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하우스메이드 3권을 슬렁슬렁 좀 읽고 일디코 엔예디 감독의 [침묵의 친구]를 보고 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이 정화되어가는 느낌은 오랜만인지라 옆에 앉은 사람이 좀이 쑤셔 어쩔 줄 모르겠다는듯 계속 몸을 움직였음에도 짜증내지 않았다. 다만 에티켓은 그 나이 정도면 좀 지켜주면 좋겠다. 불이 켜지고 보니 얼추 마흔은 넘어보이던데.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년들과 중장년층이 대개였다. 씨네키드로 보이는 젊은이들 서넛 정도만 보였고. 만일 내가 그 나이에 그러니까 십대나 이십대여서 뭐 삼십대라고 해도 좋으니 그때 이 영화를 봤다면 얼마나 이 모든 것들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나이가 드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받아들여지는 건 이런 거구나 다시 오늘 경험으로 느꼈다. 나이 많은 게 삶에 있어서 독이 된다고 여기면 그쪽만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젊어지려고 하는 것도 같고. 사이보그가 아니니까 아무리 젊어지고싶어 발악을 하며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들만 먹는다고 해도 찰나가 오면 모든 것들이 멈추기 마련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 집에 있는 초록이들 모두에게 그리고 내 껌딱지 고양이에게 눈을 맞춰주며 사랑을 속삭였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까 그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길이라는 게 눈에 훤하게 보여서 오고가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걸 알고 싶다, 보고 싶다, 알리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아유르베다를 읽던 와중에 각 도샤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그런 게 꽤 중요한데 그걸 자꾸 거스르려고 하는 현상들이 발생해서 문제가 발생하고 오해의 소지가 생겨 질병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물론 아직 배우는 입장이니 섣불리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가는 와중에 궁금한 것들이 있으면 궁금한 것들이 있는대로 호기심이 생기면 호기심이 있는 그대로 물어보는 것이 더 좋다. 시대는 다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다 다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 은행나무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그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이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에게 기대면서 내 마음을 알아달라거나 내게 사랑을 달라는 요구도 집착도 없이 그저 기대고 있다가 아 이건 뭐지 싶어 고개를 들어 찬란한 나뭇잎을 바라볼 때. 1832년부터 코로나가 한창 유행한 2020년까지. 그러니까 약 200여년을 살아온 거대한 나무와 접점을 가졌던 세 명의 인물들 이야기. 일흔이 넘은 노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게 뭘까? 슬픔도 고통도 없이 전혀 다른 종인 인간과 식물이라는 두 존재가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과 그 온전한 일체감에 대해서. 양조위 오빠가 나체로 등장해서 순간 깜놀했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의 인간과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이니 이런 식으로 그려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간관계도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차단하는가 하면 그러지도 않아. 오해와 이해가 뒤섞여 엮어나가는 흐름도 좋았다. 적이 친구가 되었다가 친구가 적이 되는 게 인간사에 왜 자주 일어나는지. 이해가지 않던 부분도 다시 보면 이해가 살짝 될 수도. 누군가의 어릿광대가 될 필요는 없다. 영화 다 보고 해 쨍쨍할 때 신나서 걷는 동안.














개봉하게 되면 시간이 날 적마다 두 번 더 보러 가기로 했다. 태양이 아스팔트를 들끓게 만들기 전까지는 그래도 상영하지 않을까 싶다. 보는 동안 요가 풀로 연달아 세 시간 정도 한 느낌과 비슷한 충만감을 얻었다. 함께 요가를 하는 도반님 한 분이 우리중에 제일 아상이 강해, 라고 말했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 아상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반문하니 그래도 그대가 제일 강해, 라고 이야기해서 웃겨서 나만큼 그대도 강하잖아, 라고 말하니 아니야. 제일 쎄. 아상의 퀸이야, 라고 말했다. 그럼 어디 이 아상의 퀸이 아상으로 해탈을 해보도록 하지, 라고 말했더니 도반님이 막 웃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해하며 반갑습니다, 눈맞춤을 한 게 불과 1년 전이거늘 땀범벅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서로에게 아상이 너무 강해서 해탈하기 글렀어 쯧쯧, 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스승들이 들으면 꼴값들 한다, 라고 하시겠군 속으로 생각했다. 에너지의 흐름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는데 왜 난 그 선생님 아사나를 들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해서 그걸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직접 물어보니 그건 그냥 흐름인데 어떻게 설명을 하나, 라는 들으나 마나 한 대답을 들었다. 영화 장면들 장면들마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이 떠올랐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6-04-13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탈의 경지에 이르셨나이까?
아상이 강하다고 해도 왠지 해탈의 경지에 이르셨을 듯한 느낌이 팍 오네요.ㅋㅋㅋ

