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배부르다. 책 읽고 푸근한 느낌을 받기도 참 오랫만이다. 역시 배부를려면 여러 가지를 한번에 맛봐야 하는가...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싶기는 하지만 시간적, 물리적인 제약때문에 쉽게 보기는 힘든데 그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것은 역시나 단편
모음집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딱 어울리는 책이라고 할만한 책이다.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한 여러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비록 단편이긴
해도 작가 개개인의 글쓰기 느낌이 잘 살아있어서 한편으로도 그 재미를 잘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추리소설가협회라는 곳에서 뉴욕이라는 공통된 지역을 배경으로 여러 작가들이 쓴 미스터리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의 이면을 보면 정말 화려하다. 현재 미국에서 그야말로 꽤나 이름을 알리는 작가들이 총망라되어있다.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토머스 H
쿡, 메리 히긴스 클라크 등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사람들이 많다. 그 이름들만 봐도 책에 대한 기대가 상승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잘 차려진 전라도 한정식을 먹은듯한 느낌이랄까. 반찬 가짓수도 많지만 그 반찬 하나 하나가 다 정성이 깃들인 빼어난
맛으로 유명한 전라도 한정식처럼 여기에 실린 각 단편들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다 다르면서도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뼈대를 잘 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추리 미스터리 장르는 그 특성상 다른 단편에 비해서 짧은 분량으로 그 느낌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힘들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진실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복잡해서 짧게 압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역시 대가는 대가인지 연장탓을 하지 않고 각 작가들이 자신들의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한 느낌이다. 물론 장편에 비해서 구조적인
치밀함이나 이야기의 재미가 약한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 실린 작품만 해도 장르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생각이 들었다.
책은 제일 먼저 리 차일드의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작가의 대표 캐릭터인 잭 리처가 나오는데 오랫만에 뉴욕에 온
잭 리처가 우연히 맞닥뜨린 상황에서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실 잭 리처는 소설에서 종횡무진 활약은 해도 뭔가 좀 도 닦은듯이 초연한 스타일인데
여기에서도 그 담백한 느낌이 잘 드러난다. 잭이 느꼈던 뉴욕은 어쩐지 쓸쓸하면서 조용한 느낌을 주는거 같다.
줄리 하이지의 [이상한 나라의 그녀]는 가벼운 미스터리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플롯이 아주 복잡한것이 아니기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결말이
예상되기는 하는데 추리소설의 재미를 잘 느낄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낸시 피커드의 [진실을 말할 것]은 고전적인 추리 소설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록된 작품중에서 꽤 인상적인 느낌을 준 작품이다. 내용이 좀더
길었으면 좋았을꺼란 생각이 든다. 주인공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여러 사건이 있었다면 더 풍성했을꺼 같다.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 에서 토머스 H 쿡은 그 특유의 문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가는 아주 복잡하고 반전이 뛰어난 미스터리를
쓰지는 않지만 뭔가 알려지지 않는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참 서정적이면서 부드럽게 쓰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이 잘 드러 난거 같았다.
S.J 로전의 [친용운 여사의 아들 중매]는 유쾌하게 봤던 작품이었다. 아마추어 탐정인 친용운 여사가 나오는 작품인데 이른바 할매
탐정이다. 할매 스파이로 유명한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가 생각나게 하는 재미난 작품이었다.
반전의 제왕인 제프리 디버의 [블리커 가의 베이커]는 두드러진 반전이 나오진 않지만 제프리 디버 특유의 물흐르듯 유연한 진행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사실 제프리 디버는 신선한 반전을 잘 하기로 유명한데 이런 단편보다는 장편에 더 장기인 작가이긴 하다.
대략적으로 인상적인 작품들을 이야기해봤는데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미스터리 단편이 주는 맛을 느끼기에는 괜찮은 작품이었다. 사실 이 책은
어느정도 장르 소설을 많이 접한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디저트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편하게 오며가며 읽어도 호흡이 떨어지지 않을 만한
내용같은 느낌이다.
미스터리 추리 장르쪽 책을 많이 접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긴 장편이 아니라서 분량 부담이 크지
않으면서도 어느정도 장르의 특성을 확인하면서 그 맛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편을 접하면서 점점 범위를 넓혀간다면 이 장르의 진정한 맛과
멋에 빠지게 될꺼 같다.
정성들인 여러 반찬이 있다고 해도 정성과는 별도로 다 맛있는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실린 17편의 작품이 하나같이 다 100점인건
아니었다. 기대에 비해서 밋밋한 편도 있었고 반대로 별 생각없이 보다가 의외의 재미를 느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들 글쓰기에는 나름의
실력들이 있는 작가들이라서 전체적으로 단편의 묘미를 잘 느낄수 있어서 편하게 볼수있는 책이었다.
미추리소설가협회에서 이런식의 단편집을 이 책 말고도 또 엮었는데 그것도 나왔음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