만화만 무려 16년 동안 그려온 작가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郞)가 만들어 내는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는 가츠가 살아야 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의 삶을 행여 닮을 까봐 두렵고 겁이 나기 때문이다.

가츠가 살아야만 하는 세계가 끝 간 데 없이 공포스러운 것은 그 속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정하는 최소한의 기계적인 이분법이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두움,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명징한 대비는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균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속의 주인공이 어떠한 고난에 맞서 악전고투하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적들을 물리치고 원하는 것-그것이 악의 세력에게 붙잡힌 공주이건, 왕국의 재건이건-을 손에 넣게 될 것임을 믿을 수 있기에 그다지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츠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가.  인간계는 마계에 의해 끊임없이 침범당하고, 권력자들의 착취는 일상적이며, 성직자들은 마녀사냥에서 흘리는 무고한 백성들의 피에 취해있고, 신으로부터는 구원이 오지 않는다.  희망이 사라져버린 세계.  상상을 초월하는 마물들, 그리고 신성과 마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사도들.  그들에게 무력하게 사지를 찢기고 벌거벗기운 채 강간당하고 삶의 터전인 마을이 불태워져도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인간들.  그리고 제물의 낙인이 찍혀 영원히 안식할 수 없는 가츠와,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소멸해버리고 말 캐스커.  이것들을 설명하는 절망이나 공포라는 말은 차라리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스물여섯 번째 단행본인 이 책에서 가츠 일행은 트롤의 본거지에서 마을 주민들-그래보았자 먹이로 삼기위한 어린아이들과 강간을 하기 위해 데려온 젊은 여자들뿐이었지만-을 구해내고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온몸을 던져 활로를 뚫는 가츠의 싸움을 통과 의례처럼 경험하게 된다.  무수한 마물에 맞서는 단 하나의 인간, 검은 검사(劍士) 가츠.  그림체는 한마디 말도 없이 펼쳐 놓은 두 페이지 가득 붓자국이 선명한 굵고 거친 선들로 채워지고 그것들은 종이를 찢어버릴 듯이, 남은 하나의 눈마저 멀게 해 버릴 듯이 분노한다.  그리고 한 쪽 눈이 먼 가츠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트롤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기 시작했을 때부터 글썽이던 나는 기어이 또 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과 그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살갗이 찢기고 혈관이 터지는 싸움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나는, 마치 내 등 뒤에 꽂혀있는 육중한 대검의 무게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가츠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이전 편에서 가츠를 돕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던 해골의 기사는 인간으로서 신이 되어버린 그리피스와 싸워야 하는 가츠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강하게 암시하며 사도들에 맞서 그와 함께 싸움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츠의 몸에 입혀지는 광전사(狂戰士, Berserk)의 갑옷.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고통도 잊은 채 벌어진 상처에서 온 몸으로 흘러내려 갑옷 밖으로 스미는 자신의 피에 젖은 채 싸우고 있는 가츠를 끝으로 이번 권의 이야기는 끝난다.  명부마도(冥付魔道)의 길이란 무엇이며 고드핸드는 누구인지, 불사신 조드 마저도 주인으로 숭배하는 '비상하는 흰 매' 그리피스의 계획은 무엇인지.  이번 편에서도 의문은 의문으로서 침묵할 뿐 우리는 여전히 암흑(暗黒) 속 인과(因果)의 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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