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의외의 일들을 선호한다. 구경하는 것보다 뛰어드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경험해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고나서 후회를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
실내에 있는 것보다 야외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계절이 깊어가는 것을 흘러가는 것들을,
조각나지 않고 길게 이어진 휴식을, 청소를 하고 향을피운 후에 책상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i에게』와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나를 깬 세상의 전부>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등을 썼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시골 마을을 발견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와 자그마한 와사비소금 한 병을 소중하게 포장해주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런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는 그런 할머니로 늙어가야지 하며 빙그레웃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속 어묵을 꺼내고 무 반토막을꺼내어 멸치 우린 물에 넣었다. 팔팔 끓여 푹 익힌 어묵과 무를 와사비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 다음날도 먹었다. - P122

1월 3일
델리, 비벡 호텔에서

인드라간디의 새벽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두렵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자 무거운 배낭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아홉시 반에 로비에서 만나자던 인도인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아침부터파하르간즈를 헤매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고서 길을 찾는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쉼터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았다. 첫 인도 식사를 했다. 커리만 먹고 두 달을 지낸대도 기뻐할 수 있을 맛이었다. 바나나 라씨를 디저트로 마셨는데 다 먹고 나자 컵 밑바닥에 파리가 익사해 있었다. 맛있었는데. 너 때문이었던 거니. - P126

1월 29일
우다이푸르, 드림헤븐 루프탑에서

세탁물을 찾아왔는데, 멋지게 찢어진 나의 청바지는 모든구멍들이 깔끔하게 누벼졌다. 세탁소 아저씨가 "이건 서비스야, 완벽하지?"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화를 낼 뻔했다. J와 함께 라자스탄 전통 댄스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J의 배웅을 받으며 터미널에 갔다. 버스에 올라탈 시간이 되자 J가 비닐봉지 두 개를 건넸다. 오렌지 세 개, 과자두 개, 바나나 세 개가 담겨 있었다. 이 애는 여기에 오래 머물면서 얼마나 많은 배웅을 이렇게 했을까. 비닐봉지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싱글 슬리퍼 칸에 누웠다. 폭이 너무 좁아서 어깨가 꽉 들어찼다. - P134

2월 21일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무더위가 창궐하고 있다. 나는 타지마할 호텔에 묵지도 않으면서 이 호텔의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을 하며, 책을 읽거나 엽서를 쓰면서 소일하고 있다. - P145

2월 28일
뭄바이, 공항에서

무엇에든 카메라를 들이댔다. 지갑 속에 들어 있던 지폐와동전을 하나하나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서, 정겨운 간디의 얼굴들을 프레임에 담았다. 라씨 한 잔, 차이 한 잔, 커리한 접시마저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중앙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사고 엽서를 부쳤다. 깨끗하게 빨아 창가에 널어둔 운동화를 신었다. 신고 다니던 조리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숙소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 가는 택시를 탔다. 공항으로 향하는 그 밤길에서, ‘인도‘라는 나라에 정이 듬뿍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다이푸르에서 만났던 J를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다.
J가 차이를 사주었다. 마지막 차이. - P148

어느 해 여름에는 친구의 고향집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다폐가에 들어갔다. 작은 대문 옆에 걸린 우편함에 비에 젖었다가 다시 말라버린 고지서며 편지 같은 것들이 터질 듯이 꽂혀있었다. 청첩장 같은 것도, 연하장 같은 것도, 성탄카드 같은것도 꽂혀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흰 봉투가 누렇게 변해 있고 제대로 다물려 있지도 않았다. 이 집의 주인인 양 그것들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 한글자 읽어보았다. 다시 우편함에 꽂아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노인이 살았나보네. 아이가 살았나보네. 남아 있던 것들을 통해서 살았던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 P156

폐사지들을 두루 방문하고 나서 내게 남은 잔상은 오로지 이끼였다. 햇빛이 비스듬한 시각, 곁에 있는 사람의 옆얼굴에서나 보이던 솜털 같은 이끼. 길에 카펫처럼 깔린 이끼,
바위를 망토처럼 덮고 있는 이끼, 불상에 표정처럼 끼인 이끼.
팔다리나 머리가 잘린 채로 훼손된 석상도 아름답게 감싸며세월의 깊이를 풍겨오던 이끼. - P158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 흔적을 보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시간이 켜켜이 쌓여갔다고 표현해야 할까. 버려진 장소라고 느꼈다면 덧없는 시간의 흐름이 더 느껴졌을 것이지만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장소가 이끼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천천히 스스로를 내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무언가가 뿌리를 내린 장소였다.
이끼는 장소의 허락을 받은 듯이 온전히 그곳을 차지했다.
폐사지들은 시대와 사건들을 초월한 채로 이끼의 장소가 되어갔다. 거기에 아침부터저녁까지 햇살이 깃들고, 자주 바람이 훑고 지나가고, 가끔 빗방울이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그 곁에 인간의 무덤들이 들어서도 이끼는 구분 없이 그곳으로 번져갔다. 서로 다른 목적과 서로 다른 시간을 이끼가 어우르고 있었다. - P159

고양이가 다가왔다 멀어지고, 새소리가 들리고, 강줄기가 지나가는 물소리가 합쳐졌다. 폐허에는 언제나 온전치 못함에서 발생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이면을 간직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훼손된채로 세월 속에 간직되어있는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 비극과 참담과 세월. 이세개의 꼭짓점이 먼 곳에서 한데 만나는 소실점 같은. - P160

어떤 여행지에서는 여행을 멈추는 게 더 좋은 여행일 때가있다. 여행을 멈추고 방을 얻어 많이 자고 많이 먹으면서 많이쉬는 것이 더 좋은 여행이 될 때가 있다. 이렇다 할 찾아갈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장소인 것은 아니다.
그곳은 지내기 좋은 빵집과 찻집이 있고, 오래 머물기 좋은 서점과 도서관이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 모두가 인심이 좋다. 그런 도시에서 방을 얻어 한참 동안 머물고 나면또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날 힘을 얻는다. - P168

좋은 것에도, 나쁜것에도 즉각적으로 입 바깥으로 표현하며 동행자와 함께 그감정과 소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쁜 일에 대한 푸념이 하루의 여백 곳곳에 전시되었다. 먼저 여행을 제안한 것부터 소급해서 반성과 후회를 범벅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짓는 나와, 매번 푸념을 앞세웠다 나의 한숨 때문에 또다시 푸념을 거두며 한숨을 짓는 친구. 우리 둘의 남인도 여행은 이렇게 요약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고서, 슬리핑 버스의 한 칸씩을 차지하며 각자 누워 커튼을 친 후, 우리 둘은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구불구불한 길을지날 때에는 누운 채로 이리저리 굴러가며 끝없는 잠을 잤다. - P174

잠이 깨어 눈을 떴을 때, 창 바깥에는 뿌연 안개가 뒤덮인대도시가 있었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인파를 한가득 실은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 아직 내가 인도에 있구나!‘ 했다. 비몽사몽 잠깐의 시간, 나는 이 년 전부터 내내 그골목에 앉아서 울고 있어왔거나 이 슬리핑 버스 속에 누워 있는 줄로만 알았다. 여기는 두번째로 찾아온 인도이며, 이 년전과 달리 친구가 옆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알아챘다. 지금 집에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도. 나는 슬리퍼를꺼내 신고 버스 복도로 나왔다. 친구 방의 커튼을 열었다. 친구는 전에 없던 평화로운 얼굴로 꿀 같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친구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고백했다. 고맙다고. 옆에 있어줘서 너무 안심이라고. - P175

