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령의 해부
앤드루 테일러 지음, 김하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가늠이 안되는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 유령을 잡아서 해부하는 내용인지 아니면 유령으로 느껴지는 어떤 존재를 추적해간다는 말인지 알수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지만.
'아메리칸 보이'에서 유려하고 신선한 이야기 솜씨를 보인 앤드루 테일러가 이번에 들고 나온 소재는 바로 유령이다. 유령이 막 휙휙 날아다니고 그런 공포 소설이 아니라 유령이란 소재 자체가 극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것이다. 배경이 되는 시대가 18세기라서 등장인물들이 더 잘 빠져들수도 있겠다.
무대는 18세기 영국 런던 캠브리지의 예루살렘 칼리지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 대학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거기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한 여자가 알수없는 이유로 죽은 상태로 발견이 되었고 그녀와 관련되어 대학의 학생인 프랭크가 유령을 봤다면서 미쳐버렸다.
프랭크의 어머니는 아들의 상태를 살피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고용한다. 홀즈워스.
그는 서적상이었는데 사고로 아들을 잃고 연이어 아내까지 잃고 삶의 낙도 없이 그냥 그냥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고용이 된 이유는 유령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쓴 '유령의 해부'라는 책을 썼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유령을 가장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추적(?) 할수 있으므로 자신의 아들도 구할수 있다고 여겼기에 고용이 된 것이었다.
예루살렘 대학으로 향한 홀즈워스는 환대를 받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면서도 뭔가 감추어진듯한 공기를 느끼게 되고 대학내의 구성원들도 평범하지는 않다. 프랭크는 과연 정신병인가 아니면 진짜 유령을 본것인가를 찬찬히 살펴가는 홀즈워스. 작은 실마리에서 드디어 예루살렘 대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할꺼같은 18세기 영국 대학을 세밀하게 그린 덕분에 그 당시 영국의 사회상의 한 단면을 알수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여전히 돈과 권력을 위한 암투가 있었고 고상함 속에 감추어진 어두움이 있었다. 흥미로왔던것은 대학내의 비밀클럽에 관한 것이다. 아마 실제로 있었을것으로 추정되는 클럽이기에 소설상에 표현이 된거 같은데 이 클럽의 '행사'가 극의 사건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소재 자체는 흥미로왔지만 내용 자체는 초반에 좀 지루했다. 뭔가 스릴있고 아기자기한 사건을 기대했다면 이 책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시대적인 상황 묘사에 초반부가 세밀하게 그려져서 진도가 잘 나가는건 아니다. 중반을 지나가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해서 종반쯤에는 가속도가 붙는 형국이다. 하지만 초반의 내용도 비록 좀 느린 전개긴 했지만 잘 읽는다면 뒷부분의 내용을 뒷바침하는 여러 장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난뒤에 처음 부분을 다시 좀 읽어보니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랄까.
지은이가 팩션 추리 즉 사실을 결합한 이야기에 강점이 있어서 그런지 18세기 영국 대학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각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도 주인공의 삶과 결부해서 세밀하게 잘 드러내고 있어서 그 당시를 편안히 느낄수 있다. 다만 제목에서 풍기듯이 진짜 유령을 잡으러 스릴있게 간다던가 하는 그런 전개는 없어서 좀 심심하게 느낄수 있겠다. 끝에가서 약간의 반전이 있지만 그조차도 먼가 여백의 미로 남겨놓는듯한 느낌이다.
오랫만에 보는 '느린' 이야기였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작다면 작은 사건이고 별 특색있는 소재라고 볼수도 없는데도 긴 장편으로 이야기를 꾸려가고 등장 인물 마다 나름의 입체성을 부여하여 실체감있게 묘사한것도 재미나게 볼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