수이 2026-04-14 10:33   좋아요 1 | URL
제 나이 쉰이니까 해탈까지 다다르려면 앞으로 1500년 정도 더 살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이런 걸 몇 번 해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군 이 사실을 ㅋㅋ
 
The Housemaid Is Watching (Paperback)
Anonymous / Poisoned Pen Press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이 진실되다고 느끼는 편협한 존재이다. 보이는 그대로가 모두 사실이니 진실되다고 느끼는 것이고 잃어가는 것들은 늘어간다. 하여 인간이 왜 두 눈을 가지고 있는지 하여 제3의 눈이 왜 필요한지 그걸 다시 한번 알게 됐다. 삶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무형무색의 것들이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6-04-12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3권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제3의 눈이라….수이 님의 백자평을 읽으니 뭔가 막 상상이 되는 것 같아요.^^

수이 2026-04-12 21:52   좋아요 1 | URL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들을 우선적으로 보게 되는구나, 이걸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느꼈어요. 보이지 않는 너머에서 거대한 흐름이 일어나는데도 그저 편협되게. 밀리는 막판에 흐름을 바꾸는 역할이 탁월하구만, 이것도 또 ^^

단발머리 2026-04-12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이님 백자평이랑 이 책의 표지가 아주 딱이네요. 자신이 본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머리 속으로는 아는데, 자신의 경우에 대입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영원히.... 인간은 어느 정도 가려진 세계만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실의 단면만...

수이 2026-04-12 21:54   좋아요 1 | URL
진실의 단면만 알아야 다치지 않으니까 혹은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것도 같아요. 가려진 세계만 보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호기심이 많아서 좀이 쑤실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말 부분 혈압 올라서 뒷목 잡고 읽었습니다.
 
갱년기 요가 - 한 권으로 완성하는 갱년기 리셋 솔루션
산토시마 가오리 지음, 한귀숙 옮김 / 버터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스승 왈, ˝쓰지 않으면 잃는 법˝이라며 스퀏을 꼭 하라고 강요하셨다고. 내 스승 왈, ˝인간은 백만불짜리 몸을 갖고 있지만 그 몸의 가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갱년기 맞춰 테크닉에 대한 정보 좀 얻고자 했고 소소하게 몇 가지 얻어서 간다. 몸은 애초에 공존하기 위해 있음이 아닌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6-04-11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6-04-12 20:33   좋아요 1 | URL
하하하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걸요.
 








계속. 밀란 쿤데라 책은 독서모임 책인지라 시작. 고고한 척 우아한 척, 이라는 말을 듣고 또 한참 웃었다. 고고한 척, 자기가 힘들 때는 온갖 추한 모습을 다 보이는 마귀할멈이면서 그래도 고고한 척, 이라고 입을 삐죽거려서 그게 엄마 트레이트마크야, 아가, 어쩌겠니, 이모가 그걸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이고, 말하고 웃으며 안아줬다.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 선배가 내 뒷담화하고 다닐 때 세상 제일 고고한 척, 잘난 척, 이라고 했던 말도 떠오르는군. 난 그 언니 정말 좋아했는데. 친구들에게 내 뒷담화 막 하고 그렇게 졸업하실 줄이야. 언니 잘 살고 있나요?













본성에 따르는 삶에 대한 고대의 관점으로부터 근대적 관점으로의 이행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는 여기서 구성적 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기술해왔다. 이성의 위계적 질서를 반대하는 자연의 섭리적 계획은 이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도덕의 원천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그러한 원천들이 이성에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감정에도 있는 것인지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계획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고대의 모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면화되었음을 대변한다. 우리가 로크적 이신론을 선택해 이성을 유일한 접근방식으로 삼더라도 이것은 이제 도구적 이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경향, 우리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과 관련된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허치슨을 따른다면 내면으로의 전환은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우리 감정을 참고함으로써만 우리는 실제로 사물의 계획을 인정하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형태의 이신론은 18세기에 이루어진 진보와 더불어 점점 더 강한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리고 감정을 점점 더 많이 선택함으로써 감정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혁명이 일어난다. 어쩌면 어휘의 변화에서도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부분적으로 '정념passion'의 자리를 대체한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 자체는 감정적 삶의 복권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이것의 기저에는 도덕 심리학에서 일어난 매우 깊은 변화가 깔려 있다. 고대인들에게 정념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삶과 맺는 연관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그들은 이런 연관성을 정념 속에 어떤 목적이나 사태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암묵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평가를 단지 '의견'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환원적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도덕적 목표로 삼은 것은 우리의 정념이 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완벽하게 순종해 그 결과 훌륭한 사람은 반드시 필요할 때만 그리고 오직 그런 정도로만 정념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정념은 프로네시스phronēsis[실천적 지혜]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와 더불어 첫 번째 변화가 찾아온다. 정념은 이제 암묵적인 평가보다는 영육의 전체적인 통일에서 맡고 있는 기능과 관련을 맺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계획과 관련된 근대적 틀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의 목표는 정념을 적절한 기능에 종속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능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거리를 둔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정념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우리의 정념은 냉정하고 거리를 둔 오성이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