겨울에 꺼내는 여름

어떤 날은 외투가 무거워 집에 일찍 돌아옵니다.
외투를 벗고 잠옷을 꺼내 입는 홀가분함을 겨울이라 불러봅니다.
외출모드의 보일러를 적정온도로 맞춰서방바닥이 따뜻해지길 기다립니다.
무릎 담요도 덮었지만 수면양말도 필요합니다.
성에가 낀 북향 창문을 열면 매서운 바람이 기습해 들어옵니다.
이제는 앙상해져 볼품이 없는 숲을 내다봅니다. - P178

담요를 벗고 카디건을 벗고 양말을 벗고 잠자리에 듭니다.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코끝이 약간 시립니다.
발이 이불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몸을 웅크립니다.
깜깜한 방안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생각들이차례차례 펼쳐집니다.
여름이 펼쳐집니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던 바다가 펼쳐집니다.
뚜벅뚜벅 멀리까지 걸어가는 내가 보입니다.
어느덧 몸에서 살얼음이 빠져나가고 어느덧 잠이 듭니다. - P179

겨울은 여름을 떠올리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을 떠올리며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아쉬워할 수 있는 계절이다. 여름을 열렬히 그리워하는 밤. 성에가 낀 얼룩덜룩한유리창을 보면서, 다음번 여름엔 소낙비가 내릴 때에 유리창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창 바깥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선명하게 내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귤피차를 마시다 안경알에 낀 성에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잠깐 동안에, 여름의 냄새가 다녀간다. 겨울의 반대편에 여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는다. - P179

너무나 유명한 나무 한그루라서, 누구나가 한 번쯤 사진에담아봄직한 나무라서, 그 나무를 어디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본 적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흔한 사진이라서, 별다를 게 없는 사진이라서, 게다가 한 그루 나무 사진이라서, 나는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본 적이없는데 본 것 같은 느낌을 다만 신기해했다. 한 그루 나무일뿐이지만, 이 나무가 누구나의 나무인 것이 좋다. 모두가 찾아와 사진에 담게 되는 나무라서 좋다. 누가 사진에 담아도 멋질 수밖에 없는 멋지게 생긴 나무라서 더 좋다. 무엇보다 이나무를 맨 처음 만났던 그 거실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 P182

남루함이 빛난다

ItalyFirenze

엄마는 팔십 평생을 보아왔어도
해 지는 모습은 질리지가 않는다 하셨다.
엄마의 남루한 가구들의 모서리가 반짝거렸다.

프하라, 산토리니, 피렌체..
해가 지는 걸 보겠다고 모여든 여행자들 사이에서
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오직 지는 해만 바라보았다. - P184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녀
발은 붓기 시작하고
땀을 흘려 옷에서는 짠내가 나고
꾀죄죄해진 몰골이었지만

황금빛을 받아
잠시나마 나는 빛이 났을 것이다.

오늘도 꿈같은 하루였구나 생각하며
배낭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고서
쌀쌀한 황금빛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 P185

관광지

나는 관광지가 고향인 사람이다.
경주 노서동 사거리 봉황대 앞에서 살았다.
옆집은 기념품 가게였고
수학여행객들로 항상 붐볐다.

사방치기나 비석치기 같은 걸 하고 놀던
꼬마였던 내게 다가와 - P204

외국인 관광객들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동전을 쥐여주려고도 했다.

도망치듯 대문 안으로 들어가
혼자서 욕을 해댔다.
수학여행 철마다 내 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이방인들을 무작정 미워했다.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어른들에게 혼이 났고
나는 자꾸 골목을 빼앗긴 느낌만 들었다.
친구들과 골목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그들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시간.

그들이 되어 나는 다른 도시를 그렇게 지나갔다.
그 아이들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골목 속 나는 웃고 있고 골목 속 나는 숨어 있다. - P205

휴양지의 리조트에서 나는 친절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돈을 내고 팁을 주면서, 방도 치워주고 식탁도 치워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 P205

하염없이 물놀이를 하고 하염없이 낮잠을 자고, 휴양지에서하염없는 휴양을 하고서,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불렀다. 친절한 사람이 내 트렁크를 차에 실어주었다. 휴양지를 벗어나자소낙비가 쏟아졌다. 소낙비를 맞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서로 지붕을 기댄 채로 지어진 집들이 보였다. 비현실적인 휴양지와 비현실적인 공항 사이, 아주잠시, 친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갔다. - P206

내가 마음먹은 일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실천할 능력이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마음먹었는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의 어떤 섬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의일이다. 단지 나는 짧게 다녀올 여행지를 고르고 있었고 멀지않은 곳이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바다가 있었으면 했고 관광객들이 들끓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찾아간 곳은 필리핀의 다바오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다. 필리핀의 전통 수상가옥으로 한 채 한 채가 지어진, 아주 아담한 그 숙소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깨끗한 바다. 간단한 스노클링으로도 만날 수 있는 알록달록한 열대어들. 매일매일 산해진미가 차려지는 레스토랑,
매일 저녁식사와 함께 펼쳐진 민속 공연, 파도 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방, 방에서 내다보는 아무도 없는 바다, 열대우림의 산책로. - P215

대문 앞에 멈춰 서서 집안을 들여다보니 마당에서 가족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모여앉아 있었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한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버스 티켓과 숙소의 바우처를 번갈아 보여주며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 동네에 친구가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다. 도움을 주어 고맙다며 기꺼이 대답을 했지만, 그순간, 눌러두었던 두려움들이 모두 동원된 듯한 커다란 무서움에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도움이 과연 믿을만한지에 대한 판단 불가능함이 주는 두려움, 그렇다고 다른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해결책이 없다는 두려움, 이 모든두려움을 안고 나는 그 사람의 차에 올라탔다. - P230

내가 요 근래에 주로 맺어온 관계는 대체로 교류나 친목에 해당한다. 나의 교류란 주로 성과에 대하여 서로 거래하거나 응원하거나 침투하는 것이다. 거리와 감정과 체면 같은 것을 미세하게 측정하고, 적정선을 지키기 위해 항상 긴장을 해야 한다. 나에게 친목이란, 준거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인맥을형성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느 정도는모두가 모두에게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겸손을 스스로에게 무장시키고, 선을 지키기 위해서 다정함과 호의도 과하지 않은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감정 노동이라고 일축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나‘라는존재는 대개 누군가의 도구로 취급된다. 사람을 만나서 힘을얻고 용기를 얻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얻는 일은 점점 드물어진다. 눈치를 보고 눈치를 주고 말조심을 하면서 경계심을최대한 갖추고 있되 경계심을 들켜서는 안 된다. 알고 지내는사람은 많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편한 사이는 두어 사람에불과하다. - P243

결속력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다정한 관계, 목적 없이도 걸음을 옮기는 산책, 무용한 줄 알지만 즐기게 되는 취미생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미물들에게 잠깐의 시선을 주는 일, 아무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 싱거운 대화,
미지근한 안부 식물처럼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는 일. 인연이희박한 사람, 무관한 사람, 친교에의 암묵적 약속 없는 사람과나누는 유대감이 수수한 마주침을 누리는 시간이 나는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사람은 목소리와 표정과 손길로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45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은 몰랐다.

