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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단테의 신곡이라는 문학 작품이 있다. 중세에 쓰여진 장편 대서사시인데 당대의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집성된 명작이라고 하는 책이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의 모습을 그린 책인데 그 발상과 내용의 뛰어남으로 인해 후세의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영감을 주는 책이다.
특히 지옥과 연옥이라는 개념은 뒤에 나오는 많은 추리소설들에게 큰 모티브로 작용한다. 특히 범죄와 관련된 소설에는 '악'이 필수적으로 등장하기에 단테의 신곡이라는 소재는 그것을 강화시키기에 알맞은 재료일것이다.
이 책도 그 단테의 신곡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이야기중의 하나이다.
때는 18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전대의 화려했던 해상왕국으로써의 위치가 빛이 바래긴 했어도 그래도 굳건한 국력을 구가하고 있는 나라. 그 나라에 원인모를 살인이 일어난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참혹한 살인.
곧 있을 카니발축제에 지장이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총독은 당대의 뛰어난 스파이요원이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감옥에 갖혀있는 피에트로 비라볼타를 석방시키며 그 조건으로 이 사건의 해결을 명한다.
피에트로 비라볼타. 일명 흑란으로 불렸던 이 사나이는 적당한 지식과 영리하고 재치있는 언행으로 한때 베네치아 정부에서는 빼놓을수 없는 인사였다. 비록 죄를 짓고 감옥에 있었긴 했지만 사건의 중대성으로 인해서 그에게 사건이 맡겨진 것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흑란.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음모의 전주곡임을 알아챈다. 그리고 연달아 일어나는 살인들. 일련의 살인들에게서 흑란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9개 지옥의 형벌의 순서에 따라서 살인이 저질러지는것이었다.
하지만 살인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단서를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을때 또다른 벽에 부딪치는 흑란. 드디어 악의 심장부에 접근하지만 예상치못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책은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세태소설이기도 하고 풍물소설이기도 한 책이다. 18세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단순히 사건의 전개과정만을 묘사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당시의 베네치아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고 있는것이다. 서양 중세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그 당시 베네치아가 어떤식의 정치체계를 갖고 있었고 어떤 축제가 있었는가를 알게되면 또다른 흥미를 느낄것이다.
민주주의가 있는가하면 독재와 전제주의도 묘하게 섞인듯한 모습이 당시의 베네치아였다. 요즘의 정치 체계와 비교해서 그런식의 정치도 있을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당시에 베네치아의 유럽내 위상은 높았던 모양이다. 군사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카니발이라는 축제를 통해서 여러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꼭 구경가고 싶은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라는 나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가장 큰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정치와 문화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책이니 말이다.
500여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이긴 했지만 정교한 짜임새와 수준높은 묘사등으로 인해서 잘 읽혔는 책이었다.베네치아의 정치 상황을 단테의 신곡에 비추어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괜찮은 추리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만,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는것이 베네치아의 정치,문화 등을 너무 상세하게 그려서 그것에 싫증을 느낄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쪽에 관심이 없다면 사족이 될만한 것이리라.
책 자체는 잘 쓰여졌다고 해도 결말에 이르는 속도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라서 좀더 빠른 전개와 스피디한 속도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좀 미흡하다고 할만하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라서 속도면에서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근 인상적인 책을 여러 출간한 출판사답게 책도 잘 만들어졌다. 번역도 깔끔하고 장정도 좋다. 제본도 나쁘지 않은편이긴 하나 조금 더 튼튼하게 박음질이 되었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의 겉면에 있는 광고 문구가 이 책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테의 신곡을 둘러싼 덫처럼 은밀한 은유와, 인본주의적 살인의 정치'.
베네치아에서 벌어지는 악의 이야기, 고급스런 추리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