감정에 대한 18세기 이론과 더불어 우리는 또 하나의 깊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여전히 계획이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이것에 접근하는 전형적인 길은 감정을 통해서다. 이제는 감정이 규범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옳은 것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우리의 통상적인 감정을 체험함으로써 얻게 된다. 이것에는 우리가 악습이나 잘못된 견해의 왜곡된 영향을 극복하는 것이 포함된다. - 허치슨은 외재적 이론이 어떻게 우리의 도덕 감정을 잘못 평가하게 만들며, 이로 인해 그러한 감정의 기가 꺾이게 되는지를 부단히 지적한다. 허치슨 말대로 우리는 이런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선과 악의 영역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도덕 감정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색맹을 교정하기 위해 질병으로 인해 손상된 신체 상태를 이성적으로 고려한다고 해서 내가 오직 시각을 통해 색깔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변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감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확실히 도덕적 선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투사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대로 어떤 것이 좋다는 느낌이 그것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되지 않은 정상적 감정이 내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진정 구성적 선인 사물의 계획에 접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의 일탈은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이 낳는 통찰은 이성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단지 사물에 대한 암묵적인 평가로 독립적으로 사용 가능한 이성의 위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충분한 인식을 거쳐 이제 거리를 둔 이성에 의해 정상화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기능에 수반하는 감정적 현상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체가 선을 평가하는 부분이고, 이성은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고대의 이론도 데카르트의 이론도 부여하지 않았던 유례없는 지위를 도덕 생활에서 누린다.

감정에 부여된 새로운 지위로 인해 고대적 자연관과는 완전히 다르게 자연을 규범적인 것으로 보는 근대적 관점을 낳았던 혁명은 완성된다. 고대 사상가들에 의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질서를 부여하며, 그런 질서는 우리가 타락하지 않는 한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의 본보기를 따르도록 격려한다. 반면 근대적 관점은 자연을 올바른 충동이나 감정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를 관찰함으로써가 아니라 올바른 내적 충동을 경험함으로써 자연과 전형적으로 그리고 핵심적으로 만나게 된다. 규범으로서의 자연은 내적 성향이다. 그것은 루소가 주장하게 될 내적 목소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곧 낭만파들에 의해 보다 풍부하고 깊은 내면성으로 바뀌게 된다. (577-58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6-04-06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고한 척하는 게 뭔지...체감이 안되네요..^^;;

수이 2026-04-06 14:54   좋아요 1 | URL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니까 거리감이 있다는 뜻 아닐까 정도로 생각해봤습니다. 감정적 유대를 원해서 한 이야기에 잣대 두고 이야기하면 아무래도 잘난 척 고고한 척 보이지 않을까 해요. 물론 비슷한 계열 인간들끼리는 그런 거 없지만요. 그러니까 T 혹은 F 이런 차이 정도 아닐까요?;;;

건수하 2026-04-06 14: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연필로 친 동그라미마저 고고해보이지 말입니다 ^^

수이 2026-04-06 15:06   좋아요 3 | URL
🙄🤪😏

단발머리 2026-04-06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고고했으면 ㅋㅋㅋㅋㅋㅋ 열여덟이 열일곱에게, 아니면 열아홉이 열여덟에게 이런 고상한 뒷담화를 했단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언니, 고고하게 잘 살고 있나요?