어떤 경우에도
바깥을 두리번거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 P248

바깥을 돌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은 몰랐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마음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을 이해하면 내가 훼손될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용서해야 한다고 마음먹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갇힌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 새로 알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 새로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도 도처에서 나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완전하게 숨이 멎을 때까지 - P249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때가 많다. 하염없이.
생각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 줄 알지만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아는 말 중에 가장 기만에 가까운 말이 되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나의 주된 업무이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차곡차곡 모아서 이불을 내다 널듯이 세상에 내다널고 싶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우리집을 올려다보며, 아나도이불널어야겠다 생각할 수 있기를바라면서, 화분을대문바깥에 쪼로록 내다놓을 줄 아는 집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발길이 머무는 사람이 없을 수는없는 것처럼.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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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있다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중에서

시인 정지용은 여행을 ‘이가락離家樂‘이라 했다. 집 떠나는 즐거움.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우선 근사한 여행지를 전제하지않아서 좋다.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뜻이 좋다. 집을 떠나면 우선 나는 달라진다. 낯선 내가 된다.
낯설지만 나를 되찾은 것 같아진다. 내가 달라진다는 게 좋다.
달라질 수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다. - P32

나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별 짓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기꺼이 나아간다. 낯설어져서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엽서를 사러 나간다. 엽서를 고르는 데에 한나절, 엽서에 쓸문장을 고르는 데에 한나절을 쓴다. 엽서를 부치면 나는 내용을 잊는다. 그 내용을 기억하는 건 친구들의 몫이다. "나는 이곳에 와 있어"로 시작되는 엽서 한 장을 쓰기 위해서 어떤 하루를 다 쓴다. - P35

이번 여행에선 친구들이 내 가방을 들어주었다. 발에 깁스를 한 탓에 내 두 손은 목발을 붙잡아야 했다. 이번 여행에선친구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였다. 이번 여행에선 주로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친구들이 멀리까지 갔다가 내게 돌아와 자신들이 본것에 대해 얘기해주면 나는 귀를 기울여 그 얘기를 들었다.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나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 대해서. 걸음걸이에 대해서. 돌아올 때에달라진 표정에 대해서. - P59

터키에서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한 적이 없었다. 무거운 배낭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면, 잘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말만 남기고 그냥 가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불러와서, 내가 길을 제대로 알 때까지 나를 도와주었다. 교통카드 없이 현금만 갖고버스를 타서 당황했을 때에도, 버스기사는 괜찮다며 그냥 태워주었다. 내릴 정류장을 몰라서 옆에 서있던 승객에게 말을붙였을 때에도, 버스에 탄 승객들 모두가 한꺼번에 나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지도를 보고 있을 때에도 누군가 다가와 배낭을 들어주고 숙소까지 동행해주었다. 민박집 여자는 배부르다고 말할 때까지빵을 주었고, 차를 따라주었다. 매일매일 과일을 함께 먹자고나를 불렀고, 시시때때로 차를 마시자고 나를 불렀다. 금의환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지만, 금의환향한 자가 누렸을 법한대접을 받았다. 터키를 여행한 다음부터는 여행가방을 끌며길을 헤매는 듯한 여행객을 보면, 나도 터키사람이 된다. 길만 가르쳐주지 않고 찾아가고 싶은 그곳까지 데려다준다. - P68

고산증 덕분에 호흡이 가쁘고 심장에 압박을 느끼고 두통과 메스꺼움에 시달렸지만, 그 도시가 좋았다. 가깝게 내려앉은 구름도 좋았고, 산등성이를 타고 형성된 빨간 지붕의 마을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거리를 걸어다니는게 좋았다. 긴장을바짝 하며 소매치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츠렸지만,
골목골목을 구석구석 걸어보고 싶어했다. 결국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당장 이 도시를 떠나야겠다 낙담했지만, 숙소로 돌아와 코카차를 끓여주는 한 사람의 미소 덕분에 오래오래 그 도시에 머물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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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여전히 먹여 살리는 것처럼, 죽어도죽지 않는 문화적 아이콘들이 떠받치고 있는 도시들이 세계 여기저기 적지 않을 것이다. 한가할 때 한번 그렇게 유령 시장이 된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를 쭉 짝지어 리스트로 만들어보고 싶다. 게으른 여행자라 다 가보지는 못한다 해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들도 좀 껴 있어서, 흥미가 더해지지 않을까 한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재미 삼아 쏘아본 석궁 과녁 종이를 꺼내보았다. 화살이 뚫어 일어선 가장자리가 촉감이좋았다. 가운데를 두 번이나 맞힌 것이 아직까지도 자랑이다. - P168

영어로 치면 스리 랜드 포인트인 것 같았다. B와 S가 나를 끌고경계석으로 향했다. 무엇의 경계인가 했더니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세 나라의 국경이 한 점에서 만나는 꼭짓점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 전날, 유연한 국경이 재밌다고 말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야말로 가장 유연한 곳에 데려다준 것이었다. 네 살, 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경계석 근처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걸음 딛을 때마다 발밑의 나라가 바뀌었다. 뒤로 국기가 셋 꽂혀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군인이 없었다.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공원이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높은ㅅ 목소리로 신이 난 채 어린이들과 경계석을 빙빙 돌았다. 내 격한 반응에 B 자매는 만족한 듯했다. 한 걸음마다 벨기에였다가 네덜란드, 네덜란드였다가 독일, 독일이었다가 벨기에……. 뭐라 할 수 없이 멋진 경험이었다. - P184

브뤼셀 왕립 미술관이 벨기에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왕립 미술관을 향해 따뜻하고 달콤해진 배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서 땡땡과 스머프가 튀어나왔다. 땡땡의 모험은 1929년부터 연재되었던 작품이라 이제 와서 보면 아시아인으로서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손이 가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 더 전에 쓰였어도 지금의 우리를 상처 주지 않는 좋은고전을 탐색하거나 동시대의 작품들을 성실하게 찾아보는 게 폭력적인 작품을 견디며 계속 읽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어떤 작품은 잊히고 어떤 작품은 계속 살아남는 것일 테다. 오래 살아남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식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설령 곧바로 이해받지 못하고 비난만 돌아온다 해도……………. 우리가 지금 사랑하는 작품들 중 많은 수가 감내해야 할 것들을 감내하며 멀리 밀고 나갔던 작품들인 것이다.  - P197

각났세상은 망가져 있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무참히・・・・・・・ 그것을 알면서 여행하는 것은 묘한 일이다. 여행지에 이르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실은 아름답지 않다니‘ 중얼거릴때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마음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만다.
브뤼셀에서 묵은 숙소는 맨해튼 거리에 있었다. 브뤼셀을 떠나던 7월 21일은 벨기에의 국경일이어서 오줌싸개 동상은 전날과는달리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동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사람들을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 P203

