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색환시행
온다 리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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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는 '히가시노 게이고' 와 함께 여러 장르의 책들을 그야말로 공장 처럼 많이 펴내는 대표적인 장르 전문 작가다.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많긴 하지만 SF나 공포 문학의 책들도 종종 쓰는데 전체적으로 작품의 질이 균일한 편이다. 그래서 책이 나오면 그 이름값 만으로도 읽고 싶어지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이번에 나온 이 책은 작가의 필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 내용인데 무려 15년 만에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있었던 어떤 일을 실마리 삼아 오랫동안 내용을 숙성 시켜 서 쓴 글인데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서 분량이 길다. 내용도 특이하다기 보다는 있을 법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새삼 작가의 글쓰기 능력을 다시 보게 할 정도로 밀도 있게 쓴 책이었다.


책의 주된 소재는 소설 '밤이 끝나는 곳' 이다. 이 소설은 영상화를 시도했는데 세 번이나 중단되었다고 한다. 모두 의심스러운 사고가 일어나서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를 찍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보니 계속해서 영상화를 시도할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저주 받았다고 느껴져서 더 이상의 진척이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 것인가. 주인공인 소설가 '후키야 고즈에' 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하는데 마침 이 상황의 관계자가 모두 모이는 크루즈 여행에 함께 갈 기회가 생긴다. 


크루즈 선상에는 이 소설의 첫 번째 감독이었던 쓰노가에와 프로듀서 신도, 편집자 시마자키 그리고 만화가 콤비인 마나베 자매가 타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소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또 소설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의뭉스러운 것은 고즈에의 남편인 마사하루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각기 결혼을 하고 이번에 재혼을 한 사이인데 마사하루의 전처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사사쿠라 이즈미' 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이즈미는 시나리오를 쓰고 자살을 했기에 나중에 고즈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왜 남편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뭔가 다른 내막이 있는 것인가. 고즈에는 묘한 느낌을 가지면서 크루즈 배를 타게 된다. 


책은 크루즈 여행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눈 다는 점에서 '밀실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지만 아주 긴장감 높은 상태는 아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저주 받은 소설에 관한 여러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사건의 진실을 맞춰 갈려고 한다. 작품과 관련해서 새로운 해석도 해 보고 각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 보면서 작가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밤이 끝나는 곳' 을 쓴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는 이 작품을 끝으로 사라졌기에 더 의아한 상태다. 


원작자는 사라져서 생사를 알 수가 없고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자살했고 영화를 찍는 도중에 배우나 스태프가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니까 영상화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와중에 세 번이나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이쯤 되면 대체 이 소설이 무엇이길래 또 작가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질 법도 하다. 책은 그런 수수께끼의 상황을 되짚어 보면서 그 속의 숨은 의미를 찾는 과정을 가진다.


책 분량이 좀 많긴 하지만 아주 복잡한 내용은 아니기에 술술 잘 읽힌다. 등장 인물의 처음에는 좀 헷갈리지만 이들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어서 나중에는 잘 구분이 된다. 책의 제목에 '둔색' 이라는 단어는 검은 바다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모호함'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책 내용 역시 애매하고 모호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있다. 영상화 제작이 세 번이나 중단된 것 자체가 뭔가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책은 미스터리의 형실을 취하지만 뭔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도 있고 판타지적인 면도 있다. 이 모든 장르에서 실력 발휘하는 작가가 자연스럽게 내용 속에 잘 녹여낸 것 같다.


책은 복잡하지 않고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꽤 탄탄하고 치밀한 구성이다. 6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어느 한 부분이 처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전개가 되고 있고 어렵지 않게 쓰여 져서 읽기가 좋다. 작가의 다른 작품 보다 쉽게 잘 읽힌다. 결말은 책 제목이 내포한 것처럼 약간 애매하면서 열린 결말같은 느낌도 나는데 대체 책 속 원작이 뭐였길래 이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가는 소설 속 저주 받은 소설도 따로 독립해서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밤이 끝나는 곳'과 함께 세트로 읽으면 더 좋다. 두 작품 모두 작가 스타일을 확실히 느끼게 한 책이었다. 흔한데 흔하지 않은 묘한 느낌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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