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 밀란 쿤데라 책은 독서모임 책인지라 시작. 고고한 척 우아한 척, 이라는 말을 듣고 또 한참 웃었다. 고고한 척, 자기가 힘들 때는 온갖 추한 모습을 다 보이는 마귀할멈이면서 그래도 고고한 척, 이라고 입을 삐죽거려서 그게 엄마 트레이트마크야, 아가, 어쩌겠니, 이모가 그걸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이고, 말하고 웃으며 안아줬다.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 선배가 내 뒷담화하고 다닐 때 세상 제일 고고한 척, 잘난 척, 이라고 했던 말도 떠오르는군. 난 그 언니 정말 좋아했는데. 친구들에게 내 뒷담화 막 하고 그렇게 졸업하실 줄이야. 언니 잘 살고 있나요?



본성에 따르는 삶에 대한 고대의 관점으로부터 근대적 관점으로의 이행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는 여기서 구성적 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기술해왔다. 이성의 위계적 질서를 반대하는 자연의 섭리적 계획은 이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도덕의 원천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그러한 원천들이 이성에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감정에도 있는 것인지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계획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고대의 모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면화되었음을 대변한다. 우리가 로크적 이신론을 선택해 이성을 유일한 접근방식으로 삼더라도 이것은 이제 도구적 이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경향, 우리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과 관련된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허치슨을 따른다면 내면으로의 전환은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우리 감정을 참고함으로써만 우리는 실제로 사물의 계획을 인정하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형태의 이신론은 18세기에 이루어진 진보와 더불어 점점 더 강한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리고 감정을 점점 더 많이 선택함으로써 감정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혁명이 일어난다. 어쩌면 어휘의 변화에서도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부분적으로 '정념passion'의 자리를 대체한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 자체는 감정적 삶의 복권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이것의 기저에는 도덕 심리학에서 일어난 매우 깊은 변화가 깔려 있다. 고대인들에게 정념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삶과 맺는 연관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그들은 이런 연관성을 정념 속에 어떤 목적이나 사태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암묵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평가를 단지 '의견'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환원적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도덕적 목표로 삼은 것은 우리의 정념이 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완벽하게 순종해 그 결과 훌륭한 사람은 반드시 필요할 때만 그리고 오직 그런 정도로만 정념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정념은 프로네시스phronēsis[실천적 지혜]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데카르트와 더불어 첫 번째 변화가 찾아온다. 정념은 이제 암묵적인 평가보다는 영육의 전체적인 통일에서 맡고 있는 기능과 관련을 맺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계획과 관련된 근대적 틀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의 목표는 정념을 적절한 기능에 종속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능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거리를 둔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정념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우리의 정념은 냉정하고 거리를 둔 오성이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
감정에 대한 18세기 이론과 더불어 우리는 또 하나의 깊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여전히 계획이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이것에 접근하는 전형적인 길은 감정을 통해서다. 이제는 감정이 규범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옳은 것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우리의 통상적인 감정을 체험함으로써 얻게 된다. 이것에는 우리가 악습이나 잘못된 견해의 왜곡된 영향을 극복하는 것이 포함된다. - 허치슨은 외재적 이론이 어떻게 우리의 도덕 감정을 잘못 평가하게 만들며, 이로 인해 그러한 감정의 기가 꺾이게 되는지를 부단히 지적한다. 허치슨 말대로 우리는 이런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선과 악의 영역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도덕 감정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색맹을 교정하기 위해 질병으로 인해 손상된 신체 상태를 이성적으로 고려한다고 해서 내가 오직 시각을 통해 색깔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변화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감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확실히 도덕적 선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투사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대로 어떤 것이 좋다는 느낌이 그것을 선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되지 않은 정상적 감정이 내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진정 구성적 선인 사물의 계획에 접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의 일탈은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이 낳는 통찰은 이성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단지 사물에 대한 암묵적인 평가로 독립적으로 사용 가능한 이성의 위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충분한 인식을 거쳐 이제 거리를 둔 이성에 의해 정상화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기능에 수반하는 감정적 현상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체가 선을 평가하는 부분이고, 이성은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고대의 이론도 데카르트의 이론도 부여하지 않았던 유례없는 지위를 도덕 생활에서 누린다.
감정에 부여된 새로운 지위로 인해 고대적 자연관과는 완전히 다르게 자연을 규범적인 것으로 보는 근대적 관점을 낳았던 혁명은 완성된다. 고대 사상가들에 의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질서를 부여하며, 그런 질서는 우리가 타락하지 않는 한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의 본보기를 따르도록 격려한다. 반면 근대적 관점은 자연을 올바른 충동이나 감정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질서를 관찰함으로써가 아니라 올바른 내적 충동을 경험함으로써 자연과 전형적으로 그리고 핵심적으로 만나게 된다. 규범으로서의 자연은 내적 성향이다. 그것은 루소가 주장하게 될 내적 목소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곧 낭만파들에 의해 보다 풍부하고 깊은 내면성으로 바뀌게 된다. (577-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