브뤼헤의 정취에 발목까지만 담근 다음,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돌아왔다.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전날 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다시금 이해했다. 밤도 낮도 아닌 그 그림 속 시간은 개념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벨기에 북부엔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도 해가 어찌나 천천히 지는지 영원히 지지 않을 것같았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서늘한 여름이었고 잡음 없이조용했다. 빛의 제국이란 소리가 없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구나,
아마추어 감상가로서 가슴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일찍 귀가해 발걸음 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도 날개를떨지 않는 깨끗한 무음 속을 걸었다. 직접 감각하고서야 이해할 수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예민한 몸을 끌고 다니는게 싫어 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도 계속 여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요소들에 대해서.
- P207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긴 의자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등받이가 거의 누워 있어서 거기 앉는 사람도 눕게 되었다. 그 의자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지만 어째선지 잠든 이들이 많았다. 코를 골기까지 했다. 깨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간 해양 포유류가 된 기분으로 나란히 누워 있거나, 아트 북 코너에서 트렁크에 몇 권이 들어가려나 탐욕스럽게 계산을 해보곤 했다. 아트 북들이 그렇게 크고 무겁지만 않았더라면 많이 사 왔을 것이다. 가격도국내 가격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그 책들에서알게 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지금껏 열심히 따라 살펴왔다. 해외예술가들의 동향을 이처럼 쉽게 알 수 있다니, 인터넷은 대부분의경우에 끔찍하지만 가끔 정말 멋지다. - P225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제목의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것 같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셔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세계가 이렇게망가지고 무너져가는 것은, 이 세계를 복원하고 개선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추측하기도 한다. 그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아 조급해지지만, 여성이 극도로 억압받는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먼 곳에서도 지지를 보내기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모여서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인권 단체에 기부를 하고 오지은의 작은 자유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다. - P227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단 걸 깨닫고도 끝까지 가야 하는 경우였다.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들리네, 하고 그와중에도 웃었다. 문제는 뒤셀도르프 숙소의 체크인 시간이었다. 아무리 시간 계산을 해봐도 뒤셀도르프에 도착하면 자정을 넘길 게 분명했다. 숙소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아아, 그런 일도 종종 일어나죠. 체크인 시간 안에 못 온단 말이군요? 그럼 와서 현관에 붙은 인터폰을 눌러요. 내가 열어드릴게요."
숙소 사장님은 흔쾌히 대답했다. 스트레스를 한참 받은 와중에도 안심이 되었다.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는데…………사장님은 호언장담을 저버리셨다. 숙면을 취해버리신 것이다.
그 밤만큼 난감했던 적이 또 없었다. 뒤셀도르프역에 도착했을때는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숙소 근처까지 가자 1시였다. 가는 길엔 지하도를 건너야 했으며 벽에는 위협적인 늑대 그래피티가그려져 있었다. 인적이 없는 게 무서웠는지 있었으면 더 무서웠을지모르겠다. - P233

장르가 달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다음 힘든 중간 단계를거쳐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은 비슷하니 다 통할 거라고 대답했다.
효과를 믿기보다는 강렬하게 바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자체가 의미 있었다. 한편, 모차르트 초콜릿은 있는데 베토벤 초콜릿은 없는 게 의아했다. 피너츠』의 슈로더가 알면 서운하겠네, 하고웃었다. 슈로더가 베토벤을 생각하듯이, 자주 박완서 선생님을 생각한다. 편집자로 일할 때 멀리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것도 뒷모습이었지만. 돌아가셨을 때 슬펐는데, 곧 「박완서 소설 전집이 스마트폰 앱으로 나와 색다른 위로가 되었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전집 앱으로 오래오래 머무시겠구나, 그럴 수 있는 작가가정말 적은데 대단한 탁월함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과 실루엣을 딴 초콜릿들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 P240

미완결성은 물리적으로도 들어맞아, 도시 한가운데공동들이 산재했고 온통 새로 지어지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찍어도 크레인이 찍혔다.
짧게 머문 것이 아쉬웠는데 다행히 언제나 책이 있고, 한은형의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와 박민정의 서독 이모』를 읽으며 베를린만의 질감을 즐길 수 있었다. 다시 베를린에 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베를린에 대한 책을 잔뜩 읽고 싶다. 베를린에 다녀와서 베를린에 대한 책을 끝없이 읽는 것과 베를린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 베를린에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베를린을 이해하는 데 적합할까?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쓰고 싶다. - P259

 트럭 운전사의 보조를 하며 생크림을 배달하셨다고 한다. 생크림을 배달하는 젊은 할아버지를 상상해보았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막막했을 것이고, 또 어떤 날은 막막하면서도 햇빛이 좋아 작은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학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된할아버지가 엄마를 포함해 딸들을 다 대학에 보내셨고, 손녀들에게도 언제나 큰 기대를 걸어주셔서 힘을 얻었다. 문학 애호가답게 헨리크 입센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추천해주신 데다, 책을 쓰고 드라마를 쓰라고 격려해주신 적도 있는데 뭘 어떻게 미리 아셨던 걸까싶다. 돌아가시기 전에 데뷔했으면 기뻐하셨을 텐데 1년 반쯤 어긋나고 말았다. 내 소설 속 좋은 어른들은 할아버지를 닮았다. 누군가를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 북돋아주는 것,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것은교육자의 자질이기도 하고 어른의 자질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받은 응원과 지지를 이야기로 감싸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 P272

어느 나라나 위험한 일부가 있고, 상식적인 나머지가 그 위험한일부에 휘둘리고 끌려가고 동조해버릴 때 모든 게 나빠지는 것 아닐까 추측한다. 나는 그즈음 베를린에서 묵었던 티어가르텐이 히틀러시기엔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외국인들을 강제로 불임시키고 각종생체 실험을 하던 지역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참이었다. 21세기의국가들은 20세기 국가들로부터 멀리 왔지만, 조금만 경계를 낮추면악의는 습기 높은 계절의 곰팡이처럼 기세를 떨치며 확산하고 지우기 어려운 얼룩을 남긴다. 이를테면 일본에는 나와 내 책을 극진히사랑해주는 다정한 독자들이 계시지만, 서점에서 내 책은 혐한 서적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일 것이다.  - P273

오사카 국제미술관에서는 엘 그레코 특별전이 한창이었다. 처음에는 왜 현대미술관에서 16세기 그림을 전시하는지 의아했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모던함이 느껴져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은 스스로 뭘하는지 인식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엄청 다른 걸 그리고 만 듯했다.
정신은 시대에 속해 있지만 몸이 먼저 앞서 나가는 예술가들이 재밌는 것 같다. 특히 「사도 성요한」의 독배를 든 초록빛 옆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기다란 손가락들이 16세기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시대와 묘하게 불화하는 느낌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만큼 가까이에 그 작품을 신나게 등장시켰다. 여행의 조각들이 소설에 석영처럼 박혀 있는 것을발견할 때마다, 좀처럼 여행하지 않는 나의 등을 떠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낀다. - P276

존재하지 않는 괴물도 존재하는 괴물도 이겨낼 수있을 것이다. 일부러 통과하기 쉬운 의례를 만들고, 삶과 기억에 분기를 두어 다음 세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겠구나, 짐작했다.
결국 해가 질 무렵, E씨와역앞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주소를 주고받았다. E씨와의 여섯 시간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얻은 빛을 오랫동안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보답을바라지 않는 친절을 곱씹을수록 나도 E씨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감사 인사 삼아 홍삼과 여러 가지를 담은 소포를 보냈고, E씨도 교토의 해조류 절임과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주시는 등 몇 번의 교류가 더 있었다. 너무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자제하지만, 언제나 E씨의 안녕과 건강을 바란다. 특히 여름마다아라시야마의 홍수 뉴스가 보도되는데 그럴 때마다 걱정이다. 또 편지를 쓰고 싶다. 함께 걸었던 길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는 뒤에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고 번역기가잘 번역해줄지 모르겠다. - P284

