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님 오시는 날








무로부터의Ex nihilo 창조

기독교 교의에 ‘신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는 종교적 언표와 해석이지만 라캉은 거꾸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야말로 진정한 무신론을 가능케 한다고 해석한다.
과학은 우리 세상이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과학은 무신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세상이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무신론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신 개념은 인과율의 적용에서 벗어나며 스스로 그러한 인과율을 지배한다. 또한 스피노자처럼 이 인과율을 철저하게 적용해 신도 그것의 지배하에 있다는 범신론도 생각할 수 있다. 인과율이란 존재하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으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버린다. 하지만 das Ding과 같은 무의 장이 있다고 하면 - 인과율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 - 이 장은 인과율의 범위 밖으로 나오게될 것이다. 그곳은 주체가 무엇인가를 창조하길 기다리는 장으로, 그곳에서 창조된 것이 모든 일에 대한 인과의 기원이 된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란 신에 대한 도전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어느 시대에나 진정한 예술가는 반역 정신을 갖고 신을 부정한다. - P227

그는 das Ding의 장에서 고독과 대치하고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떠안는다. 신이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예술가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칭조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경증인 사람(보통 사람)에게 창작 활동이 힘든 이유는 그가 das Ding의 장에 어떤 형태로든 신을 놓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창작한다는 것은 신과 창조의 장에서 서로 다툰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은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 결과 그는 자기를 지켜주고 있는 신을 잃고 죽음의 장소에 직면하게 되어 존재가 위험해진다. 신경증인 사람에게 창조는 예를 들어 타자와의 경합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잃을 위험을 눈앞에 두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에게는 창작이 자기 존재를 보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그것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das Ding의 무를 기반으로 그것 주변에 창조물을 두는 것이라고 라캉은 해석한다. 예를 들어 내부가 비어 있는 마카로니를 만든다고 유머러스한 비유를 한다. 또 하나의 예로 인간이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도구 중의 하나인 항아리를 들 수 있다.
항아리 내부는 비어 있으며 이 비어 있는 공간을 감싸는 외벽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이 항아리는 앞서 서술한 빈곳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적 창조물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항아리는 내부의 빈곳을 무엇인가로 채우고, 또한 그것을 꺼내고 비움으로써 기능하는 도구이다. 이것은 정확히 시니피앙의 기능과도 일치한다. 시니피앙은 처음 - P228

에는 기호signe에서 태어나지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종소리에 대한 반응으로 위액이 분비될 경우 종소리는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기호로 존재한다. 기호는그 자체에 고유한 내용이 있으며, 그것은 충족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시니피앙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와 조합하며, 기호로서의 내용을 배제하고 안이 비어 있는 구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시니피앙은 내용이 비어 있어야만 비로소 다양한 의미가 그곳에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 항아리를 만드는 것, 시니피앙, 이 모든 것은 무를 내포하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 P229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원죄 그리고 죄의 구원은 여기서 진술하는생각과 매우 비슷하다. 그리스도교 - 이 종교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 는 종교적 신화 형태로 주체적 구조를 드러낸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죄책감은 주체의 존재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석을 받으려고 오는 환자는 대부분 강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무척 신중하고 결벽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죄책감이 강하게 그들을 짓누르게 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인간을 움직이기 위해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 대단히 유효하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사실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슈만의 예처럼 죄책감이 무서운 힘을 갖고 있는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그의 최후의 보루로 그것이 파괴되면 선명한 모습으로 악마가 나타나고 그에게 대가의 지불을 요구하게 된다.
괴테(1749~1832년)의 『파우스트」에도 동일한 논리가 나타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점이 정신분석의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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