수이 2026-04-06 21:45   좋아요 1 | URL
그 언니는 고고하게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싸가지후배는 여전히 고고한 척 하며 살고 있습니다 ㅋㅋㅋ
 


















동생과 장을 보면서 너무 밀가루와 고깃덩이만 잔뜩 사는 거 아닌가 하고 반성을 좀 했고 작년 오늘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올해 너무 방만하게 살고 있는 거 같아서 안다르 조깅복을 사야겠다 했고 하지만 사고서 또 하지 않으면 꽝인데 하면서도 장바구니 안에 넣어놓았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 단지 옆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1년 동안 10억이 올랐다고 했다. 동생과 친한 나이 많은 언니가 이번에 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를 하나 사두라고, 그럼 1년 후에 10억 더 벌 거라고 했다고 한다. 신기한 세상이다, 라는 느낌만 들뿐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건 어떤 걸 의미할까?

살이 찌는 건 정말 눈 깜짝할 새, 하지만 빼는 건 의지를 갖고 하는 경우 다른 이야기가 된다. 스트레스 잔뜩 받아서 밥을 도저히 못 먹을 경우에는 쑥쑥 빠지지만 소화 기관이 건강해서 사는 게 꽤 흥미롭게 느껴지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먹는 즐거움도 중요한지라. 틈새 운동을 자주 하고_ 인간의 몸은 움직이는 만큼 군살이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_ 틈새 미온수를 마시는 일을 자주 한다. 중간중간 스케줄 틈틈 책을 읽고 커피를 마셨다. 오늘의 단어를 외우고 또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지라 준비를 하고 후다닥 나가야 한다. 어쨌거나 봄은 봄이로구나 싶다. 20년 같이 살던 친구 커플이 이혼했고 이혼 도장 찍자마자 재빨리 재혼을 하는 걸 보고 이햐 놀라웠다.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일. 유교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헉 하고 놀랐다. 사랑에 광속도로 빠지고 바로 재혼을 하는 것도 대단해보였다. 친구도 친구의 전남편도 같은 소리를 하긴 했다. 우리가 이 정도 살아봤으니 아는 거지만 우리 평생에 몇 번이나 사랑을 할 수 있겠어? 라고. 동의한다. 아주 자그마한 결혼식,이라고 해서 기대.

머리 박박 밀고 절에 들어가겠다는 후배를 간절하게 말리면서 그냥 이혼하고 편하게 살아라 설득하며 소주 두 병을 마셨고 여전히 헤롱헤롱. 월1회 하는 독서모임에 참석하자고 친구 녀석이 꼬셔서 또 꼬드김에 넘어갔다. 독서모임 멤버들이 꽤 유쾌하다. 모임에 참석하기 전 시간이 맞아 커피만 같이 마셔봤지만. 삶에 있어서 사랑과 자유가 차지하는 영역이 그닥 크지 않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과는 겹쳐짐이 서서히 흐릿해져간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네가 틀렸다, 네가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은 옳지 않다, 그러니 내 말을 따라라, 라고 직간접적으로 조언하고 충고하는 이들과도 전혀 아쉬움 없이 아듀를 고하고 연락처를 삭제한다. 그 말이 옳고 그 조언이 진실되지 않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그 옳고 진실된 조언은 자신의 삶에만 해당이 된다. 다른 인생에도 그 조언이 적절한 효력을 발휘할 거라고 여기는 건 좀 지나치게 오만하지 않은가 싶다. 웃긴 건 또 그만큼 새로운 이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삶이란. 무한에 가까운 개인들, 그러니까 무한에 가까운 고유성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만나 어떤 일들이 생겨나고 또 어떤 에피소드들이 탄생하는지는 미리 짐작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잠깐 짬이 나서 단골카페에 들려 병렬독서를 했다.

In speaking and acting, we show our uniqueness.

Im Spreshen und Handeln zeigen wir unsere Einzigartigkeit.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6-04-05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ㅋㅋㅋㅋㅋㅋㅋ 새폴스키 <행동> 읽고 있던중 아니었어요? 다른 책으로 넘어 오셨네요. 지금까지 안 읽고 어떻게 사셨던 겁니까? ㅋㅋㅋㅋㅋ

옳고 진실한 조언은 자신의 삶에만 해당되는 거 맞는 거 같아요. 날 사랑하는 사람의 조언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데,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의 조언이라면 더더욱이요~~ 크게 말하지 못해도 반사해야지요. (반사!)

수이 2026-04-06 10:33   좋아요 1 | URL
행동 읽고 있어요. 그나저나 이젠 벽돌책들 다 시작하셔야겠네요. 어쩔 수 없이. :)

저는 크게 말하는 편인지라 푸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