생몰년이 정확하지 않아 970년 즈음 태어나 1025년 즈음 사망한걸로 추정되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삶이 궁금하다. 보수적인 전근대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은 여성 소설가가 아닐까? 지금 시대를 여성 소설가로 사는 것도 여러 가지 소설 외적인 것에 시달려 지치고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앞선 작가들을 생각한다.
20세기의 작가들, 19세기의 작가들을 거쳐 자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0세기 사람도 언니처럼 느껴지고 만다. 비슷한 괴로움을 가졌었나요? 외로울 때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미끄러지듯이 쓸 때와 쓰다가 멈췄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나요? 한 시간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을 잔뜩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죽고 나서 작은도서관 같은 게 되고 싶다."
신이 나서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가 당황해하던 게 기억난다.
부모는 아무래도 자식의 죽음을 그다지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자식의 경우는 그러지 못해 수많은 동화책들이 부모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였는데 말이다. 부모는 자식을 더 속 편하게 사랑하며, 동시에 더한 무방비에 놓이고 만다. - P287

이틀 연달아 너무 많이 걸어 발톱이 빠지려 하는 상태여서, 엄마는 숙소로 먼저 올라가고 C와 둘이 도토루에 갔다. 둘 다 동절기 한정 메뉴인 밤 맛이 나는 커피를 골랐다. 마지막 밤, 카페인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사람마다맞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내 경우엔 그게 서울이었지만 C는 다시 찾아야 했다는 걸 한층 이해할 수 있었다. 걷다 보면거리에 녹아들 수 있는 도시가 꼭 태어난 도시는 아닐 수도 있고 그런 경우 그곳을 찾기 위해 떠나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친구와 일상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게 슬퍼도 걸음걸음을 응원한다.
C와 사흘 연달아 만나서 좋았는데, 그날 밤 마음이 헛헛해지고말았다. 역시 초능력을 얻는다면 순간 이동이 좋겠다. 친구들이 있는도시의 커피 체인점에서 한 시간씩만 만나고 올 수 있도록. 그래도며칠에 한 번씩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서로의안녕을 바라고 감미로운 잠과 이어질 다음 날을 기원해주는 사이인것만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다. - P290

사랑 아닌 다른 부분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명확히 관여했는데 스스로가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 기묘했다.
여러모로 공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파악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행이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도저히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마땅히 안전을 누리게 되면,
삶의 선택들이 크게 바뀔까? 외부의 폭력이란 불순물이 제거된 사랑과 시민 결합은 어떤 형상일까? 바뀌어갈 사회가 궁금해서 오래살고 싶어진다. - P304

SF 작가라서 믿는 건 과학밖에 없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한껏 이끌리고 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강렬히 염원하는지 존중으로 멀리서 나누고 싶어진다. 룽산사와 바오안궁을 가보기로 한 것은 그래서였다.
룽산사는 들어서자마자 건축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물론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찰이니 아름다운 게 당연하지만, 분명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고 했는데 그런 흔적을찾아볼 수 없는 화려함이 대단했다. 기둥만 두 시간쯤, 지붕만 한 시간쯤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5

하지만 결국 누구나 아프기 마련이니, 이야기 매체에 잔잔하게아픈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은사람이 잘 없는데 이야기 속 세계에는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과 중병에 걸린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중병을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없지 않고, 안고 사는 병은 아예 생략되고 있는 게 아닌지 싶다. 얼마전 또 한 번의 위로는 블랙핑크 다큐멘터리 「세상을 밝혀라」에서 제니 씨가 "온몸이 아파"라고 말한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아이돌이 솔직하게 온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걸 보자뭉클했다. 세븐틴 다큐멘터리 ‘히트 더 로드」에서도 투어 중에 멤버분들이 돌아가며 아프던데, 편집하지 않고 보여주어서 좋았다.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항상 건강함을 연기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 P317

이기존의 통로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길들이 아닌지 늘은근히 의심하고 있다. 문학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서구의 문학상들을 그렇게 선망할 필요가 있나? 권위를 너무 바깥에서 찾고 있는게 아닐까? 국제 문학상이 연결의 매개체인 것은 확실하니, 차라리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함께 문학상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지? 영미권이나 서유럽의 인정을 받아야 작품을 재평가하는 분위기도 좀아리송하다. 그 전에도 그 작품들은 좋은 작품이었는데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있지 않았나? 반면에 1세계 작가들이 아시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그것으로 본국에서 호응을 얻는 일은 잘 없는 것 같아기울어진 지형에 마음이 좀 꼬이고 만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하기어려운 우회 경로들이 많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가 내한했을 때 릿터」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프리카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ME작가를 만나기 위해 유럽을 통해야 하는 기이함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직접 항로들이다. 그리고 그 굴절되지 않은 길들을 아끼고 우선시하는 일이다. 아시아인으로서 아시아를 더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 P335

런던아이를 해 지는 시간을 계산하여 예약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 노을과 야경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탔을 때 마지막으로 하얗게 빛나던 하늘이 내릴 때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클래식영화 속 런던의 건물들이 그대로여서,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그대로겠구나, 우리가 건물들을 방문하는 게 아니고 건물들이 잠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과 잠깐 거기 있는 것들 사이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수 있는 시기가 오면, 행운들이 고르고 넓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 P377

무형의 콘텐츠가 가지는부가가치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이전 시대의 창작자들과 그들을계승한 동시대의 창작자들이 이뤄내고 있는 풍부한 문화적 축적과그것을 즐기고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가지는 저력이 탐나는 목표가 되었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의 말을 어설프게 번역해보았다. 어른이되고 나서야, 세상의 보고 싶지 않았던 면들을 보고 나서야 이 말이의미 있게 와닿았다. 아동문학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지만, 세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다잡고 싶을 때는 역시 아동문학을 찾게 된다. - P382

여행 전에는 기대감으로 즐겁고 여행 중에는 충만감이 차오르는데여행 후에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어떤 여행이든 그렇지만런던에 다녀왔을 때 유독 심해서, 집에 돌아온 밤 카메라의 메모리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찍은 사진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명히 찍었던 것 같은 사진들이 없었다. 당황해서 메모리 복원 프로그램으로 몇 번 복원도 시도해보았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머릿속에 남은 강렬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착각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사진으로 착각할 만큼 생생했던 이미지들도 이내 희미해지고 잊히게 된다. 안쪽에서 그렇게 빛을 잃고 사라져가는것들을 느낄 때 안타까움이 깊어진다. - P389

 겨울에도 유유히 물 위를 미끄러지는 물새들 가운데 가끔 다른 종이 하나 천연덕스럽게 섞여 있는 경우가 많던데 혼자 다른 종류라는 걸 알고 다니는지 모르고 다니는 건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새를 보러 자발적으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순천만에도 가고 연천에도 가고 강원도에도 가고 제주도에도 갔다. 새들이 많고 보호에도 힘쓴다는 싱가포르에도 갔었다. 매번 누군가의 부추김에만 여행을 떠났는데 몇 안 되는 자발적 여행을 한 셈이다.
새의 사진을 찍어볼까도 했는데, 그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내수준으로는 도저히 움직임을 쫓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이상하게도새들의 이미지는 내 안에서 덜 유실되는 것 같다. 물총새의 움직임처럼 강렬한 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서, 상실감 없는 취미를찾은 것이 기쁠 뿐이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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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많은 사람들이 문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지만 장르 문학계의 비틀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괴롭힘 문화로 치면 한 수 위다. 거의 매년 악플러를 잡아보았더니 비슷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업계 사람으로 밝혀지거나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안쪽의온도가 조금 떨어져버렸다. 이대로 방치하면 모두가 진저리 치는 문단보다도 더한 유독함을 뿜어낼지도 모른다. 바로 곁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만은 아니다. 「스타워즈」 시리즈 7, 8, 9편을 만든 제작진과배우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며, 「에반게리온」시리즈의 안노 히데아키가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왔다는 것을 들으며 서브컬처계의 가학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간다.
겪어본바, 대부분의 서브컬처 향유자들은 다정하고 기발한데, - P106

가끔 몇 년 전에 읽은 책 한권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집요할 정도로따라붙으며 잔인한 말들을 하는 이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어렵다.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다. 거기엔 개인이라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현실과 비교해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아래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는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를 둘러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한 사망자 추산이 불가능했으니 누락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거기 모르는 사람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놈들 머리에 폭탄이 떨어지면 좋겠어!"라든가 "그놈들 발밑에지진이 나면 좋겠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가장 순정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외면하는 - P116

독선은 얼마나 독한가? 붕괴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나무 한 그루도있었는데, 다들 그 아래에서 소원 같은 걸 비는 듯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배터리파크까지 걷는데 비가 왔다. 비가 왔을뿐더러 바람이며파도가 걷기 힘들 정도였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어릴 적엄마와 이모와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가까이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내가 본 뉴욕은 테러를 겪기 전의 뉴욕, 쌍둥이 빌딩이 서있던 시절의 뉴욕이었다. 2001년 전에 촬영된 영화들에 그때의 스카이라인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무지근한 충격이 온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세계가 얼마나 크게 변하는지, 나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기를 늘 바랄 뿐이다. - P117

어느 정도까지 공격적으로 말해도 될 것인가가 오래 하고 있는고민이다. ‘조신하게, 예쁘게 말해‘ 하는 식의 강요는 지긋지긋해서굴절 없이 똑바로 말하고 싶은데 또 어느 선을 지나치면 따가운 공격성밖에 남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면서도 부정적감정의 발산으로 그치지 않도록 적정 수준을 찾는 것⋯⋯⋯⋯⋯ 고민은 하는데 매번 실패하는 느낌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정교함을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깎아낸 부분이 남긴 부분보다 많아 심지없는 완곡어법을 쓰게 되고, 세게 밀어붙이는 글을 쓰다 보면 꼭 엉뚱한 사람이 다치게 되어 후회스럽다. - P119

뚱한일단은 조롱과 비아냥,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게얽힌 세계에서 한 사람을 덩어리로부터 떼어내 개별적으로 보고 싶다. 내가 ‘섹시 아시안 걸‘로 요약되었을 때 상처 받았던 것처럼, 남부에서 온 아저씨도 상처 받았을 수 있다. 그 아저씨가 ‘남부‘에서 연상되는 전형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였더라면 그 공연을 보고 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까. 공연자의 갑자기 드러난 날카로운 면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일반화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차별 속에 느 - P119

껴왔을 스트레스가 왈칵 터져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적 맥락과 개인을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는 것,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지난한 두 가지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것 같다. 실패하면 그다음 번에 다이얼을 더 잘돌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한다. - P120

가까워질수록 W는 불안해했고, 나는 의기양양해져갔다. 역시나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1990년 작「프리벨맨(Pre-Bell-Man)」이었다. 다시 한번 고유의 표지가 있는 작가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손톱만 하게 보여도 아우라를 뿜어낸다는 뜻이니 말이다. 소설가들 중에도 분명 비슷한 이들이 있다. 한 문단만 읽어도 아, 이거 그 사람이 쓴 거잖아,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는 게 그때도 지금도 꿈이다.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면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 어떤 것, 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놓칠 수 없는 괴테 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관람한 후에는 괴테 하우스의 외벽에 두 손을 대고 기복 신앙처럼 문운을 나눠 받길 소망했다. 이때의 여행 사진들을 보면 벽을 짚은 손등 사진이 띄엄띄엄 이어진다. - P147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썼다는 하숙집 건물은 작고 가지런했고 거미가 인사하듯이 실을타고 내려왔다. 죽고 없는 사람들이 한때 머물렀던 장소에 찾아가는마음이란 지도 위를 투명한 점선으로 뒤덮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서 천천히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지나간 사람들의 바통을 건네받아 나도 쓰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듯도 하다. 그 방문이 만족스러웠으므로, 기왕 거기까지 간 김에 근처의 영국 정원을 걸어보기로했다. 멀리서 본 영국 정원은 도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풍성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녹지를 남겨두었을까 감탄했는데, 18세기에 그때까지 늪지였던 것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만든 것이라고 한다. - P156

인간의 몸이 아주 복잡한 유기체라는 점을 종종 곱씹는다. 하나의 통일된,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온갖 부분과 요소들이 저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는 가끔 서로 상충하거나 갈등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서. 뇌가 원하는것과 위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이 호르몬의 목표와 저 호르몬의 목표가 다른 식인데 성(性)과 관계된 파트들이 유난히 저 혼자 가지런할 리 없다.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과학과 의학의 연구 결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이 이토록 복잡하고 다층적일 때, 이분법적 정체성과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의 방식은 실제에 대한 지나치게거친 요약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사람인 어슐러 르 귄은 ‘안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 ‘믿는다‘는 말이 끼 - P160

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에 깊이 동의한다. 과학의 자리에 과학이 아닌 것이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 P161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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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15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타워즈 7 8 9 제작진이 왜 공격을 받는지, 영화평을 찾아봐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제목은 몇 번 눈여겨 보아 기억하는데 옮겨주신 문단들을 보니 생각보다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어야 할 책으로 보이네요^^

2022-08-23 12:20   좋아요 2 | URL
헐~ 이런 여기에 댓글이 숨어있었군요. 덧글이 거의 전무한 서재라 덧글에 둔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세랑작가가 SF작가로 분류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여성 작가들이 장르분야에서는 독자들의 공격을 더 심하게 받는다더군요. 본인도 오래 시달렸고. 스타워즈 제작진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고... 제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책이었어요. 가볍게 시작했는데 많이 무거운~ ^^
 

‘모든 것이 아주 창백했다. 강도 창백했고, 들판은 풀이 무성하고 분명 붉은 빛일 꽃들이 우거져 있는데도 아무 빛깔 없이 술렁이며 펼쳐진 채, 빛깔 없는 농가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윽고 한 농가의 문이 열리더니 농부와 그의 가족이 마치 언덕 위 교회에라도 가려는 듯이 말끔한 차림으로 말없이나타나, 엄숙한 태도로 행렬에 끼어들었다. 때로는 2층 창턱에 기대선 여자들이 재미있다는 듯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잠자코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 보려고 수백마일씩 온 걸까?>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마치 어느 배우와 약속이라도 지키러 온 듯한 기묘한 느낌이들었다. 그는 너무나 스케일이 커서 소리 없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 P152

우리는 아주아주옛날 새벽에 경의를 표하러 온 원시 세계의 남녀들이었다.
스톤헨지의 경배자들이 더부룩한 풀숲과 비바람에 씻긴 바위들 사이에서 필시 그런 모습이었을 터였다. 갑자기 어느요크셔 향사의 자동차로부터 네 마리의 크고 여윈 붉은 개들, 고대 세계로부터 온 듯한 사냥개들이 뛰쳐나와 코를 땅에 처박는 것이 마치 멧돼지나 사슴의 자취라도 찾는 듯이보였다. 그러는 사이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 한 송이가 마치하얀등갓 뒤에서 천천히 불이 켜지는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빛 쐐기 모양의 빛줄기가 구름에서 쏟아져나와 골짜기의 나무들을 녹색으로, 마을을 청갈색으로 물들였다. 우리 등 뒤 하늘은 연청색 호수에 하얀 섬들이 떠다니는 듯했다. 하늘은 활짝 열리고 개었지만, 우리 눈앞에는 희고 부드러운 눈의 둔덕이 쌓여 있었다.  - P153

태양은 구름들 사이로 달려 나가 그 신성한 몇 초가 끝나기 전에 결승점에 도달해야만 했다. 결승점이란 오른쪽에 있는 엷은 투명함이었다. 태양은 출발했다. 구름들이 그가 가는 길에 온갖 장애물을 던져 놓았다. 들러붙고 가로막았다.
그는 그것들을 뚫고 질주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도 번개처럼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한 속도였다. 잠깐 나와밝게 빛나는가 하면, 다음 순간 구름 뒤로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결승점을 향해 그 먹장을 헤치고 나아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타나서 우리의 안경을통해텅빈 태양, 반월형 태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가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이제 그가 마지막 힘을 쓸 때였다. 그는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순간들이 지나갔다. 저마다 손에 시계를 들고 있었다. 신성한24초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1초가 지나기 전에 이기고 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지고 마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가 구름 뒤에서 몸부림치며 달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구름들이 그 - P154

를 붙들고 있었다. 구름장들이 퍼져 나가며 두꺼워지고 느슨해져서 그의 속력에 제동을 걸었다. 24초 중에 5초밖에 남지않았건만, 그는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순간들이 지나고 <태양이 지고 있구나, 정말로 경주에서 졌구나 하고 실감했을 때, 황야에서 모든 빛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보랏빛이 되었고, 흰빛은 격렬하지만 바람없는 폭풍이 다가올 때처럼 납빛이 되었다. 분홍빛 얼굴들이녹색이 되었고, 갑자기 더 추워졌다. 그러니까 이것이 태양의 패배로군, 이게 다군> 하고 우리는 실망해서 우리 앞쪽의 음울한 구름 담요로부터 등 뒤의 황야를 향해 돌아섰다.
황야는 납빛이었고,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가 더일어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예기치 않았던 무섭고피할 수 없는 것이 닥쳐 오고 있었다. 황야를 뒤덮은 그늘이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마치 배가 위기의 순간에 균형을되찾는 대신 조금씩 더 기울다가 돌연 전복되고 마는 것과도같았다. 그렇게 빛이 차츰 기울다가 완전히 나가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세상의 피와 살이 죽고 해골만 남겨졌다.  - P155

다. 물고기들도 의도적으로 그런 모양을 띠고서 오직 자기자신이 되기 위하여 세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듯하다. 그들은 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형태에 그들의존재 이유가 있다. 완벽한 실존이라는 충분한 목적 외에 다른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겠는가? 어떤 것은 통통하게, 어떤 것은 얄팍하게, 어떤 것은 등성이에 지느러미를활짝 펼치고, 어떤 것은 전기를 띤 빨간 줄무늬를 하고, 어떤것은 프라이팬 위의 새하얀 팬케이크처럼 너울거리고, 또 어떤 것은 푸른 갑옷을 입고, 어떤 것은 엄청난 집게발을 달고,
어떤 것은 거대한 구레나룻을 잔뜩 달게끔 말이다. 인류 전체보다도 대여섯 마리 물고기에게 더 많은 정성이 쏟아진 것만 같다. 우리의 트위드와 실크 밑에는 단조로운 분홍빛 맨살밖에 없다. 시인들도 이 물고기들만큼 뼛속까지 투명하지는 않다. 은행가들도 집게발은 갖지 못했으며, 왕과 왕비들도 주름 목깃이나 프릴장식을 달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맨몸으로 수족관에 넣어진다면 - 아니,
이쯤 해두자. 이제 눈이 감긴다. 눈은 우리에게 죽은 세계와불멸의 물고기를 보여 주었다. - P158

나방의 죽음

낮에 날아다니는 나방은 나방이라 불리는 것이 어울리지않는다. 그것들은 커튼 그늘에 잠들어 있는 흔하디흔한 노랑뒷날개나방이 어김없이 환기하는 어두운 가을밤과 담쟁이꽃의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잡종으로 나비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자신의 동류인 나방답게 칙칙하지도 않다. 하여간 좁다란 건초 빛깔 날개와 같은 빛깔 술이 둘린 이 나방은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9월중순의 기분 좋은 아침, 공기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여름날보다는 선득한 바람결이 느껴졌다. 창문 저편 들판에서는 이미 쟁기가 자국을 내고 있었고, 보습이 지나간 땅은 평평하게골라져 습기를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다. 들판과 그 너머 언덕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활기 때문에 눈은 가만히 책만 들여 - P159

다보고 있기 어려웠다. 떼까마귀들도 연례행사를 벌이는지,
나무들의 우듬지 주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마치 수천 개의 검은 매듭이 있는 커다란 그물이 공중에 던져지는 듯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천천히 나무 위로 내려앉아, 나뭇가지 끝마다검은 매듭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또 갑자기 이번에는더 큰 원을 그리며 그물이 펼쳐지고 일제히 퍼덕거리며 깍깍대는 것이, 그렇게 공중에 던져졌다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에내려앉는 것이 엄청나게 신나는 경험이기나 한 것 같았다. - P160

떼까마귀들과 쟁기질하는 사람들과 말들, 그리고 심지어풀이 말라 민둥한 언덕에까지 활기를 불어넣는 동일한 에너지가 나방을 네모난 유리창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파닥여 가게 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묘한 동정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는 즐거움의 가능성들이 너무나 크고 다양해 보였으므로, 고작 한 마리 나방, 그것도 낮에 다니는 나방 몫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가혹한 운명이라생각되었다. 그런데도 그 오죽잖은 기회를 최대한 즐기려는그의 열의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갇힌 유리창의한쪽 구석으로 힘차게 날아가, 거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또다른 구석을 향해 가로질러 날아갔다. 세번째, 네번째 구석으로 날아가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언덕들이 아무리 크고, 하늘이 아무리 넓고, 집들의 연기가 아무리 멀리까지 올라가고, 바다에 나가 있는 증기선들이 - P160

이따금 아무리 로맨틱한 소리를 낸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를 지켜보노라니, 마치 세계가 지닌 거대한 에너지의 아주가늘지만 순수한 한 가닥이 그 작고 연약한 몸속에 밀어 넣어진 듯했다. 그가 유리창을 이리저리 가로지를 때마다, 내게는 활기 찬 빛 가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거의 생명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작고 그토록 단순한 형태의 에너지로서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와 나나 다른 인간들의 두뇌 속에 있는 그토록 많은 좁고 복잡한 복도들을 지나왔으므로,
그에게는 비장한 동시에 경이로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마치누군가가 순수한 생명의 작은 구슬을 가지고 솜털과 깃털로
"가능한 한 가볍게 꾸며서, 우리에게 생명의 진정한 본질을보여 주기 위해 춤추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이게 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제시된 것의 낯설음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 P161

우리는 그것이 둥그스름하고 오톨도톨하고 거추장스럽게 꾸며져서 극도의 조심성과 위엄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것만을보고, 생명에 대해서는 잊기 쉽다. 만일 그가 다른 형태로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이 되었을지 생각하니, 그의 단순한 움직임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춤추기에 지친 듯 양지바른 창턱에 내려앉았고, 그 진기한 구경이 끝났으므로 나는 그에 대해 잊어버렸 - P161

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는다시금춤추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이 굳어져 움직이기가 거북한지 유리창 바닥으로 퍼덕여 가는 게 고작이었고, 창문을가로질러 날아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다른 일들에 몰두한 채, 잠시 별생각 없이 그 헛된 시도들을 바라보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가 다시금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기계가 고장 난 원인은 생각지도 않고 다시 작동하기만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대략 일곱 번쯤 시도한끝에 그는 나무로 된 창틀에서 미끄러져 날개를 퍼덕이며 떨어져 창턱에 널브러졌다. 뒤로 나가떨어진 그의 무력한 자세가 나를 자극했다.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리를 버둥거려 봤자 더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그가 바로 서도록 도우려고 연필을 뻗어 주려다 말고, 나는문득 그렇게 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죽음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도로 내려놓았다. - P162

다리들이 한차례 더 버둥거렸다. 나는 그가 맞싸우는 적을 찾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정오경인 듯, 밭일은 멈춰 있었다. 조금 전의 활기 대신 적막과 고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개울가로 날아가고 없었다. 말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여전히 힘이, 특별히아무것에도 괘념치 않는 무심하고 비개성적인 힘이 있었다. - P162

그 힘이 작은 건초 빛깔 나방과 맞서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해도 소용없었다. 그 작은 다리들이 다가오는 숙명에 맞서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숙명은마음만 먹으면 온 도시를, 도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라도
‘잠기게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죽음에 맞설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지쳐 정지했던 발이 또다시 버둥거렸다. 이 최후의 항거는 훌륭했고, 너무나 필사적이라 그는 마침내 바로 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물론 전적으로 생명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작은 나방의 이거대한 노력, 아무도 돌아보지도 알아주지도 않건만 그처럼엄청난 힘에 맞서서, 다른 아무도 높이 평가하거나 간직하려하지 않는 것을 애써 지키려는 노력은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다시금 생명이, 그 순수한 구슬이 보이는 듯했다.  - P163

나는다시 연필을 들었다.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하지만 바로 그순간 죽음의 틀림없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나방의 몸이 풀어지더니 즉시 뻣뻣해졌다. 싸움은 끝났다. 그 작은 생물이이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은 나방을 바라보노라니, 그토록하찮은 적수에 맞선 그토록 큰 힘의 대수롭잖은 승리가 나를경이감으로 휩쌌다. 조금 전에는 삶이 기이했듯이, 이제 죽음이 기이해 보였다. 나방은 몸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아무불평 없이 침착하게 누워 있었다. <오, 그렇다>라고 그는 말하는 듯했다. <죽음은 나보다 강하다>라고. - P163

시간은 저녁, 계절은 겨울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겨울이라야 샴페인처럼 밝게 빛나는 대기와 길거리의 화기애애함지,
람이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늘과 고독과 건초 널린 들판에서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에 대한 동경에 도발당하지 않는다. 저녁이라는 시간 또한우리에게 무책임함을 허락하는 것이, 어둠과 가로등 덕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날씨 좋은 저녁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자신을 떨쳐 버리고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저 거대한군중의 일부가 된다. 그들과의 어울림은 자기만의 방에서 누린 고독 끝이라 한층 더 유쾌하다.  - P166

눈에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눈은 아름다움에만 머문다.
마치 나비와도 같이, 빛깔을 찾아다니며 온기를 다 자연이 스스로 한껏 갈고 닦아 모양을 낸 이런 겨울밤에도, 눈은가장 어여쁜 전리품들을 골라내며, 마치 온 지구가 보석들로이루어지기나 한 것처럼 자잘한 에메랄드와 산호 조각들을떼어낸다. 눈이 할 수 없는 것은(보통의, 비전문적인 눈 말이다)이 전리품들을 배열하여 좀 더 섬세한 각도와 관계를도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소박하고 달콤한 식사를,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오래 즐긴 후에 우리는 포만감을 의식하게 된다. - P170

여름이면 자기 뜰에서 키운 꽃이 담긴 화병이 먼지투성이 책 더미 위에서 가게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방이 책이고, 언제 봐도 한결같은모험심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 헌책들은 집 없는 책, 야성적인 책들이다. 그것들은 온갖 빛깔의 깃털을 지닌 방대한무리 속에 섞여 왔으며, 길들여진 도서관 책들에는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무리 가운데서, 우리는 전혀 모르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이 되기도 한다. 위쪽 서가에 꽂힌 회백색 책의 허름하고 버림받은 듯한 태도에 마음이 끌려손을 뻗칠 때면 항상 희망에 부푼다.  - P178

그러나 이런 개별적인 존재의 순간들은 훨씬 더 많은 비존재의 순간들 속에 묻혀 있다. 나는 레너드와점심을 먹으면서, 또 차를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를 벌써 다잊어버렸다. 어제는 좋은 하루였는데도 그 좋았던 것이 일종의 솜 같은 두루뭉술한 것 안에 묻혀 버렸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하루하루의 상당 부분은 의식적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산책하고, 식사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해야 할 일들을처리한다. 고장 난 진공청소기, 저녁 식사 지시하기, 메이블에게 지시할 사항을 적어 두기, 빨래, 요리, 책 제본 등. 좋지않은 날이라면 비존재의 비중이 훨씬 더 커진다. 지난주에는약간 열이 있었고, 거의 종일 비존재였다. 진짜 소설가는 그두 가지 존재를 어떻게인가 전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이그랬고, 트롤럽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 두 가지를 다 전달할 수 있었던 적이 아직 없었다. - P206

 그런데 그를 치려고주먹을 드는 순간, 이런 느낌이 스쳤다. <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 나는 제풀에 손을 떨구고 서서 그가 나를 때리도내버려 두었다.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망 없는 슬픔의 느낌이었다. 마치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의 무력함을 알아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끔찍하게 풀이 죽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두 번째 예도 세인트아이브스의 정원에서였다. 나는 현관 앞 화단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게 전체야>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널따랗게 잎을 펼친 어떤 식물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 그 꽃자체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 어떤 고리가 그 꽃을 에워싸고있다는 것, 그 꽃은 진짜 꽃이고 일부는 대지이고 일부는 꽃이라는 것 등이 갑자기 명백해졌다. 나는 그런 생각을 나중에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간직해 두었다.  - P207

 어떤 질서의 현현이거나 장차 그 현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현실로 만든다. 오로지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온전하게 만들며, 이때 온전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할 힘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나뉜 부분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없애기 때문인 듯한데 ㅡ 내게 큰 기쁨을 안겨 준다. 그것은 아마 내가 아는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면서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 발견하고,
어떤 장면을 제대로 표현하고, 어떤 인물을 온전히 드러나도록 만들 때 느끼는 황홀경이다.  - P210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를 철학이라 불러도 될는지. 하여간 그것은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변함없는 생각이다. 즉, 솜의 이면에는 어떤 패턴이숨어 있고,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는 이 패턴과 연관된다는 생각, 세계 전체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우리도 이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햄릿 Hamlet』이나 베토벤의사중주곡은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덩어리에 관한 진리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도 없고, 베토벤도없고, 더더구나 신은 없다. 우리가 말이고, 우리가 음악이고,
우리가 물자체(物自體)이다. 나는 충격을 받을 때 이 사실을확인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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